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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눅 1:4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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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눅 1:46-56)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자였다. 그런데 요셉과 정혼한 후 천사의 고지를 듣는다. 눅1: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런데 마리아는 찬양한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이라고 노래한다. 어찌된 일인가? 

마리아는 그 말씀 앞에서 분명 불가론을 말했다. 눅1:34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추측해 보건대 눅1:30에서 두려움도 있었다. 어찌 이름까지도 제시하시는가? 남편과 동의 없이 이름을 어찌 작명할 수 있는가? 게다가 정혼한 요셉은 나의 잉태 이야기를 듣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보면 마리아가 천사의 고지를 받았을 때 염려, 걱정, 두려움, 불안 밖에 없었을 것 같다. 동정녀가 잉태되었을 때 율법과 사회 규범은 무엇이라 공격할 것인가? 

추측해보노라면 이 문제는 우리의 신앙 생활로 건너온다. 내가 기도하다가 ‘용서해라. 사랑해아. 내려놓으라.’ 이런 마음을 하나님이 주시기만해도 정말 힘이 든다. 너무도 괴롭고 마음이 아프다. ‘내려놓으면 난 뭐냐? 바보라고 할 것이 아닌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은 결국 기도마저 하기가 어렵다. 이런 나의 모습, 우리의 모습을 알기에 불신앙의 눈으로 마리아를 볼 때 심연 속에 허우적거려야 마땅하지만 마리아는 찬양한다. 놀라운 일이다. 상상 불허의 일이다. 그러면 성서 속에서 찾아보는 마리아의 찬양의 이유는 무엇인가?  

1. 신령한 체험 때문이다. (눅1:26~28)

신앙은 어떤 면에서 체험이다. 체험을 가진 자는 흔들리지 않는다. 마리아는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려 천사의 전해주는 말씀을 들었다. 눅1:26~28을 보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천사 가브리엘은 처녀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하고 잉태 사건을 고지해준다. 여기서 마리아는 실감나게 천사 가브리엘과 대면하였다. 마리아는 천사의 음성을 듣고 또 천사에게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였다. 천사와의 대화는 눅1:38까지 이어져가고 천사의 메시지에 대한 반박을 버린다. 

마리아의 체험은 분명했다. 사실 천사를 보지 못한 자가 천사를 본 체험을 어찌 이해할 것인가? 또 천사의 음성을 듣지 못한 자가 어찌 천사의 메시지라고 한들 수용하겠는가? 환각, 공상, 허구,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천사가 전하는 수태 고지의 이야기지만 아기 예수의 출생과 함께 주시는 다윗의 왕권, 무궁한 나라에 대한 약속은 마리아에게 의심이 되지 않았다. 마리아는 그 특별한 체험을 통해 들려진 음성을 수용한다. 다른 말로 체험은 영적인 순간에의 돌입이다. 누구나 영적인 돌입의 순간이라는 확실한 체험이 있으면 과학과 이성을 뛰어넘어 신앙 생활을 한다. 

체험은 관념이나 ‘그럴 것이다’가 아니다. 오감에 새기는 분명한 확증이다. 이은희 목사가 은혜를 받고 나서 사역을 하러 가는데 한 번은 오토바이가 과속을 하며 차를 추월하였다. 그런데 이은희 목사가 저 사람 뒤에 죽음의 사자가 보인다고 하였다. 얼마 후 그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사람은 언덕 길에서 사고가 나서 즉사하였다. 특별한 체험을 가진 자는 특별한 메시지를 갖게 되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이해한다. 마찬가지로 체험이 있는 자는 찬양할 수 없는 것을 찬양의 주제로 삼는다.
  

2. 요동하지 않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눅1:38)

마리아는 들려준 천사의 음성을 받아들인다. 남자 없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능력으로 잉태된다는 것, 그리고 그 일 때문에 부수적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받아들인다. 눅1:38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한다. 마리아는 말씀의 성취, 말씀의 창조성을 믿는다. 아기를 잉태하는 것이 손가락질 당할 일이 아니라 은혜 받을 일이며 크게 기뻐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알려주시는 것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지 다른 방도가 없는 사람처럼 믿는다. 믿음이 있기에 마리아는 찬양하는 여인이 되었다. 

믿음은 사람을 위대하게 만든다. 사람이 위대해서 위대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능력이 있어서 유능한 것도 아니다. 사람이 잘 생겨서 쓰임받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 믿음이 있을 때 그 사람이 위대하게 되고 쓰임 받는 일꾼이 되며 감동을 주는 성도가 되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다.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다. 메시아의 어머니를 세우시는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마리아는 찬양의 입을 연 것이다.
  

3. 지지와 확인 때문이다. (눅1:39~45)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집으로 향한다. 가브리엘 천사가 아기를 잉태하게 된 제사장의 집을 믿음의 역사로 증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신앙적 사건이 비슷한 엘리사벳을 만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보자마자 성령이 충만하여 큰소리로 외친다. 마리아를 복 받는 여인이라고 축복하고 눅1:43에 “내 주의 어머니”라고 하였다. 성령으로 잉태되는 마리아를 향해 눅1:44에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라고 하였다. 

