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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 받은 제자 (행 18:23-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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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받은 제자 (행 18:23-19:7) 
 
 
에베소 사역의 초기에 있었던 사건들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바울은 안디옥에 돌아온 후 “얼마 있다가” 곧바로 3차 전도여행(약 54-58)을 시작합니다. “갈라디아와 브루기아”는 2차 전도여행 때 성령께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막으신 지역들입니다(16:6-7). 하지만 이제는 그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할 수 있었습니다(23). 성령께서는 그분의 시간표를 따라 전도의 문을 때로는 막으시고 때로는 여셨습니다. 성경은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라고 합니다(전 3:1). 그러므로 성도는 내가 원하는 때를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를 분별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한편 이 무렵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에는 큰 도서관이 있고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대도시였습니다. 톨레미 필라델푸스(Ptolemy Ⅱ Philadelphus, 재위 283-245 BC)의 명령 하에 헬라어 번역 성경인 70인역(Septuagint)이 만들어진 곳이며,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유대인 필로(Philo, BC 20-AD 50)가 헬라 철학을 이용해 구약을 풍유적으로 해석하여 가르치며 영향을 떨쳤던 곳이기도 합니다. 아볼로는 학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사람이었는데(24),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쳤습니다(25a).

아볼로는 학식 있는 사람이었고 구약 성경에도 해박했습니다. 뛰어난 자질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도를 배운 후에는 끓어오르는 열정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가르치는 실천적인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소개 말미에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습니다(25b). 뭔가 부족하다는 뉘앙스가 풍깁니다. 아볼로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즉시 이상함을 감지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데려다가 요한의 세례 이후의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설명해주었습니다. 학문은 아볼로가 많았을지라도 주님의 참된 도리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더 자세히 접촉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 후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할 때 형제들이 격려하면서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리고 아볼로는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습니다(27). 그 유익은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긴 결과로 생겼습니다(28). 25절과 비교해보면 아볼로에게 부족했던 것, 즉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더 자세히 설명했었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열심”이라는 특징은 “은혜”로 바뀌었고, “예수에 관한 것”대신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아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핵심으로 하는 은혜의 복음을 확실하게 깨닫게 된 것이지요.

본문에서 아볼로는 사역자였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성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볼로가 귀 기울여 배운 태도는 참 아름답습니다. 또한 사역자의 가르침에 핵심이 빠졌어도 공개석상에서 바로 잡으려 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영접하여 설명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태도 역시 아름답습니다. 성숙한 교회는 사역자 한 사람의 탁월함과 열정만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사역자의 부족함까지도 채울 수 있는 수준 있는 성도들의 동역이 필요합니다. 또한 자존심을 내세우거나 약점을 붙잡고 견제하는 태도가 아닌 상호 존중의 태도는 모두에게 필요하지요. 아볼로는 더욱 성숙한 일꾼이 되었고, 그 결과로 믿는 자들은 “많은 유익”(27b)을 얻었습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는 동안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해 “어떤 제자들”을 만났습니다(19:1). 이들을 18장 27절에서처럼 성도라는 의미의 제자로 여겨야 할지 19장 3절을 참고하여 세례 요한의 제자로 봐야할지는 논란이 많습니다. 저는 불분명한 표현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림자와 모형으로 계시된 구약 시대와 원형과 실체로 계시된 신약 시대가 중첩되는 독특한 시대에 살고 있었던 그들은 딱히 누구의 제자라고 말하기 어려운 애매한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했으나 메시아를 영접한 것은 아니었고, 구약 성도로 머물지 않았으나 아직 신약 성도에 속하지는 않은 아리송한 존재였지요.

사도는 이들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2a). 이 질문 속에는 중생한 참된 성도라면 누구나 성령님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있습니다. 사도는 이들이 경건한 모습을 얼마나 갖추었는지, 혹은 신앙 지식을 많이 가졌는지, 혹은 도덕적인 실천이 열정적인지를 참된 성도의 분별 기준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성도라면 반드시 성령님께서 내주하신다는 사실로만 분별하고자 했습니다. 놀랍게도 이들은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2b)고 대답합니다. 성령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면 아직 참된 성도가 아니며 중생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참 독특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재차 질문합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3a). “요한의 세례로라”(3b).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면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메시아가 오실 것을 말했었습니다(눅 3: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있음조차 듣지 못했다면, 이들이 요한의 세례라는 형식은 취하면서도 요한의 가르침은 몰랐음을 말해줍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했습니다. 당시 유대인이 생각했던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닌 죄로부터의 구원하실 메시아를 소개했지요. 그의 물세례는 바로 이 분을 이스라엘에 나타내기 위한 목적이라 했습니다(요 1:29-34).

