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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소리가 외친다 (사 4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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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리가 외친다 (사 40:1-8)


[“너희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 주민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일러주어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죄에 대한 형벌도 다 받고, 지은 죄에 비하여 갑절의 벌을 주님에게서 받았다고 외쳐라.” 한 소리가 외친다. “광야에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실 큰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라.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니,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함께 볼 것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것이다.” 한 소리가 외친다. “너는 외쳐라.” 그래서 내가 “무엇이라고 외쳐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을 뿐이다. 주님께서 그 위에 입김을 부시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그렇다.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

• 우리 시대의 바벨론 유수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대림절 초에 벌써 두 번째 불을 밝혔습니다. 어둠이 제 아무리 깊어도 촛불 하나 밝히면 천년의 어둠도 스러지게 마련입니다. 대림절 초를 밝히며 우리 마음에 도사린 어둠도 덩달아 물러갔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12월 1일은 사하라 사막의 은수자 샤를 드 푸코(1858년 9월 15일-1916년 12월 1일)의 축일이었습니다. 프랑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을 사치와 방탕 속에서 보냈습니다. 사관학교 생도시절의 생활 기록부가 그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성격은 좋으나 경솔하며, 쾌락만을 추구한다. 종종 행실이 좋지 않아 벌로 휴가를 취소해야 했다.” 그러던 그는 모로코를 탐험하던 중 무슬림들의 깊은 신앙심에 깊은 충격을 받고 기독교 신앙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렇게 놀랍습니다. 당신의 일꾼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참 다양합니다. 

회심을 경험한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자로 살기로 작정하고 수도원의 잡역부로 일하다가, 당시 가장 오지로 알려진 사하라 사막의 베니아베스와 타만라셋에 들어가 무슬림들을 돌보며 살다가 1916년 12월 1일 원주민들에게 피살되었습니다. 그의 고귀한 죽음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든 가슴을 깨우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그가 주님께 바쳤던 ‘의탁의 기도’를 볼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이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위에 이루어진다면
이 밖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도로 드립니다.
당신을 사랑하옵기에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하나님께 내 영혼을 바치옵니다.
당신은 내 아버지시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그의 기도는 대림절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신앙이 무엇인지를 가리키는 하나의 이정표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정신을 흐리마리하게 만드는 수많은 유혹에 직면한 채 살고 있습니다. 소비사회는 우리에게 멋진 상품들을 보여주며 ‘구매하라’고 명령합니다. 그것이 명령인 것은 거역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보에티우스는 욕망을 ‘장밋빛 쇠사슬’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름답지만 우리를 구속하여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것이라는 뜻일 겁니다. 

• 주님 오실 길을 닦는 사람들

그래서인가요, 우리는 다들 조금씩 지친 채 살아갑니다. 만물의 피곤함을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거리를 걷는 이들의 모습이 측은해 보입니다. 이때 우리는 한 소리를 듣습니다. 

“너희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1)
“예루살렘 주민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일러주어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죄에 대한 형벌도 다 받고, 지은 죄에 비하여 갑절의 벌을 주님에게서 받았다고 외쳐라.”(2)

길고 긴 바벨론 포로 생활에 지칠 대로 지친 백성들에게 들려온 소리입니다. 더 이상 희망조차 노래할 수 없는 절망의 심연을 뚫고 들려오는 소리입니다. 마음에 이는 찬바람 때문에 몸을 옹송그리고 있는 이들을 감싸주는 솜이불 같은 소리입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 같은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새 힘을 얻게 하고, 꺼져가는 심지처럼 가물거리는 백성들의 마음에 하늘 기름을 부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위로는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아는 데서 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심을 아는 데서 옵니다. 하나님을 망각하고 살던 삶에서 돌이키는 순간 말할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이 우리 속에 유입됩니다. 세상의 어떤 달콤한 말보다도 더 깊은 위로입니다. 

하지만 위로 받는 데만 머물면 안 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는 유난히 ‘외치다’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 단어는 ‘큰 소리로 부르짖다’는 뜻과 아울러 ‘울다’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소리’는 지금 절박한 심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외치는 말은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지당한 말씀 혹은 좋은 말씀이 아닙니다. 반드시 수행되어야 할 말씀입니다. 그 소리가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광야에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실 큰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라.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니,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함께 볼 것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것이다.”(3-5) 

광야 혹은 사막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유를 향한 긴 여정 중에 반드시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입니다. 그곳은 메마른 땅이고, 길조차 찾기 어려운 곳입니다. 광야와 사막은 도시 한 복판에도 있습니다. 우리는 몰인정의 광야, 강자 독식의 광야에서 허덕이며 삽니다. 그런데 ‘한 소리’는 지금 절박하게 그 광야에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으라 하십니다.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나이 많은 사람들이 안심하며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방법은 간단하지만 실행하기는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을 만들 책임이 정치인들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산적한 문제를 풀 힘이 우리에게 없다고 말함으로써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외면합니다. 비겁한 도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시작하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배고픔의 문제를 다 풀 수는 없지만,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사람을 먹일 수는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외로운 사람을 감쌀 품은 없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 하나는 안을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앞에 나오는 이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쳤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그는 아주 간명하게 대답합니다.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라.’ ‘세리는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 ‘군인들은 힘으로 강제하여 자기 이득을 취하지 말아라.’ 회개는 변화된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계곡은 사랑과 섬김으로 메우고, 산과 언덕은 정의의 삽으로 낮추고, 거친 길은 돌봄으로 평탄하게 하는 이들을 통해서 주님의 영광이 이 땅에 드러납니다.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면 세상 모든 사람이 함께 그 영광을 찬미하게 됩니다. 

