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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기대를 가져라(1) (빌 1: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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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를 가져라(1) (빌 1:19-21) 
 
 
집이나 사무실이나 사람이 머무는 곳에는 어김없이 달력들이 걸려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걸려 있는 달력을 보면서 짜임새 있는 생활을 하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성도들과 교회는 교회력을 보고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력은 경건한 신앙생활을 위해서 성도들과 주님의 교회가 지켜야 할 절기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지내고 있는 절기가 바로 교회력으로는 대강절이고 오늘 주일은 대강절 두번째 주일에 해당합니다. 

대강절은 성탄절 전의 4주간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기다리고 준비하며 성탄을 축하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신앙인 자신에게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자신을 가다듬는 절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도록 준비하는 기간을 대강절이라고 합니다.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님은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정신차리고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제 여러분은 잠에서 깰 때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도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악한 생활을 버리고 믿음으로 빛된 생활을 하십시오"(로마서 13:11-12)라고 했습니다.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무기력하게 정신을 놓고 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다시 오시리라는 것에 대한 기쁨에 넘치는 기대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과 생활에는 활력이 넘치는 것입니다.

이처럼 대강절 절기는 어떻든 기대와 소망으로 기다리는 기다림의 절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어느 누구도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세상에서 부정적이거나 절망적이지 않고 희망적인 자세로 살아가려면 인간은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대하는 것은 반드시 소망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울의 기대와 소망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바울사도의 기대와 소망은 그냥 기대와 소망이 아닌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었습니다.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간절함이 있는 기대와 소망이 역사하는 힘이 많은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기대를 가져라"는 대 주제 아래서 "자신에게 기대를 가져라"는 소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20~21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사도가 자신에게 이루어졌으면 좋을 만한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서른에서 멈추는 여자, 서른부터 성장하는 여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리카와 마유미>저서인데 여성을 위한 성공학이라고 할 수 있는 책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는 모두 출발은 비슷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예전에 내 뒤에 있던 사람이 더 앞서 있기도 하고, 자신만만하게 내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잘못 들어선 것 같은 의심이 든다. 어떤 이들은 계속 성장하지만, 어떤 이들은 빨리 성장을 멈추고, 지금 수준에 만족하고 만다. 특히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일찍 사회에 진출하지만 길게 성공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말하면서 여성의 나이 서른이 그 전환점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젊은 나이에 성장하기를 멈추고 맙니다. 
바울사도는 최정점에 도달해있었지만 결코 자만하거나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서신인 빌 3:12~14절 말씀에 보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기대가 멈추면 다 멈추는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이라고도 합니다. 바울사도가 옥중에 있으면서 쓴 서신이지요.
바울의 상황이 결코 좋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려를 버려야 합니다. 염려와 근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 사람의 관심과 그 사람의 기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첫번째로 바울의 간절한 기대는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게 사는 자 "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20절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기대와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끄러운 일을 하고 부끄러운 삶을 살더라도 이루고 싶어하는 그런 기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명예욕이나 물욕이나 감투욕이나 음욕에 빠져서 서슴없이 온갖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부끄럽지 않게 살려는 몸부림과 기대가 간절해야 합니다. 그래야 부끄러움을 가져는 것들을 멀리하게 되고 버리게 됩니다. 

두번째 바울의 간절한 기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를 위하여 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의 기대는 자신의 모든 생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높아지고, 그분이 영광을 받는 것이었고, 그것만이 바울의 유일한 관심사였고, 삶의 목표였습니다. 이는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기대입니까?

구두 수선일을 하는 한 가난하고 초췌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비관하며 꿈과 소망없이 살아가던 어느날 놀라운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고 처음과 나중되신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인생을 비관적으로 살아가며 끝내 좌절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그에게 수퍼스타 지저스 크라이스트는 놀라운 희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후 그 소년은 놀라웁게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후 그는 꿈꾸는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소년은 비록 구두수선을 하는 보잘것 없는 인물이었지만 꿈의 사람이 된 후 구두수선가게 앞에다 세계 지도와 놀라운 꿈을 표현한 세가지 표어를 적어놓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1. Great Vision(큰 꿈을 가져라)
2. Great Pray(크게 기도하라)
3. Great Expect(큰 기대를 가져라)

많은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습니다. 남의 밑에서 콧구멍이 새까맣도록 구두수선이나 하는 사람이 세계지도나 걸어 놓고 엉뚱한 기도나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달랐습니다. 내가 비록 지금은 남의 밑에서 구두나 고치고 있지만 언젠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교사가 되는 꿈을 꾸었던 것입니다. 그는 확실히 꿈꾸는 사람이었고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위의 반대와 결혼한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홀연히 인도선교에 뛰어들었습니다. 초기에는 아무도 후원해 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는 초연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순례자의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 소년이 바로 선교의 아버지 선교의 원조 윌리엄 케리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그는 꿈꾸는 자였고 역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세 번째 바울의 간절한 기대는 "유익한 존재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2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앞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죽게 될지, 아니면 자유스럽게 풀려나게 될 지 아무도 모르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러나 매임도 자유도,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다 유익한 것이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쓸모없는 사람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많아도 막상 일을 시키려면 쓸만한 사람이 심히 적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변화되지 못하고 자기 중심적인 신앙을  가지고 사는 자는 하나님 앞에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는 백해 무익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성령안에서 변화된 사람은 참으로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 25:30절에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유익한 사람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빌레몬의 가정에 있던 노예 오네시모는 무슨 연고였는지 주인을 배신하고 도망쳐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바울 사도를 만나 극적인 개심을 하게 되고 주인의 품속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에 대해서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백해무익한 사람이었으나 예수 안에서 유익한 사람이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당시 노예는 가축이나 동물처럼 부자집 재산으로 취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원로원 한 명이 피살되었을 때 400명의 노예를 죽여버린 사건도 현실적으로 있었습니다.이런 상황속에서 돈을 훔쳐, 주인에게 손해를 입히고 탈주한 노예를,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달라는 바울의 부탁은 그가 이제 나와 네게 유익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라는 노예는 바로 나 자신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사탄의 노예 신분으로 주의 백성과 상관없던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주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탄의 노예가 될 수 없습니다. 주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전에는 무익한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유익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기대로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기대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피흘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충분한 기대를 가질만한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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