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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의 근원 강림하사 3 (신 28: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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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근원 강림하사 3 (신 28:7-14) 
 
 
❚축복을 유치하라

해마다 이맘때쯤 되면 신문에 이런 뉴스가 등장합니다. ‘올해의 10대 뉴스.’ 이런 제목으로 세계 10대 뉴스와 국내 10대 뉴스가 늘 선정되지요. 과연 올해 2011년에는 어떤 뉴스들이 이 세계 10대 뉴스와 국내 10대 뉴스를 장식하게 될까? 연말이 다가오면서 이런 궁금증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아마 틀림없이 국내 10대 뉴스에 이런 뉴스가 꼭 들어갈 것입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틀림없습니다. 제가 예언합니다. 여러분도 기억나십니까? 1수도 아니고 재수도 아니고 3수 끝에, 10여년 만에 우리는 올해 7월 드디어 동계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는 감격을 누렸습니다. 

이것은 유치에 성공한 강원도나 평창만의 경사가 아니라 우리 온 국민이 기뻐해야 할 큰 경사입니다. 하계올림픽, 동계올림픽, 월드컵,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이 4대 국제 스포츠 대회를 모두 개최한 나라를 이른바 ‘국제 스포츠 대회 그랜드슬램’ 클럽 국가라고 부르는데, 현재 이 클럽에 든 나라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4개국뿐입니다. 그러고 보면 미국 같은 나라도 못 이룬 큰일을 우리가 이룬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비판 어린 시선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스포츠 대회 많이 유치한 게 뭐 그리 대단하냐?” 혹은 “목사님이 스포츠를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거 아냐”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아닙니다. 이 일이 비단 스포츠 대회를 개최하는 문제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4대 국제 스포츠 대회는 그야말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대회고, 이 대회를 유치하기 위해 세계 각국이 얼마나 치열한 유치전을 벌이는 지 여러분도 이번 동계 올림픽 유치를 보면서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세계적인 대회를 아무 나라나 유치하게 허락하겠습니까? 

아주 엄격하고 까다로운 기준으로 심사를 하는데 이 심사에서 합격하여 대회를 유치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나라가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동계올림픽 유치는 하나님이 대한민국에 또 하나의 ‘영광의 복’을 허락하신 것이라 믿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불과 100년 전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로 온갖 수탈과 수모를 당한 민족입니다. 불과 60년 전 우리는 동족간의 끔찍한 전쟁으로 온 국토가 폐허가 되고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상처로 얼룩진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저는 지난 7월 동계 올림픽 유치전에서 한국 대표단의 프레젠테이션을 보면서 참 마음이 뜨거웠습니다. 우리와 경쟁한 나라들이 어떤 나라들입니까? 프랑스와 독일입니다. 그런데 누가 봐도 다른 나라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 높고 감동적인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했고 그것을 설명하는 우리 젊은이들은 왜 그렇게 예쁘고 영어도 잘 하는지, 거기 모인 모든 참석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도 남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 자랑스러웠습니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우리는 세계 최빈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세계 최초로 원조를 받던 나라가 원조를 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단시일에 이처럼 급성장한 나라는 지구상에 없었습니다.

