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고난 가운데 얻어진 승리 (살전 1:2-10)

첨부 1


고난 가운데 얻어진 승리 (살전 1:2-10)


요즘 신문을 읽거나 TV의 뉴스 보도를 들으면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한번 이 세상을 확 뒤집어 놓을 수 없을까?' 잘못 들으면 오해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한데, 좀더 신앙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좀더 선하고, 좀더 정직하고, 좀더 정의로운 사회로 바꿀 수 없을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현실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기를 사모한다면 아마 한두 번씩은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거짓됩니까? 얼마나 음란합니까? 얼마나 사치스럽습니까? 얼마나 잔인합니까? 얼마나 포악합니까? 얼마나 불법이 난무하고 있습니까? 이런 현실을 보면 누구든지 '이 세상 좀 바꾸어 놓을 수 없을까?' 하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고민과 함께 떠오르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코드가 무엇인가? 기독교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는가? 교회가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저는 목회를 하면서 한번도 오직 교회만이, 복음만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사실을 의심해본 일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보면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재차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무슨 말입니까? 데살로니가 지역에 있는 이제 개척한지 얼마 안 되는 성도들이 신앙의 태가도 너무무 아름답습니다. 말씀을 받을 때 기쁨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붙잡고 삶에 적용을 하면서 삽니다. 그러다 보니 삶에 능력과 은혜가 일어난 것입니다. 얼마나 멋지게 살았으면, 그 교회 때문에 온 지역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의 소개되는 데살로니가 교회는 평범한 가운데 세워진 교회가 아닙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의 한복판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에는 환난이나 고난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자주 등장합니다. 1:6에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 많은 환난 속에 있었다. 2:2에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2:14에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3:7에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이 교회를 이해하려면 사도행전 17장을 보아야 합니다. 이 교회는 바울과 실라가 2차 전도여행 때 세운 교회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한 것은 겨우 3주 정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개척한 이 교회는 마치 광야 길을 가던 한 만삭이 된 여인이 아이를 길에서 낳았는데 갑자기 들이 닦친 강도 떼을 피하려다 아이를 광야에 나두고 도망친 그런 상황과 같았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복음을 전한 후 3주 만에 세운 교회를 나두고 도망치듯 빠져 나왔습니다. 과연 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정말 고난을 딛고 일어설수 있었겠는가? 이런 저런 생각이 왜 없었겠습니까? 무엇보다 그곳 소식을 듣기 원하지 않았겠습니까? 마침 디모데가 교회의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은 참으로 놀라왔습니다. 유럽 지역에 믿음의 소문이 퍼졌습니다. 믿는 자들의 본이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짧은 시간 안에 이렇게 좋은 믿음의 소문이 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읽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비록 고난의 현장에서 복음을 받았지만, 이 복음은 그들의 삶을 다 바꾸어 놓았습니다. 바울은 떠났지만, 그들 속에 담겨있는 진리의 말씀은 믿음의 역사로, 사랑의 수고로, 소망의 인내로 나타나면서, 그 당시 세속화로 찌든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 묻습니다. 고난의 한 복판에서도 어떻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삶의 주인이 바꾸어졌는데 어떻게 인생이 바꾸어지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만일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도 삶의 변화가 없다면 우리는 회심의 진정성을 의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회심은 우리의 인생관과 세계관의 변화를 초래할 것입니다. 주인이 바뀌었는데 어떻게 옛날 방법, 옛날 모습 그대로 삶의 스타일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회심이 한 순간 사람을 성자로 만드는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전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의미 있는 변화의 시작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지난번에 책방에서 책 한권을 샀습니다. 거기엔 엄청난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진주처럼 빛나는 한 여인의 승리의 삶이 담겨 있었습니다. 유명 교수의 부모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죽도록 사랑한 사람과 결혼해서 미국에 갔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낳고 결국은 이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남편이 바로 전문공부 장관을 지낸 김한길 씨입니다. 다시 재혼을 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자폐아였습니다. 학교에서 받아주지 않아 5번씩이나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학교에 가서 사랑을 받으니 1년여 만에 회복됐습니다. 갑자기 암이 찾아왔습니다. 투병을 하면서도 오직 믿음으로 이겨냈습니다. 그것으로 그 인생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변호사로 일하던 그녀에게 갑자기 망막분리로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시 볼 수 없다는 절망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토록 신의 존재를 거부했던 아버지가 예수님을 만나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딸 민아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만 있게 해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이어령의 책 '지성에서 영성으로' 중에서)  그가 바로 이어령 초대 문공부 장관입니다. 그런데 또 다시 더 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4년 전 미국의 명문 버클리 대학에 다니던 아들이 갑자기 25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시련은 일상이었습니다. 결혼 후 30여 년 동안 웃은 날보다 가슴치며 우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말합니다. “모든 시련과 고난이 내게는 축복이었다.” 어떻게 그런 가혹한 인생을 모질게 산 그녀가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아들을 떠난 보낸 후 그녀는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미국, 아프리카, 남미, 중국 등지를 돌면서 마약과 술에 빠진 청소년들을 보살피고 있습니다. 그녀가 쓴 간증집의 제목이 <땅 끝의 아이들>입니다. 

