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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평생 득이 될 올바른 선택 (요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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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득이 될 올바른 선택 (요 21:1-6)

옛 말에 산도 좋고 물도 좋을 수 없다고 했는데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다 좋기만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배우자를 선택할 때 완벽한 사람을 찾으면 영원히 결혼하지 못합니다. 백번이 아니라 이백 번 선을 봐도 완벽한 배우자감은 없습니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이미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완벽하지 못한 사람이라도 몇 가지 중요한 부분이 내 마음에 들면 나머지는 양보해도 됩니다. 대한민국이 다 마음에 드는 나라는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우리가 그 사실을 잘 압니다. 대한민국은 좁고 사람이 많고 경쟁이 심하고 갈등이 많습니다. 

하지만 장점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정이 있고 순하고 재미있습니다. 미래가 밝고 앞으로 더 잘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복음이 잘 전파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하나밖에 없는 고향이요 조국입니다. 우리 교회가 다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좀 깍쟁이 같고 좀 차갑고 점잖지요. 어서 오시라고 법석 떨면서 맞아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점도 있습니다. 강요하지 않고 인격적이고 사람의 열심을 하나님의 은혜보다 앞세우지 않습니다. 교인들이 순수하고 목사를 닮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교회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현실이 물고 좋고 산도 좋은 그런 현실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기준으로 선택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것을 잘하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드릴 말씀은 설교 제목 속에 이미 들어있습니다. 일평생 득이 될 올바른 선택. 과연 인간의 한 번의 선택이 일평생 득이 될 수 있느냐. 그 효험이 그렇게 오래갈 수 있느냐. 그런 게 정말 있느냐. 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금세뿐만이 아니고 내세에도 득이 되는 일입니다. 또 내 세대뿐만 아니고 다음 세대에도 복이 되는 일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몇 대까지 은혜를 베푸리라고 하셨습니까?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제 인생에서 제일 잘 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일은 저에게 있어서 하나의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고 그것을 기준으로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은 후가 구별이 되고 두고두고 저의 삶에 영향을 주는 아주 귀중한 사건이었습니다. 제가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처음 들어간 고등학교는 친구가 많고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11학년 때 다른 학교로 전학 갔습니다. 학력수준이 더 높은 학교를 찾아서. 그런데 새로 전학 간 학교는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친구 사귀기가 쉽지 않고 학생들은 이미 다 친구가 있는데 새로 전학 온 한국인 이민자를 그들이 잘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좀 외로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 학교를 다니면서 제 인생에 크게 득이 된 세 가지 유익을 얻었는데 첫째는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 학교에서 처음으로 제 또래의 진정한 믿음이 있는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과 제 자신을 비교했을 때 제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것이 저로 하여금 구원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게 하고 그것이 구원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어떤 혜택보다도 그 하나만 가지고도 제가 그 학교에 전학 간 것이 얼마나 축복이었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제가 그 학교에서 얻은 유익은 그것뿐만이 아니고 둘째로 영어를 잘하게 된 것, 세 번째는 좋은 대학에 진학하게 된 것,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비록 친구 사귀기가 어렵고 외로웠지만 제 평생에 유익이 된 혜택을 거기서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사건은 요한복음 거의 마지막 장 아닙니까. 그런데 누가복음 5장에 아주 비슷한 사건이 기록돼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나는 순간에 이루어진 일이고 오늘 본문 요한복음 21장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건이 아주 흡사합니다. 둘 다 베드로가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황이었는데 예수님이 아침 일찍 지시를 하십니다. 

누가복음 5장에는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고 요한복음 21장에는 배의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 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내렸더니 잡은 고기가 하도 많아서 배가 가라않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개의 별개의 사건인데 둘 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고, 하나는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일어난 일이고, 하나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일어난 일입니다. 두 번 다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다고 했습니다. 