저는 이런 일을 보면서 깨닫습니다. 이 모든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게 웬 은혜요 웬 축복입니까? 우리는 바로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이 나라 대한민국에 허락하신 축복임을 말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번 동계 올림픽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복을 유치(誘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번 올림픽 유치가 어디 공짜로 주어진 것입니까? 세계 모든 나라가 순서대로 돌아가다 우리나라 순서가 그냥 돌아온 것입니까? 아닙니다. 치열한 노력과 준비로 유치한 것입니다. 프랑스와 독일 같은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따낸 엄청난 복입니다. 그러니 복은 공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은 올림픽처럼 적극적으로 유치하는 것입니다. 그 복을 간절히 사모하고 원하는 사람이 얻어내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복, 하나님의 복을 내 것으로 만드는 성도 되기를 축원합니다. 적극적으로 복을 사모하고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복을 따내고 유치하기 바랍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복을 받을까? 내가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이 복을 내 것으로 유치할까?” 지난 시간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저주 받을 일 하지 말고 반드시 복 받을 일만 해라! 바로 순종, 또 순종입니다. 이 사실을 명심, 명심하시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반드시 따내고 유치하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축복과 저주는 함께 다닌다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지난주에 이어서 “복의 근원 강림하사”라는 제목 세 번째 시간으로 신명기 28장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질문 하나 하고 말씀을 시작합시다. 신구약 성경 66권 전체의 주제가 무엇이하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예수 그리스도’라고도 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의 책’이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는 세상이 주는 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이 주시는 참다운 복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우리가 3주 동안 살펴보고 있는 신명기 28장이야말로 그 분량으로 보나 질적으로 보나 가장 놀랍고도 풍성한 하나님의 복을 담고 있기 때문에 가히 ‘축복의 보고’(寶庫)(본문 12절에 나오는 표현), ‘축복의 보물 창고’라고 할 수 있는 책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까지 우리는 이 ‘축복의 보물 창고’에서 우선 1~6절 말씀을 꺼내어 살펴보았고, 오늘은 계속해서 7~14절 말씀을 꺼내서 얼마나 놀랍고 귀한 축복의 보물을 우리에게 주시는지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7~14절 본문을 살펴보면서 첫 번째로 생각해 볼 문제는 축복과 저주의 관계입니다. 무엇과 무엇의 관계요? 예, 축복과 저주의 관계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보세요. 신명기 28장 전체가 꽤 길어서 68절까지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축복에 관해서는 몇 절까지 나와 있습니까? 14절까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딱 14절까지 끊은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15절부터 마지막 68절까지는 전부 저주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것도 자세히 읽어보면 내용이 정 반대입니다. 15절 말씀을 한 번 같이 읽읍시다. 지난 시간에 말씀 읽으면 꼭 큰 소리로 ‘아멘’ 하기로 하셨지요?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저주 받는다니까 ‘아멘’이 잘 안 나오네요.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할 것”이라며 68절 끝날 때까지 저주 목록(리스트)을 나열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 15절, 어디서 많이 보던 말씀 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지난 두 주간 설교를 잘 들은 분이라면 쉽게 눈치 채셨을 것입니다. 이 15절 말씀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어느 말씀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몇 절일까요? 그렇지요. 바로 1절과 2절입니다. 다시 한 번 1~2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그렇지요? 15절과 정 반대지요? 1~2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청종하고, 순종하고,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뭘 주신다고 했습니까?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하면서 그 다음부터 14절까지 ‘이 모든 복’에 해당되는 축복 리스트를 나열하고 있는데, 15절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정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고, 순종하지 않고,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16절부터 마지막 68절까지 ‘이 모든 저주’에 해당되는 저주 리스트를 나열하고 있는 것이지요. 왜 이렇게 비슷합니까? 아니, 왜 이렇게 정반대입니까? 그 까닭은 이렇습니다. 따라 합시다. “축복과 저주는 항상 함께 다닌다!” 그렇습니다. 축복과 저주는 항상 함께 다닙니다.

오늘 본문인 신명기 28장 바로 앞 27장을 11절부터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거든 ‘그리심’이라고 하는 산에 열두 지파 중 여섯 지파를 세워 축복을 선언하게 하고, ‘에발’이라고 하는 산에 나머지 여섯 지파를 세워 저주를 선언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이때부터 그리심 산은 축복의 산이 되었고, 에발 산은 저주의 산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성지순례를 가면 세겜 성에서 볼 때 남쪽인 왼편에 축복의 산인 그리심 산이 보이고, 북쪽인 오른편에 저주의 산인 에발 산이 보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붙어 있어요. 무슨 뜻일까요? 이렇게 축복의 산인 그리심과 저주의 산 에발처럼 축복과 저주는 항상 함께 다닌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지혜의 책인 <탈무드>에 재미난 우화가 하나 나옵니다. 노아의 홍수 때 모든 동물을 태우고 노아의 방주가 떠나려 하자, ‘선’(善)도 태워달라고 달려왔습니다. 노아가 “이 배에는 한 쌍으로 된 것 외에는 태우지 않기로 했다”고 말하자 ‘선’은 숲으로 돌아가서 자기 짝이 될 만한 것을 찾아보았습니다. 그것은 ‘악’(惡)이었습니다. 그래서 ‘악’을 데리고 배에 올랐습니다. 그때부터 선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악이 따라다닌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로 미루어 볼 때, 아마 노아의 방주에 탈 때 ‘행복’은 ‘불행’과 손을 잡고, ‘희망’은 ‘절망’의 손을 잡고 같이 방주에 올라탔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 때 축복과 저주도 함께 손잡고 방주에 올랐겠지요. 그래서 그런가요? 우리 인생은 항상 이 두 가지가 동행합니다. ‘인생만사 새옹지마’(人生萬事 塞翁之馬)라는 말처럼 행복과 불행도 함께 따라 다니며 때론 행복한 일이 생기고, 좀 행복한가 싶으면 불행한 일도 생깁니다. 일본의 속담에 “사람의 행복, 불행은 관 뚜껑을 덮기 전까지는 모른다”는 말도 있다고 합니다. 언제나 행복하기만 한 사람도 없고, 언제나 불행하기만 한 사람도 없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함께 다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축복과 저주도 함께 다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축복과 저주는 함께 다닌다. 축복과 저주는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다. 그래서 축복과 저주는 단 하나의 똑같은 기준에 의해 판가름 나는 것이다. 그 기준이 무엇인가? 똑같은 하나님 말씀에 대해 우리가 순종하냐 불순종하냐? 여기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하나님 말씀인데 우리가 잘 듣고 순종하고 지키면 엄청난 축복이 주어지고, 같은 하나님 말씀인데 우리가 안 듣고 불순종하면 엄청난 저주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마치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태복음 13장 등)에서 똑같은 말씀의 씨가 뿌려지지만 말씀을 받는 우리 마음 밭의 상태에 따라 그 씨가 싹도 못 피우고 빼앗기기도 하고 때론 100배의 결실을 맺어 그 결과가 전혀 달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진리입니다. 여러분 축복 받기 원하시지요? 저주 받기 원하지 않지요? 그렇다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반드시 잘 듣고 말씀대로 순종하기 바랍니다. 같은 말씀 주시는데 불순종 하는 사람은 축복의 정반대인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무서운 사실입니다. 오직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복이 주어집니다. 그러니 반드시 말씀대로 순종해서 이 모든 복을 받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저주가 더 긴 이유