요한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그의 세례는 예수님의 세례와 본질적인 내용이 같아서 기독교 세례의 기원이 됩니다. 진정으로 회심한 자라는 표(sign)와 인(seal)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떤 제자들”은 요한의 가르침의 핵심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세례는 하나님 나라에 받아들여진 하나님 백성이라는 내용을 표시하는 의미가 있는데, 어떤 제자들은 이러한 내용 없이 단지 세례라는 형식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라는 것과 요한이 백성에게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고 했으며, 그분이 곧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가르쳤습니다(4). 그러자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5).

아볼로의 경우도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었지만 다시 세례 받았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기독교 세례로서 유효하면 다시 세례 줄 필요가 없가 없기에, 이 구절을 재세례의 근거로 삼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하여 칼빈은 물로 행한 세례는 반복되지 않았다고 해석했습니다. 누가가 성령으로 세례 받은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이 해석을 취하면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6)라는 다음 구절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베풀어진 세례를 부연 설명하는 것이 됩니다.

아볼로는 복음에 대해 ‘더 자세한’ 가르침이 필요하긴 했어도 세례의 본질에 대한 이해는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요한의 세례가 유효했습니다. 반면 이들은 형식만 있는 세례였기에 유효하지 못하여 정당한 기독교 세례를 비로소 베푼 것으로, 즉 ‘첫 세례’들 준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칼빈의 견해도 장점이 있으나 이 해석이 좀 더 낫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이렇게 해석 할 때 오늘날 내용은 모른 채 형식적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나중에 정당한 기독교 세례라는 명목의 ‘첫 세례’를 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답부터 말씀드리자면,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면 중생했다는 표를 다시 취할 필요는 없고 ‘입교’만 하면 됩니다.

이 문제를 해명함에 있어서 이 “열두 사람”(7)이 구속사의 독특한 시기에 살았던 사람이라는 점을 주목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구원의 과정에서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분리되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과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것이 동시적입니다. 하지만 신약 성경이 기록되고 있던 시대는 믿는 것과 성령의 내주하심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열 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었지만 성령의 내주하심은 오순절 때 비로소 경험했지요. 이처럼 본문의 열 두 사람도 ‘회개’를 강조한 요한의 세례는 받고도 요한이 믿으라고 선언한 그 대상에 대한 ‘믿음’은 없는 상태, 즉 회개와 믿음 사이가 시간적으로 분리된 특이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열한 제자와는 달리 믿음과 함께 오순절과 같은 성령님의 내주하심은 동시적으로 체험하지요.

교훈을 직접적으로 계시한 서신서와는 달리 이야기 형태로 계시된 성경의 말씀들은 사건 속에 담긴 교훈을 취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모세가 홍해를 가른 사건은 일차적으로 구속사적인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지 본으로 삼아서 똑같이 따라 하도록 주어진 본문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역시 이야기 형태의 계시이므로 본문이 본으로 제시한다는 분명한 증거가 없는 한 따라서 행할 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구속사의 특별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의 독특한 경험을 모든 세대의 교회를 위한 보편적 원리로 적용시키려하면 반드시 성경을 곡해하게 됩니다. 본문을 재세례의 근거로 삼는 일이나, 1단계로 믿은 성도가 2단계로 성령체험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들은 이같은 구속사의 독특한 시대였음을 무시하고 무시간적으로 본문을 적용하여 성경을 곡해한 대표적인 실례들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믿는 자들 중에 특별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참되게 믿는 모든 성도가 성령님을 받은 제자라는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참된 가르침 없이 기독교의 어떤 형식만 취한 제자라면 반드시 참된 가르침에 대한 깨달음과 영접함이 있어야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일 수 있다는 교훈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됨과 관련하여 구약은 회개의 측면을 신약은 믿음의 측면을 좀 더 강조했다는 차이도 배울 수 있겠지요. 잘 헤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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