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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서주일] 주의 말씀을 전하는 자 (사 52:6-8, 행 16:2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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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을 전하는 자 (사 52:6-8, 행 16:29-32)

오늘은 성서주일입니다. 성경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성경을 주신 것을 감사하는 주일이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역사상 가장 많이 출판된 책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책입니다. 신학자 에밀 브루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인의 음성”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주인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우리 주인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주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십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성탄을 이렇게 전합니다. 요한복음 1:14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합니다.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이며 육신은 ‘사르크스’인데 ‘로고스’가 ‘사르크스’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로고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이 말씀이 내게 주시는 말씀이 될 때에 ‘레마’라고 합니다. 물을 담아 두는 수원지의 물이 ‘로고스’라면 내가 마신 물은 ‘레마’입니다. ‘로고스’가 ‘레마’가 되어야 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말씀이 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긴 자는 ‘로고스’를 ‘레마’로 들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게 주신 말씀으로 들어야 하고, 각자에게 주신 말씀으로 들려지게 전해야 참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에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형제들아, 어찌할꼬?”라고 회개하며 처음 교인이 되었고 하루에 삼천 명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고넬료가 환상을 보고 욥바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청하여 가이사랴의 고넬료 집에서 말씀을 전할 때에 방에 가득히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였고 베드로는 그들에게 세례를 주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뜨겁게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안식일에 강가에서 여인들에게 말씀을 전하였을 때에 루디아가 마음을 열고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소아시아에서, 헬라에서, 로마에서 말씀을 전할 때마다 그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변화하고 처음 교회를 세우는 힘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말씀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사회가 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나라가 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힘입니다. 
  
초대교회의 직분 가운데는 ‘말씀 전하는 자’라는 직분이 있었습니다. 헬라어로 ‘케뤽스’라고 하는데 ‘케리그마’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전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직분입니다.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의미합니다. 현재도 목회자의 기능 가운데 말씀을 전하는 기능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더 앞서는 기능은 없다는 뜻입니다. 
  
현대에 말씀 전하는 자의 직분을 누가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은 성경의 지엄한 명령입니다. 디모데후서 4:1에는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라고 합니다. 엄히 명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2절에는 말씀합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바울은 두 번째 전도여행 중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땅이 흔들리고 옥문이 열려 간수는 바울과 실라가 도망한 줄로 알고 자살하려 했습니다. 바울은 간수에게 탈옥하지 않았으니 자살하지 말라고 권하고 간수에게 말씀을 전파하였습니다. 바울은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 모든 사람에게” 전하였습니다. 바울에게는 모든 환경이 말씀을 전하는 기회였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도구였습니다. 바울은 평생을 말씀 전하는 자로 살았습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에 보면 로마에 가서도 바울이 말씀을 전하는 그 일은 누구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첫째, 전하는 핵심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31에는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에 구원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내용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구원입니다. 복음의 전 내용은 구원입니다. 산상보훈의 팔복에도 ‘천국이 저희 것이요’라는 복이 있습니다.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말은 구원받는다는 말입니다. 산상보훈뿐만 아니라 다락방강화에서도 ‘너희를 나 있는 곳에 있게 하겠다’는 말은 구원을 의미합니다. 
  
바울의 말씀의 핵심은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간수는 바울 앞에 엎드렸습니다. 바울에 대한 존경과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간수는 “선생들아”라고 하였습니다. 헬라어로 ‘퀴리오이’라는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주님들이여!’라는 뜻입니다. 바울의 권위를 높이는 말입니다. 자신의 말을 해도 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 전했습니다.  
  
그 때 간수는 말합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에 구원을 받으리라”. 본 절은 초대 교회에 복음 증거자들이 전한 메시지의 대 주제입니다. 이 말은 시대를 초월하여 영원한 기독교 진리의 핵심입니다. 
  
성경은 40 여명의 저자가 1,600년 동안 기록한 책이지만 중심 주제 오직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입니다. 그 많은 저자가 오랜 기간 동안 서로 의논도 하지 않고 기록하였지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은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구원의 말씀입니다. 디모데후서 3:15에는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합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마다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마다 구원을 얻습니다. 
  
성경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자유주의자들조차도 성경 본문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성경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잘 모릅니다. 성경은 구원입니다. 윤리적인 이야기, 좋은 이야기는 공자도 석가도 무하마드도 다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예수님만이 하시고 성경만이 가르칩니다. 
  
무디목사님은 ‘성경은 정보를 위한 책이 아니라 변화를 위한 책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화가 무엇입니까? 영혼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구원받는 것이 변화입니다. 
  
디모데후서 3:16에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호흡해내신’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이마신’ 숨이 아니라 ‘내쉰’ 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숨을 내쉬어 만든 것이 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실 때 숨을 내쉬어 사람에게 넣어 사람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숨은 죽은 것을 살리는 숨입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가능한 살아 있는 숨입니다. 
  
존 워너메이커는 미국의 백화점 왕입니다. 그의 별명은 ‘성경이 만든 백화점 왕’입니다. 지금도 필라델피아 시청 앞에 그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1838년 7월 11일 태어난 이후 오늘까지 무려 30,026일을 살았다. 나의 인생에서 투자한 것마다 많은 이윤을 남겼다. 그러나 나의 투자 중 가장 성공적 투자는 열 살 때 2달러 75센트를 주고 구입한 이 성경이다. 바로 이 성경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불신자인 친구에게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면 구원 받는다고 친구를 전도하였습니다. 친구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이 친구는 전도한 집사님에게 “왜 하필이면 쩨쩨하게 구원이지? 십 원이면 십 원이지”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이 집사님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얼결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 그건 하나님이 미리 십일조 일원을 떼고 주셨기 때문이야”. 십 원보다 구원이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십 원 그까짓 것 가지고 뭘 하겠습니까? 구원은 어떤 것보다, 천만금 보다 가치가 있습니다. 
  