마리아에게 들려주는 엘리사벳의 선언은 지지와 확인의 현장이 되었다. 마리아의 몸 안에서 뛰노는 아기 예수에 대해 엘리사벳의 외침은 말씀대로 이루어짐을 확인해주는 감동의 순간이었다. 두려움이 마리아를 사로잡을 수 없고 걱정과 염려가 사로잡을 수 없다. 엘리사벳의 산 증거, 그리고 그 입술에서 나오는 지지와 확인을 위한 성령의 역사였다. 공감과 위로의 역사, 확신의 역사 앞에 내 주를 향한 찬양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마리아는 불행한 여인이 아니다. 찬양할 이유가 있는 여인이다.
  
그러면 마리아의 찬양의 내용을 보자.

첫째, 마리아는 비천한 여인을 돌아보아 주셨다고 한다. (눅1:48)

아기를 잉태하게 되고 출산하게 된 사건이 하나님의 돌봄이라고 찬양한다. 믿음으로 서면 말씀 때문에 오해를 받고 소외를 당하는 일들이 한탄스럽지 않다. 나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감사하고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하나님의 돌아보심이다. 

우리의 일년을 돌아보면 말씀 때문에 손가락질을 받았던 것, 신앙 때문에 손해본 것, 실패하고 힘들었던 것들을 믿음으로 보라. 원망하고 불평만 하던 그 일이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비천하기 짝이 없는 나를 돌아보아주신 일이다. 나를 안으시고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고 꽉 막혀 있는 그 사면초가 가운데서 하나님이 숨 쉬고 살 수 있도록 보호하셨다. 믿음의 눈을 열어 보라. 교통사고 난 것, 사람에게 상처를 받은 것, 정상에서 미끄러진 것 등 믿음의 눈으로 보라. 하나님이 돌보신 일이다.  

둘째, 비천한 여인에게 큰일을 행하셨다고 한다. (눅1:49)

정혼한 요셉은 목수의 아들로서 가난한 노동자다. 그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 역시 가난한 여인이다. 예수를 낳았을 때 할례를 행하러 비둘기 한 쌍을 들고 간 요셉과 마리아는 평범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 마리아를 하나님이 아기 예수를 보내시는 도구로 사용하셨다. 성령으로 잉태되는 사건은 인류 역사의 최초 사건이다. 흙으로 아담을 지으시고 사람의 후손을 번성시킨 하나님께서 전에도 후에도 없는 방법으로 잉태케 하셨다. 자기 아들을 보내시는 성령의 방법, 어찌 큰일 행하심이 아닌가? 내가 누구이든지 간에 나를 통해, 내 몸을 통해 성령으로 예수가 잉태되고 출산된다면 이런 큰일이 더 어디 있을까? 내가 예수를 출산하지 못해도 나의 삶으로 인해 예수를 믿어보려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나온다면 이런 기쁜 일이 어디 있고 이런 사건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예수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세상에 출산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비천한 여인에게 큰일을 행하신 것이다. 찬양이 나올 수 밖에 없는 큰일이다.   

셋째, 비천한 여인을 높여주셨다고 한다. (눅1:52)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복이 있다. 은혜 받은 여자”라고 하였다. 엘리사벳 친족은 마리아에게 “네가 복이 있다. 맡은 여자 복이 있다.”고 하였다. 눅1;43은 “주의 어머니”라고 까지 하였으니 이런 복이 어디 있는가? 예수의 어머니가 되는 복, 이는 유일무이한 복이다. 비천한 여인을 높였어도 가장 높은 곳으로 높여주신 복이다. 마리아는 주의 어머니, 영원토록 주의 어머니로 불리워진다. 말씀을 빋고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인 마리아는 비천한 마리아가 아니라 존귀하고 거룩하며 고상한 마리아로 높아졌다. 가톨릭에서는 성모 마리아라 하고 성모께 빌면 주의 모친이 되시기에 기도의 응답이 빠르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마리아를 숭배하지는 않아도 존경해야 한다. 이런 복있는 여인이 어디 있겠는가? 마리아는 더 이상 비천하지 않다. 성경을 볼 때마다 존경스럽고 흠모할만한 분이시다. 주의 어머니의 복을 믿는 마리아의 입에서 어찌 찬양이 나오지 않겠는가? 

우리들 자신을 보자. 비천하기 짝이 없다. 문벌도 좋지 않다. 지혜롭지도 못하다. 죄만 가득해서 고개를 들 수도 없다. 그러나 마리아를 돌보시는 하나님, 마리아를 통해 큰일을 행하신 하나님, 마리아를 높여주시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다. 아무리 내가 비천하고 가장 낮은 곳에 처하여 있더라도 하나님은 그런 나를 부르셨다. 하나님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여러 가지 계시로 부르심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에 대한 믿음으로 서면 우리는 찬양한 일이 보인다. 비천한 내가 아니라 이 땅에서 가장 복을 받은 사람임이 보인다. 나를 돌보시고 큰일 행하신 하나님이 보인다.   

마리아의 찬양이 성탄절에 나의 찬양이 되게 하라. 마리아의 찬양의 이유와 그 찬양의 내용이 나의 간증이 되게 하라.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그 찬양의 즐거움 때문에 이웃을 격려하고 섬기며 구원의 이름 예수를 전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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