• 모든 육체는 풀

‘한 소리’의 외침은 이제 예언자를 향합니다. 그 소리는 예언자에게 ‘외치라’고 부르짖습니다. “너는 외쳐라.” (cry, cry out). “무엇이라고 외쳐야 합니까?”라고 되묻자, 말씀이 그에게 임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을 뿐이다. 주님께서 그 위에 입김을 부시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그렇다.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6b-8)

저는 이보다 아름다운 시를 알지 못합니다. 이 시가 우리 혼에 각인되어 있다면 우리 삶은 한결 가벼워질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잠시 이 세상에 왔다가 갈 사람들입니다.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예외가 없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사람들도 모두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기쁨이나 행복은 풀 같은 우리들의 시간에 잠시 맺혔다가 시들어버리는 꽃과 같습니다. 피었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사라졌다고 너무 슬퍼할 것도 없습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것을 잡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을 앞당겨 가지려고 무리수를 두어가며 조바심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때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고은 시인의 짧은 시가 생각납니다. “내려갈 때/보았네/올라갈 때/보지 못한/그 꽃”. 이게 답니다. 뭔가를 성취하기 위해 허위단심으로 앞만 보고 오를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천천히 내려오는 길에는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소중한 것을 곁에 두고도 그것이 보물인지 모른 채 삽니다. 성취해야 할 목표가 우리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삶의 목표가 있어야 힘차게 살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목표는 우리를 이끌어가는 힘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목표가 우리를 이끌도록 하는 순간 우리는 ‘지금 여기서’ 누려야 할 은총을 발견하지 못하게 됩니다.

‘한 소리’가 절박하게 외치라 하신 것은 인간의 유한함입니다. 뒤플레시스 모르네(Duplessis Mornay)는 아주 흥미로운 말을 했습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복을 누리려거든 사는 법을 배워야 하고, 살면서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죽음을 배워야 한다.” 삶과 죽음은 서로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잘 살기 위해서는 삶의 유한성, 곧 죽음과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걸 알지 못해 우리 삶이 비루해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굳게 붙잡으셨기에 죽음을 이기실 수 있었습니다. 죽음을 이기셨기에 그렇게 당당하게 사실 수 있었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인류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 하나님의 현존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9절의 말씀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좋은 소식,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이들이 목소리를 높여 외쳐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여기에 너희의 하나님이 계신다”. 너무나 익숙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이상하게도 경청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바로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자리입니다. 가정, 학교, 교회, 일터, 광장, 골방, 그 어느 곳도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하나님을 일러 ‘없이 계신 하나님’이라 했습니다.

섬마을을 떠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채집하는 강제윤 시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시인은 어느 날 영광군 안마도 신기마을에 사는 84세의 할머니를 뵙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외로워서 어떻게 견디시냐고 물었더니 할머니는 교인들이 더러 찾아와 벗이 되어주어 고맙다면서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교회 다니라 하면 나가 그라요. ‘하나님 아부지가 누구는 차별하겄소. 교회 다니나 안 다니나 아부지 자식이제. 

어떤 자식은 자식 아니요.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다 같이 짠한 자식이제. 교회 안 댕긴다고 자식이 아니겄소. 바람만 불어도 아부지 살려주시오, 그리고 사는 세상 아니요.’ 그라요 내가.”(한겨레신문, 2010년 8월 4일 자) 참 가슴 뭉클한 이야기입니다. 바람만 불어도 ‘아부지 살려주시오’, 이게 착하고 어진 백성들의 마음이지요. 할머니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모두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아니 계신 데 없이 계신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주님의 돌봄만을 구하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주님이 맡기신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가 거룩한 땅임을 잊지 마십시오. 탐욕과 이기심에 물들어 있고, 갈등과 폭력이 끊이지 않는 이곳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야 할 자리이고, 하나님과 더불어 아름다운 역사의 꿈을 꾸어야 하는 자리입니다. 불의한 자들을 측은히 여기십시오. 이제 더 이상 미워하거나 증오하지 마십시오. 다만 그들이 인간다움을 되찾도록 도우십시오. 진리의 선한 싸움을 쉬지 마십시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홀로는 그 일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의 연대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신 것도, 사도들이 사람들을 부른 것도 모두 그분의 일을 함께 행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입버릇처럼 하는 말입니다만, 주님은 지금 당신의 손과 발이 되어줄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성육신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2000년 전에 마리아의 몸을 빌어 오셨지만, 지금은 우리의 몸을 빌어 오고 계십니다.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들을 팔로 모으시고, 품에 안으시며, 젖을 먹이는 어미 양처럼 조심스럽게 이끄시는 주님은 당신의 일에 동참할 이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 부름에 응답할 때 우리 삶은 든든해질 것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주님의 몸이 되어 드리는 기쁨을 만끽하며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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