이 경험이 베드로에게는 큰 영적인 깨달음이요 교훈이 되었습니다. 첫째로 이것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라는 증거를 이 사건을 통하여 증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신뢰할만한 분인가를 알 수 있게 된 것이고 둘째로는 일평생 그가 기억할 교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어떤 결과가 따르느냐 하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베드로가 임의로, 자기 생각대로 그물을 던진 게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그물을 던진 것입니다. 그랬더니 상상할 수 없는 큰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일평생 기억하는 교훈이 됩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라는 믿음의 원리를 공부했습니다. 오늘의 사건은 이 믿음의 원리가 어떻게 적용되느냐를 아주 잘 보여줍니다. 이 본문에서 베드로가 임의로 그물을 던진 게 아닙니다. 자기 생각대로, 자기의 결정대로 그물을 던진 게 아닙니다. 이미 그는 고기잡이를 했는데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한 번 더 그물을 던진 이유는 예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물을 배의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베드로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이 역사하는 원리를 보여주고 있는데 첫째는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둘째는 베드로가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이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들음으로부터 무엇이 생깁니까? 믿음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고 베드로가 그 말씀을 들었고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믿음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어떻게 됐습니까?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 역사하는 원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사람이 그것을 듣고 들음으로 믿음이 생기고 믿음대로 했더니 성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아주 귀중한 믿음의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베드로가 자기 생각대로 그물을 던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건 장담할 수 없는 결과입니다. 자기 실력대로 결과를 얻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구체적으로 배의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셔서 베드로가 순종하는 것은 이것은 예수님이 그 결과를 책임지십니다. 이것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물 위를 걸어서 나에게 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예수께서 밤에 호수 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에 다가오셨을 때 베드로가 주님이시면 나로 명하여 주님께 가게 하소서 그랬더니 예수께서 오라고 명령하셨어요. 그래서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고 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느냐. 예수께서 오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베드로가 임의로 자기 생각대로 배에서 내렸다면 물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본인이 수영을 할 줄 아냐 못하냐에 그의 생명이 좌우되었겠지요. 그러나 예수께서 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결과를 예수님이 책임을 져 주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신앙이 뜨거워지면 한번쯤 고민하는 것이 있지요. 내가 목사가 되어야 될까? 내가 선교사가 되어야 될까? 이걸 고민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신앙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면 거기에 대해서 고민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이 믿음이 좋으냐 나쁘냐, 뜨거우냐 그렇지 아니하냐에 좌우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부르셨느냐에 좌우됩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호숫가를 지나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랬기 때문에 그들이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을 수 있었던 것이고 그들의 삶과 사역을 예수님이 책임지시는 것이지 이들이 먼저 자기의 생각을 좇아서 주도적으로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부르셨기 때문에 그들이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나이요 내가 너희를 택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소위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모든 것은 우리의 주도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도 내가 예수님을 선택해서 믿게 된 것이 아니고 예수께서 만세전에 우리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다만 그 결과가 이제 나타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은혜를 주신 것이고 우리로 하여금 믿을 수 있게 하신 것이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입니다.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마음을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니에요. 내가 남보다 더 마음이 좋고 순수하고 착해서 남들은 안 믿는데 나는 예수님을 선택한 게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선택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시고 믿음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주도권을 주님이 갖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명-Calling,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소명을 주셨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저로서의 소명이 있고 여러분은 여러분으로서의 소명이 있습니다. 니고데모 · 아리마대 요셉도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그들은 사도의 길을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대로 예수님을 섬길 일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제자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로되 각자의 소명대로 예수님을 섬기면 되는 것입니다. 어느 한 가지가 더 낫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잘 믿는 교수님도 필요하고 지성인도 필요하고 예수님을 잘 믿는 사업가가 필요하고 예수님을 잘 믿는 어머니들이 필요하고 아버지가 필요하고 선생님이 필요하고 예수님을 잘 믿는 과학자들이 필요하고 예수님을 잘 믿는 정치인들이 필요하고 예수님을 잘 믿는 학생들이 있어야 되고 예수님을 잘 믿는 근로자들이 있어야 됩니다. 

