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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재 은혜, 더 깊어지는 은혜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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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재 은혜, 더 깊어지는 은혜 (눅 19:1-10)  

은혜는 우리의 일상 속에 빛처럼 비치고 있다. 우리가 ‘이런 것도 은혜인가!’ 알지 못하고 의심해서 그렇지 빛이 비치고 있다. 가령 예수님이 우리 가정에 들어오셔서 좌정하시기를 기다리는 것도 은혜 입은 삶이다. 예수님을 가까이 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먹고 성탄절을 기다리는 것도 은혜 입은 삶이다. 금번 성탄절에 선교사를 돕고 가난한 이를 돕고자 하는 것도 은혜 입은 삶이다. 꿈꾸고 소망하는 것이 많은데 그것이 모두 예수님에게 향하는 것이라면 은혜가 임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은혜를 베푸신다. 영혼이 죽은 인생이 하나님을 먼저 찾을 수 없기에 찾을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신다. 웨슬리는 이것을 선재 은혜라 하였다. 즉 나 개인이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믿게 되기 이전에 하나님 편에서 예수님을 향하도록 해주시는 사건들인 것이다. 

그것은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하였고, 롬8:30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라고 하였다. 이런 선재 은혜의 부르심을 통해 구원을 주신 성경의 대표적인 사람이 삭개오다. 삭개오가 바로 이 선재 은혜로 인해 예수님을 만났고 죄에서 구원을 받았으며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회복되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선재 은혜는 지금도 임하고 있다.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어머니의 사랑이 존재하듯이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다. 우리가 이것을 깨닫지 못해서 모르고 지나가는 것 뿐이지 하나님 편에서 계속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먼저 부어주시고 계시다. 삭개오에게 부으신 선재 은혜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1.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이다. (눅19:3)

눅19: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삭개오의 마음 속에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 마음이 발동되었다. 그래서 보고자 한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또 한편 부자였다. 자신의 업무에 몰입되어 살아가는 삭개오의 마음 속에 전혀 예기치 않는 마음이 일어난 것이다. ‘예수님은 어떠한 사람인가?’ 알고 싶은 호기심이 일어났다. 호기심이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아도 예수님을 알고 싶고 예수님을 보고 싶은 호기심이라면 그것은 선재 은혜가 만들어내는 선물이다. 

생각도 죽은 생각이 많고 마음도 허망한 것에만 끌려가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의 지적 호기심이, 알고자 하고 보고자 하는 호기심이 예수에 관해서 기울어진다면 선재 은혜가 임한 것이다.

2. 예수님께로 달음질하는 마음이다. (눅19:4上)

삭개오는 키가 작았다. 예수님을 보고 싶은 호기심으로 보고자 하나 사람이 많이 있으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삭개오는 앞으로 달려갔다. 예수님을 보기 위한 방법을 생각했다. 대개 사람들은 신앙 생활을 하는데 장애물이 생기면 거기서 멈춘다. 예수님을 알고 싶어 교회에 나왔는데 사람들이 부담스럽고 사람들 틈에서 서성거리는 것이 편치 않다. 그러면 뒤로 물러서고 만다. 그런데 삭개오는 달려갔다. 

눅19:4上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그 장애물이 사람이든지 물건이든지, 그 장애물이 내 탓이든지 내 핸디캡이든지 그것을 개의치 않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 바로 은혜다. 사람들 틈을 빠져 나와 자꾸 앞으로 달음질하는 마음, 이 마음이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선재 은혜다. 이 선재 은혜로 나와 여러분은 모두 교회로 달려오고 은혜 받을 자리에서 방해되는 것을 뛰어넘어 앞으로 나아오는 것이다. 

비를 맞으려면 비가 내리는 날에 문 밖으로 나가 서야 한다. 눈을 맞으려면 마찬가지로 눈이 내리는 날에 문 밖으로 나가 서야 한다. 주님을 만나려면 교회로 달려와야 한다. 교회로 와서 제단 앞으로 달려와야 한다. 주님을 향한 달음질, 그 달려오는 마음이 충만한 것, 그것이 선재 은혜다.

3. 주님을 향한 담대한 용기다. (눅19:4下)

눅19: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삭개오는 왜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는가? 예수께서 그리고 지나가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주님이 지나가시는 곳에서 주님을 만나려면 작은 키를 가지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작은 자가 보려면 올라가야 한다. 보려면 돌무화과나무를 사용해야 한다. 

삭개오가 그 나무로 올라간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다. 세리장이란 계급을 떼고, 부자라는 계급장을 떼고 주님을 만날 수 있다면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것, 사람들의 시선을 받게 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삭개오는 이미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주님을 만나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갔다. 주님을 대면하여 주님을 제대로 보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사람처럼 용기를 품었다. 정말 담대한 용기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갈망한다고 하면서 체면과 격식, 사회적 신분만을 의식한다면 어떻게 주님을 대면하겠는가? 모든 격식을 깨로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삭개오, 키는 작았으나 믿음의 용기는 거목이었다.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것, 그것은 7살 어린 소년이래서가 아니다. 지능이 모자라서도 아니다. 올라가야만 주님을 대면할 수 있기에 나무를 타는 용기의 사람이 되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는 장소로 향하는 마음의 용기, 그것은 선재 은혜다. 누가 시켜서 나무 위로 가는 것이 아니다. 선재 은혜가 나를 용기 있게 하는 것이다. 