시련을 터널을 통과하면서 직접 보고 듣고 겪은 사랑의 기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품의 자녀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신음하고 있는 모든 자녀들이 바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땅 끝의 자녀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저는 이 책을 보면서 한 여인의 위대한 신앙의 승리를 보았습니다. 그 혹독한 시련을 이기고, 봄에 피어나는 인동초처럼 우뚝 일어서는 이민아 목사의 모습에서 천하무적의 용기와 사랑의 힘을 느꼈습니다. 무엇이 이 약한 여인을 그토록 위대한 사랑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꾸었을까요?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가혹하리만큼 큰 아픔과 시련이었습니다. 

그 시련을 믿음으로 극복하면서 그 속에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아픔보다 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것이죠. 그래서 모든 시련과 고난이 내게는 축복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도 크고 작은 아픔과 시련은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그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천하무적의 신앙은 바로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두려움 없는 승리의 삶은 바로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캄캄한 밤에 앞을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별이 반짝거립니다. 밤이 어두울수록 별빛은 더욱 선명합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먹구름 속에도 여전히 태양은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내일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고난 자체를 보지 마시고, 그 속에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숨결을 느껴보십시오. 그 고난을 통해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바라보십시오. 

오늘 우리는 세상의 어수선함을 탓할 것만이 아니라 이제 여러분과 저도 한해의 끝자락에서 지난날에 일어났던 모든 것을 오히려 감사함으로 받고 다시한번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니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신 그 은혜 앞에 지금의 나의 환경이 어떤 자리에 있을찌라도 정말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섰다면 우리 역시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복음들고 세상의 변화를 위해 헌신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모인 여러분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자들이 아닙니까? 양승훈 교수가 쓴 <물에 빠져 죽은 오리>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겉표지가 인상적입니다. 오리 한 마리가 스킨 스쿠버의 장비를 착용하고 서 있습니다. 호스가 달린 물안경을 쓰고, 몸에는 구명조끼를 걸치고 있습니다. 손에는 튜브를 들고 있고, 발에는 큰 물갈퀴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그 책의 내용 가운데 소개된 이야기입니다. 자동차 서비스 회사에 근무하던 분이 서울 본사에서 근무하다가 일산에 있는 회사의 부품 창고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지방이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일종의 좌천인 셈이라 마음이 울적했습니다. 

게다가 복잡한 서울 본사와는 달리 일산에 있는 창고는 분위기가 썰렁했습니다. 그래서 기분도 달랠 겸 창고 옆에 오리를 키울 수 있는 작은 사육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리를 키우는 양계장에서 청둥오리 한 마리를 사서 물에 넣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제일 먼저 오리가 있는 사육장에 가보니 물통 속에서 오리가 물에 빠져 죽어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 오리를 이리 저리 뒤척여 보았지만 짐승에게 물린 흔적이 없었습니다. 수영이 “전문”인 오리가 물속에 빠져죽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사올 때부터 비실비실하던 오리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오리를 산 양계장에 가서 하루도 안 된 오리가 죽은 이유를 따졌습니다. 그런데 자초지종을 들은 양계장 주인은 그것도 몰랐느냐는 듯이 말합니다. “이 오리는 양계장에서 부화하고 키운 오리입니다. 그러므로 수영을 할 줄 모릅니다. 게다가 이 오리는 어릴 때부터 물속에 집어넣지 않았기 때문에 깃털에 기름이 분비되지 않아서 물에 잘 뜨지도 못합니다.” 

