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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둘 사이에 끼어있는 삶 (빌 1: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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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사이에 끼어있는 삶 (빌 1:22-30)
  

들어가는 말

인간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본능이 두 가지 있다고 합니다. 
그 하나는 살고 싶은 본능이요, 또 다른 하나는 죽고 싶은 본능이라고 합니다. 
‘살고 싶은 본능’이라는 말은 이해하겠는데, ‘죽고 싶은 본능이라는 게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옛것을 동경하는 마음, 다 내려놓고 쉬고 싶은 마음, 이런 것들이 다 죽고 싶은 본능에 해당한다는 거지요.

그 다음으로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생래적으로 걱정을 안고 산다는 것입니다. 
걱정에는 종류가 많을 것 같지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딱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에 대한 걱정이요, 또 다른 하나는 죽음 후에 죄로 말미암아 갈 것 같은 지옥에 대한 걱정입니다. 

심리학이 밝히고 있듯이 ‘죄가 나를 지옥으로 이끌고 간다.’는 내면의 직감이 사람을 두렵게 한다는 거지요. 
영국의 회의론자 토마스 홉즈는 그의 일생을 마감하는 순간에 이렇게 탄식했답니다. “아, 하루만이라도 더 살고 싶다. 나는 내 앞에 다가오고 있는 저 세상이 무섭다. 나는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깊은 심연으로 빠져드는 것 같다.”

그렇다면 과연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결혼했다고 행복합니까? 
돈이 많다고 행복합니까? 
세상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면 행복합니까? 
아닙니다.
행복과 직결되는 죽음과 지옥의 문제를 해결해야 비로소 행복을 논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해결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목적도 이것 때문입니다. 
마음속 맨 밑바닥에 깔린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습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에게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당신이 만일 내일 밤 12시에 죽는다고 한다면 오늘 무슨 준비를 하겠습니까?” 
이것은 우리 스스로에게도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웨슬리는 대답했습니다. 
“글쎄, 따로 무슨 준비가 필요할까요? 날마다 준비하고 있는데 새삼 무엇을 준비하겠습니까? 평상시 같이 사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밤 12시에 죽는다면 그 이튿날 새벽에는 천국에서 눈을 뜨게 되겠지요.” 
내일 죽든 오늘 죽든 별다른 준비를 할 것이 없는 사람, 그가 바로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봅시다.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죽음의 문제는 현실적인 문제였습니다. 
바울은 내일 아침 떠오르는 태양을 보기도 전에 사형집행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내일 아침 동트기 전에 누군가가 뚜벅뚜벅 그에게 다가와 “어디 좀 갑시다.”하면 그 길은 마지막 길이었습니다. 
그 자신의 생명은 이미 자기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왜 죽음을 생각해보지 않았겠습니까? 

본문 1:23절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여기서 ‘둘 사이’란 삶과 죽음 사이를 말합니다. 
바울은 죽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위암수술 받은 분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루에도 여러 사람이 죽음을 선고 받습니다. 2시간 수술하는데 그 전에 오면 가능성이 없고.......” 
그냥 닫아놓는다는 말이지요.
어디 위암이란 질병에 걸린 사람에게만 죽음이 심각하겠습니까?
모든 인간에게 삶과 죽음은 시계추처럼 순간순간 오고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이지 죽음은 누구에게나 실존적인 문제입니다.

1. ‘차라리 죽고 싶습니다.’

23절 “......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여기서 ‘떠나서’란 말은 헬라어로 ‘아날뤼사이’로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가 천막을 걷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해변에 가서 텐트를 치고 놀다가 휴가가 끝나면 천막을 걷어서 차에 실은 다음 집으로 옵니다. 
천막을 걷는다는 것은 끝났다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집으로 간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로 닻을 감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배가 항구에 정박할 때에는 닻을 내립니다. 
닻을 내리고 있다가 떠날 때가 되면 닻을 끌어올립니다. 
이 닻을 끌어올린다는 것은 그 다음 목적지로 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이해하는 죽음입니다.
죽음은 영원한 집을 향해 이 땅의 삶을 걷고 출발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빨리 떠나 하늘나라에 가서 주님과 함께 살면 좋겠다는 욕망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죽음을 멀리하려고 하는데, 아니 죽음을 생각조차 하기 싫어하는데 바울은 ‘죽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자포자기로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바울의 열망입니다.
유명한 어거스틴이 어느 날 밤 꿈에 사랑하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어거스틴에게 말했습니다. 
“나의 아들아, 너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어거스틴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을 원합니다. 주님 자신만을 원합니다.”
어거스틴은 바울을 닮았습니다. 
이렇게 담담하게 고백하는 신앙의 선배들이 부럽습니다.
우리 모두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너희에게 유익이 된다면 더 살아야 하겠지요!’

24절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 세상에 사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25절)
자신을 위함이 아닙니다.
'이제 돈을 벌기 시작했는데 돈을 좀 더 벌어야한다.'거나, '이제 겨우 한숨돌렸는데 좀 더 행복하게 살다 죽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멋있잖아요? 
세상에는 이와 반대로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믿음이 황폐해집니다. 
그 사람 때문에 근심하게 됩니다. 
그 사람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분위기가 싸늘해집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교회에, 이웃에게, 가족에게 유익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잘 생각해봐야할 질문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은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오직 유일한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께 유익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유익이 된다면 죽은 것도 사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23-24절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이런 엄청나고 놀라운 사실을 선포하면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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