그런데 신명기 28장을 보노라면 의문이 하나 더 생깁니다. 성경이 축복의 책이라면 복에 대한 말씀이 더 길게 나와야지, 왜 축복에 대한 선포는 1~14절에만 나오고 오히려 저주에 관한 말씀이 15~68절까지 훨씬 길게 나오냐는 것입니다. 이 까닭에 대해서 제가 읽은 어떤 성서주석이나 설교집에도 안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궁금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깨닫게 되었느냐? 애들 키우다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애들 키워본 분들은 들어보면 무슨 말인지 다 아실 겁니다. 

애들 키우다 보면 똑같이 내 배로 나은 자식인데 다 말 잘 들어요? 그러면 다행이지만 말 잘 듣는 자식도 있고, 지지리도 말 안 듣는 자식도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말 잘 듣고 순종하는 자녀에게 말을 더 많이 합니까? 말 안 듣고 불순종하는 자녀에게 더 말을 많이 합니까? 당연히 말 안 듣는 아이지요. 말 잘 듣는 아이에게는 딱 한 마디면 돼요. “공부 좀 할래?” 그러면 저가 알아서 공부합니다. 어떨 때는 공부하라 소리 안 해도 알아서 해요. 그런데 왜 공부 안 하냐 잔소리가 길어지는 것은 그 아이가 말을 안 들으니까 그런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오늘 신명기 28장에서 축복의 말씀보다 저주의 말씀이 훨씬 긴 것은 말 잘 안 듣는 아이에게 말 많이 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워낙 말을 잘 안 들었잖아요? 그러니까 순종 잘 했으면 “너 순종 잘 하고 말 잘 들었으니 이런 복을 줄게” 하고 축복만 딱 말하고 끝내면 될 것을, 워낙 순종을 안 하고 말을 안 들으니까 “너 그렇게 말 안 듣고 불순종 하면 이런 저주 받는다” 하고 길게 길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제 이론이 그럴 듯 합니까? 다른 데는 안 나오는 말이에요. 순수한 제 이론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모든 율법을 단 10개로 축약해 놓은 율법의 결정판인 십계명도 보면 열 개의 계명 중에서 “하지 마라”가 더 많습니까? “하라”가 더 많습니까? 궁금하시면 찬송가 맨 뒤를 펴서 십계명을 보십시오. 열 개의 계명 중에서 하라는 4계명인 “안식일을 지켜라”와 5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 단 두 개뿐이고 나머지 여덟 개는 모두 “하지 마라”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성경 전체를 볼 때 “하지 마라”가 “하라”보다 훨씬 숫자도 많고 분량도 많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다고요?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지리도 말을 안 들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앞서 축복과 저주는 함께 다닌다고 한 것처럼 오늘 본문인 신명기 28장에는 두 가지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바로 ‘격려’와 ‘경고’입니다. 말을 달리게 하려면 채찍과 당근이 함께 있어야지요. 채찍질만 하면 말이 지쳐 쓰러집니다. 당근만 주면 말이 게을러져서 안 달립니다. 그래서 채찍과 당근이 꼭 함께 있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신명기 28장에서 채찍과 당근인 ‘격려’와 ‘경고’를 우리에게 함께 주고 계신 것입니다. 왜요? 우리를 잘 달리게 하려고요. 

우리를 축복의 산을 향해 잘 달려서 결국 그 축복을 다 받아 누리게 하려고 말입니다. 신명기 28장은 우리에게 이렇게 격려합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 말씀에 절대 순종해라. 그러면 이런 엄청난 복을 줄게.” 하고 말입니다. 동시에 신명기 28장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봐라,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이렇게 불순종하면 이런 엄청난 저주를 받게 된다. 그러니 너희는 절대 그 전철(前轍)을 밟지 말고,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말고 오직 순종의 길만 따라가라” 하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반드시 축복 받는 길로만 가기 바랍니다. 세상에는 행복을 추구하며 성공의 산, 출세의 산에 열심히 오르지만 올라보니 결국 저주받은 에발 산인 경우가 참 많습니다. 여러분은 절대 저주의 산인 에발 산에 오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해서 축복의 산인 그리심 산에만 올라가기 바랍니다. 거기 올라가면 하나님의 축복의 보고(寶庫)가 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내 것으로 따내고 유치하기 바랍니다.

다음 주일에 이 “복의 근원 강림하사” 시리즈 마지막 시간으로 7~14절에 나오는 축복 리스트의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하나 하나 살펴보고 그 복을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 다음 주일에 기대를 많이 하고 오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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