모든 분야에 있어서 몸이 각자 지체가 다르지만 한 몸을 이룬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마켓 플레이스에서도 사명을 가진 자를 세우시고 학계에서도 사명을 가진 자들을 세우시고 그리고 교회에도 사명을 가진 자들을 세우셔서 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예수님의 종으로 여기고 있는 곳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서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애쓰면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왜 이 세상에서 더 많은 일을 행하지 않으시냐? 이렇게 의문을 갖는데 그 의문을 갖는 사람은 물어봐야 됩니다. ‘도대체 이 세상에 자신을 예수님의 종으로 여기고 자신의 삶을 주님이 쓰실 수 있도록 드리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왜 주님이 이 세상에 더 많은 일을 행하시지 않느냐 하는 질문은 이 세상에 자기 자신을 예수님의 종으로 여기고 자기 자신을 예수님이 쓰실 수 있도록 바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느냐를 물어보면 대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 자기 자신을 예수님이 쓰실 수 있도록 드리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자기 자신을 예수님께 드리지는 않으면서 예수님이 뭔가를 우리에게 더 많이 주지 않느냐를 생각하는 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지 않느냐를 생각하지 말고 왜 우리가 예수님께 더 많이 가까이 가지 않느냐를 생각해야 되고, 하나님이 왜 더 많이 주시지 않느냐를 생각할 게 아니라 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더 드리지 않느냐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소명이 어디 있는지를 안다면 의심 없이 후회함이 없이 그것을 순종해야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배의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을 때 결과가 즉시 나타났지요. 즉시 잡은 고기가 엄청 많아서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누가복음에는 찢어졌다고 했는데 요한복음에는 그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순종의 결과가 베드로처럼 늘 즉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시련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즉시 나타난다면 시련이 없지요. 그러나 즉시 순종과 믿음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24년을 기다려서 이삭을 얻을 수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40년을 기다려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브라함도 의심한 적이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도 의심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다리는 과정에서 의심이 올 때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련입니다. 모든 믿음은 시련을 당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시련을 당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에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앎이니라’ 우리가 당하는 시험은 우리의 믿음을 시련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이기기 위해서는 인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믿음은 시련을 통하여 강건해집니다. 믿음이 처음 생기는 것은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지만 그 믿음이 강건하게 되는 것은 시련을 통해서입니다. 우리 몸이 건강해지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저처럼 매일 운동을 하는 사람은 근육운동을 할 때 처음에는 근육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픕니다. 그건 근육이 지금 강해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걸 극복하고 계속 운동을 하면 더 이상 안 아프고 근육이 발달합니다. 단순한 원리 아닙니까.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처음 믿음에 시련이 올 때는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요. 그걸 극복하고 인내하면 그 믿음이 이전보다 더 강건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중반에 서신 분들, 또 황혼기에 계신 분, 아니면 아직 전반부에 계신 분.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묻는 질문은 ‘내가 가는 길이 과연 옳은 길인가? 내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바른 길을 선택했을까,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모든 것은 실존적인 질문입니다.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은 내가 배의 오른편에 던졌느냐에 좌우됩니다. 예수께서 오른편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영어에서도 오른쪽을 right라고 하지요. right는 오른쪽이라는 말도 되지만 옳다는 말도 됩니다. 우리말도 그렇지요. 오른 이라는 말, 오른편, 오른쪽, 옳다는 말이지요. 예수께서 그물을 배의 오른편에 던지라. 옳은 쪽에 인생을 투자하라는 얘기에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서 바른쪽에 그물을 던졌다면 염려할 필요가 없고 후회할 일이 없습니다. 던지는 것은 나의 몫이지만 그 다음은 주님이 책임지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좇아서 바른쪽에 내 인생의 그물을 던졌다면 그 결과를 두고두고 보게 될 것입니다. 만일 내가 아직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어떻게 하느냐? 이제라도 여러분의 배의 바른편에 그물을 던지면 됩니다. 이제라도 믿습니다! 

던졌다고 했어요. 그물을 던졌다고 했습니다. 던지는 것은 믿음의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믿습니다! 하고 던져야 됩니다. 용기가 있어야 됩니다.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물을 던지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그물에 고기를 잡게 하는 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반드시 내가 주님의 말씀대로 바른쪽에 인생의 그물을 던졌다면 그것이 두고두고 우리의 삶에 득이 되고 혜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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