원래 오리는 날개 밑에 방수기름이 나오는 샘이 있습니다. 오리는 수시로 그 샘에서 나오는 기름을 자기 날개와 털에다 열심히 바릅니다. 그래서 오리가 물속에 들어가도 털이 물을 흡수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게 물위를 떠다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물에 빠져 죽은 그 오리는 너무 편안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물속이 아닌 땅 위에서 주인이 던져주는 사료를 먹고 자랐습니다. 자기 몸에서 나오는 방수기름을 바를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느덧 그 오리는 자기 자신이 물속에 사는 존재라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다보니 방수기름을 바를 줄 몰랐습니다. 수영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물에 뜨지도 못하고, 수영도 할 줄 모르는 불쌍한 오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에 빠져 죽은 오리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어쩌면 그 오리가 우리 자신의 모습이요 우리 교회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겉모습은 오리임에도 실제로는 수영은 커녕 물위에 뜰 수도 없는 오리처럼, 겉모습은 그리스도인인데도 실제로는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매 주일 교회에 나와 예배도 드립니다. 성경에 대해서도 많이 공부했습니다. 여러 가지 직분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화려한 건물과 훌륭한 조명, 음향시설, 그리고 넓은 주차공간을 자랑하지만 물위에 뜰 수도 없는 오리처럼 세상에 영향력을 발휘하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에 손가락질 당하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2011년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달을 맞이했습니다. 들려오는 세상의 소식들이 혼란스럽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그리스도인들까지 원망하고 불평한다고 해서 변화가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으로 무장하고 도도히 흘러가는 세속의 물결 속에서 거룩한 모습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의 촉매가 되어야 합니다.  오리가 스킨 스쿠버처럼 장비를 착용해야 물속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죽은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이 무서워서 문제 뒤로 숨어버리거나 세상의 방법으로 똑같이 무장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불과 몇개월 되지 않았지만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이 신앙으로 무장하고 이 신앙을 전파하며 승리하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가 보여준 이 놀라운 믿음, 짧은 기간에 이런 놀라운 믿음을 소유할수 있었던 것은 견고한 기초 때문입니다. 복음의 기초가 제대로 들어갔습니다. 기초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아무리 오래해도 성장, 성숙이 없고 힘과 능력도 없습니다.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닐지라도 기초가 없으면 작은 유혹과 고난에도 쉽게 쓰러집니다. 숫자는 능력이 아닙니다. 오래 믿은 세월이 능력이 아닙니다. 복음이 능력입니다. 

복음의 기초위에 신앙이 세워질 때 세상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초가 튼튼하면 홍수도 이겨내고 폭설도 이겨내고 지진도 이겨냅니다. 화려한 것 같지만 환란이 오면 흔들리고 무너지는 것은 기초가 부실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전반 분야의 기초와 기본이 돼 있지 않기에 결정적인 분야에서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복음의 기초를 데살로니가교회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발목을 움켜잡고 하나님 앞에 더 나가지 못하게 하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히브리서 6장1,2절에서는 회개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영원한 심판에 대한 교훈은 그리스도 도의 초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 신앙의 기초를 점검해 보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회개와 신앙과 영원한 심판에 대한 분명한 믿음위에 내 신앙이 서 있는지를 살펴 봐야 할 것입니다. 이 기초위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며 좋은 소문을 가진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이 때 모든 교회의 본이 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신앙이 나의 신앙이 되야 할 것입니다.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과 기도로 세상을 섬기는 교회란 표어를 붙잡고, 우리 모두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어제는 실로암 대학과 실버대학 종강을 했습니다. 20여명의 사람을 세웠습니다. 

교회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세우고 세워진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 앞에 세워져서 복음을 세상에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 경제 한파 때문에 이 추위와 함께 떨고 있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가난을 벗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번 성탄절은 이웃을 돌아보는 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이 영광스러운 현장을 가장 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신 섬김과 나눔의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도 연약하기 때문에 나만 생각하고 나의 일에 몰두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구유에 누이신 일을 생각하며, 나의 메마름 때문에, 나의 무정함 때문에 버려지는 사람은 없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한해의 끝자리에 서서 정말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그 엄청난 사랑과 그 큰 은혜 앞에 어떤 삶의 발자국을 남겼습니까? 믿음의 역사가 있었습니까? 사랑의 수고가 있었나요? 아니면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살아 오셨습니까? 만약 이런 영적 삶이 내 속에 일어났다면 여러분 한 사람을 통해 세상은 좀 더 희망이 넘쳐 날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곳은 절망이 서려 있는 현장이었지만, 그곳을 희망으로 바꾼 것처럼 우리 교회가 다시 한번 세상에 희망을 주는 향기를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이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