릭 워렌 목사는 자신이 존경하는 크리스 웰 목사에게 은혜를 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들어 천 리길을 차를 몰고 달려갔다. 은혜의 장소에 나아가기 위해 몇 시간이고 자동차 엑셀레이터를 밟고 달리는 마음, 이런 마음이 바로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선재 은혜의 마음이다. 

선재 은혜 아래 있는 삭개오는 여리고 길목에 서게 되었다. 사람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서 주님을 기다리다가 정말 더 큰 은혜를 받게 되었다. 잊을 수 없는 은혜를 입은 사람이 되었다.

첫째, 주님이 먼저 쳐다보는 은혜를 입었다. 

눅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내려다보는 삭개오가 주님을 향해 “예수님”하고 사인을 보내기도 전에 주님이 쳐다 보셨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삭개오를 주님이 먼저 쳐다 보셨다. 주님이 나를 먼저 보고 계신다.

둘째, 주님이 먼저 말씀해 주시는 은혜를 입었다.

눅19:5中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삭개오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 나 삭개오예요.”라는 말도 해보지 못했다. 주님이 먼저 내려오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먼저 속히 나무 아래로 오라고 일러두셨다. 이것이 은혜인 것이다.

셋째, 주님이 먼저 집으로 들어가시는 은혜를 입었다.

눅11:5下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삭개오는 자기가 먼저 집의 대문을 연 것이 아니다. 주님이 먼저 삭개오의 집에 머물겠다고 하셨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호기심이 생기고 장애물을 넘어 달음질을 치고 나무 위로 올라가는 격을 깨는 용기가 선재 은혜의 힘이지만 막상 주님을 길에서 대면하고 나니 삭개오는 넘치는 주님의 사랑, 본격적인 실제 은혜를 받았다. 주님이 먼저 쳐다 보신다. 주님이 먼저 말을 건내신다. 주님이 먼저 죄인 중의 죄인인 집으로 들어가신다. 삭개오는 주님의 은혜가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불가항력적 은혜 앞에, 죄인 앞에 부어주시는 은혜 앞에 영접하는 일 밖에 할 수 없었다. 수용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눅19: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내 집에 주님이 들어오신다는 기쁨을 누리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눅19: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라고 말하는 것과 상관이 없었다. 오직 삭개오는 예수를 영접하였다. 불가항력적인 은혜에 압도를 당하여 삭개오의 삶은 변화되었다. 눅19:8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의 이 고백! 누가 시켰는가? 아니다. 은혜가 빚어 낸 결과다. 은혜의 힘이 거룩하다.

① 물질에서 자유케 되는 변화가 생겼다.

삭개오는 자발적으로 재물을 나눈다. 재물을 모아 부자가 되고 재물을 위해 세리장이가 되었는데 그 재물을 나눈다.

② 이웃을 향한 변화가 마음 속에 생겼다.

인생을 사는 삶의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이웃을 사랑하는 변화, 가난한 자들과 관계를 맺고 싶은 변화가 생겼다.

③ 말씀대로 걸어야 하는 변화가 생겼다.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이는 율법대로 회개하고 죄를 청산하는 깨끗한 마음이다. 출22:1에 기록된 배상의 법대로 살아가려는 변화다. 말씀대로 하는 회개, 말씀을 따라 사는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런 삭개오를 향해 예수님은 선언하신다.
눅19:9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삭개오는 구원을 얻었다. 구원을 위해 그가 행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구원이 이르겠다고 주님이 선포하셨다. 무엇이 삭개오를 구원하게 되었는가? 바로 은혜다. 먼저 부어주시는 선재 은혜, 그리고 그 선재 은혜를 따라 마음 속에 일어난 주님을 향한 마음과 생각, 그 마음 가운데 주님의 은혜는 파도처럼 임했다. 죄인의 괴수같은 사람을 주님의 은혜의 역사로 사람을 바꾸어 놓는다. 열등감과 소외감으로 가득 차 돈으로 인생 승부수를 걸었던 삭개오를 구원의 자손으로 세우셨다. 

예수가 어떤 사람인가 알고자 하는 호기심
예수님 계신 곳으로 달려가는 달음질
은혜 받는 장소에로 격을 깨고 올라가는 신앙의 용기

이런 마음들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있다면 이는 다 구원을 주시려는 선재 은혜다. 내 마음 속에 주님을 향한 생각, 문득 기도하고픈 생각, 성경을 읽고 싶은 갈망, 이웃을 향해 선교비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다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비친 것이다.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대강절! 우리 마음에 주시는 거룩한 은혜를 외면하지 말자. 모른 척 하지 말자. 그 생각을 살리고 그 생각을 따라 움직여라. 삭개오가 받은 구원의 은혜가 우리의 가정마다 임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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