티베트불교인 라마불교는 모든 종교 가운데 가장 고행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오체투지’라고 하여 엎드려 절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을 땅에 쭉 뻗어 산을 넘기도 합니다. 오래 전 티베트에 갔을 때에 고행을 20년 이상 한 승려인 한 라마가 하루에 세 번 티베트 라사에 있는 포달랍(布達拉)궁 돌이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길바닥에 뻗어 절을 하며 ‘옴메니 밤메홈’을 끊임없이 말합니다. 이 말은 ‘이 무지에서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마니차’라는 돌리는 경전을 돌리면 경전을 한번 읽은 셈이 된다고 하여 마니차를 돌리며 걸어 다닙니다. 구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면 이렇게 고생입니다. 구원은 ‘옴메니 밤메홈’을 외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열심히 전했고, 우리가 이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둘째, 전하는 대상은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16:32에는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니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말씀을 전하는 대상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말씀 전파의 대상이 아니라면 두 가지 경우일 것입니다. 첫째는 구원에서 처음부터 제외 된 사람이거나, 둘째는 구원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죄가 없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둘 다가 가능치도 않은 말입니다. 누구나 구원받아야 하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은 구원의 무제한성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는 것은 모든 인류가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16:15에는 바울이 빌립보의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루디아가 먼저 말씀을 듣고 그리고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라고 합니다. 온 식구가 예외 없이 구원에 참여한 것입니다. 
  
찬송가 520장 후렴에는 “어느 누구나 주께 나오라 어서 와서 주의 말씀 들으라. 하늘 아버지가 오라 하시니 어느 누구나 오라”고 합니다. 하늘 아버지의 뜻이며, 하늘 아버지의 명령은 “어느 누구나 오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14에는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다 하늘나라에 오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지옥에 보내는 일입니다. 
  
C. S. 루이스는 기독교에서 정말 제거하고 싶은 교리가 있다면 바로 지옥에 관한 교리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나에게 그럴만한 힘이 있다면 그리고 진실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 어떤 대가라도 지불하겠습니다”라고 그는 고백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도 그 일을 가장 원하시는 일입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지 멸망이 창조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들어갈 빈자리’(God-shaped void)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누구에게나 다 하나님은 들어가시고 누구나 다 예수님을 믿을 수 있고 누구나 다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헬라어 신약 서문에서 성경은 당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1522년 에라스무스의 주장대로 루터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윌리엄 틴데일은 1525년 영어로 번역하였습니다. 그 후에 계속해서 다른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2010년 12월 말 현재 2,527개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세계에는 약 6600개의 언어가 있습니다. 지금도 성경은 계속 번역되고 있습니다. 왜 성경이 당대 일반인이 사용하는 언어로 번역 돼야 합니까? 그래야 모든 사람이 읽고 변화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아이작 뉴턴은 셀 수도 없이 많은 과학적 발견을 했음에도 성경을 과학보다 높이 두었고, 자신이 발견한 이론들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바랐습니다. 그의 과학의 가치는 인간 구원이었습니다. 모든 세상의 학문은 성경을 보조하는 자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학문은 인간이 구원받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알콜중독자인 아버지와 함께 온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너무너무 기뻐하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무신론자가 그 소년을 보고 비웃었습니다. 아직도 성경의 신화를 믿고 ‘구원’ 같은 낡아빠진 얘기를 믿는다는 것은 너무 순진하다고 조롱하였습니다. “야! 꿈에서 깨라!”. 이 말을 들은 소년은 “여보세요, 선생님. 아빠가 집에 오기만 하면 나를 때리고 발로 차곤 하였어요. 나는 아빠 오는 소리만 나면 무서워 숨어야 했어요. 아빠는 엄마를 욕하고 마구 때렸어요. 엄마와 나는 참 많이 추위에 떨었고, 배가 고팠어요. 엄마는 거의 매일 울었어요. 그런데 이제 아빠는 엄마에게 옷을 사주고 키스해주고 껴안아 주기도 해요. 나를 무릎에 앉히고 옛날얘기를 해주고 사랑한다는 말도 해요. 이제 우리 집은 따뜻하고 화목해요.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사랑해요. 선생님! 만일, 제가 꿈을 꾸고 있다면 저를 깨우지 말아주세요”. 누구나 구원 받아야 하고, 누구에게나 구원은 좋은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소통의 문제입니다. 계층 간에 소통이 안 되어 온갖 사회적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발달한 것이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란 개념입니다. 신뢰, 소통, 협력이 사회적 자본이랍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하나님과 통해야 사람과 통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볼 때는 “사회적 자본은 구원”입니다. 하나님과 통하고 구원받는 확신이 있다면 사회적 자본은 절로 생긴다고 봅니다. 
  
복음성가의 가사에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민족 한사람 한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입을 통하여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결론 

1522년 마르틴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에 숨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는 신약성경을 11주 만에 완전히 독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기적 같은 일입니다. 독일 모든 국민에게 성경을 읽게 해 주어야겠다는 의지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하겠다는 개혁의 의지가 이 일을 해내게 했습니다. 
  
철학자 존 로크는 성경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축복이라고 하였습니다. 괴테는 독일이 위대한 나라가 된 것은 마르틴 루터가 1517년 종교개혁을 해서 전 독일인이 독일어 성경을 읽고 배우게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빅토로 위고는 영국이 세계적인 나라가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이렇게 축복을 받습니다. 
  
바울은 매를 맞든, 옥에 갇히든, 누굴 만나든, 모든 일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도구였습니다. 모든 환경이 말씀을 전하게 주시는 하나님의 기회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바울의 이 열정을 배워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는 자가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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