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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책망의 올바른 자세 (미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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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망의 올바른 자세 (미 1:8-16)
 
제가 여러 해 전에 미국의 콜로라도 스프링스(Colorado Springs)에 초청을 받아 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콜로라도의 달 밝은 밤에’ 라는 노래처럼 그 곳은 높은 지대에 있어 달이 가깝게 느껴지고 밝은 동네였습니다. 그 곳에 뉴라이프교회(NewLife Church)라는 큰 교회가 있었는데, 1만 4천명의 성도가 출석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인 테드 헤가드(Ted Haggard)는 1985년에 교회를 개척하여 대형 교회로 성장시킨 능력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2003년도부터 미국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전국복음주의연합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NAE) 회장으로 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조지 부시 대통령과 가까워서 백악관으로 수시로 드나들 정도로 정치 적인 영향도 큰 목회자였습니다. 그가 어떻게 복음주의 회장도 맡고 백악관도 드나들 수 있었다. 

이유는 특별히 동성연애에 대해서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그는 동성 간의 결혼을 반대하였습니다. 그의 입장이 성경과도 일치되었기 때문에 복음주의자 들에게 지지를 받았고, 미국 공화당의 입장과도 일치되었기 때문에 정부의 지지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동성연애를, 반대하던 그가 2003년부터 3년 동안이나 마약과 동성연애를 즐겼다는 사실이 들통 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동성연애 파트너인 마이크 존스(Mike Jones)라는 사람이 그 사실을 전부 폭로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를 사임하였습니다. 그 일로 인해 미국 그리스도인들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루이지애나주 베튼루지 한인 침례교회(Louisiana Baton Rouge Korean Baptist Church)에서 5년간 목회를 했습니다. 그곳에는 훼밀리 워십 센터(Family Worship Center)라는 큰 교회가 있었습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보다 더 큰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오순절 운동의 대표자라고 하는 지미 스웨거트(Jimmy Swaggert) 목사가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버지니아(Virginia)주에 PTL(Praise the Lord)이란 프로그램을 운영하던 짐 베이커(Jim Baker) 목사가 그만 부적절한 관계로 이성 간의 죄악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지미 스웨거트목사가 비판하였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도 뉴올리언즈(New Orleans)에서 창녀와 어울리다 현장에서 사진을 찍혀 들통이 났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회중 앞에서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고, 목회 중지라는 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 제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판하는 사람들도 종종 그 비판하는 죄에 자신도 빠지는 현실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책망하고 비판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책망하고 비판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인지 미가서를 통해 생각해보겠습니다. 


Ⅰ. 본문의 내용 

미가라고 하는 선지자는 모레셋 가드 출신입니다. 모레셋 가드는 예루살렘으로부터 40km 떨어진 곳인데 예루살렘에서 지중해까지가 80km이고 그 중간에 모레셋 가드가 있는 것입니다. 미가는 작은 이사야라고 불렸습니다. 이사야서와 미가서의 메시지는 동일합니다. 예루살렘이 죄악으로 인해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미가서는 세 편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2장은 첫 번째 설교, 3-5장은 두 번째 설교, 6-7장은 세 번째 설교입니다. 그리고 각 설교는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라는 뜻의 히브리어인 ‘샤마’로 시작됩니다. ‘샤마’가 나오면 새로운 설교가 시작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첫 번째 설교가 나온 1-2장은 사마리아의 멸망과 유다의 멸망에 대한 예언입니다. 사마리아가 우상숭배로 인해 멸망하였고 그 죄악이 유다까지 미치게 되어 결국 유다도 멸망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미가 선지자의 예언은 역사적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침략하여 3년간 북왕국의 수도 사마리아를 포위하였습니다. BC 721년에 사마리아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북왕국 열 지파를 온 세계에 흩어버리고 그 자리에 앗수르 사람들로 채워 놓았습니다. 그들을 신약시대에는 사마리아인으로 부릅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아닙니다. 다른 곳에서 온 이방족속들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가 멸망하자 살만에셀의 아들인 아르곤 2세가 그 여세를 몰아 블레셋을 침공하였습니다. 그리고 BC 701년에는 그의 아들인 산헤립이 결국은 유다를 침공해서 열 개의 성읍을 다 멸망시키고 예루살렘까지 포위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다 망하고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는 열 성읍에 대해 기록하였습니다. 열 성읍의 이름과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과는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첫째, '베들레아브라'는 티끌의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베들레아브라 사람들은 전쟁에 패하여 티끌과 먼지를 뒤집어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빌'이라는 것은 아름다운 성읍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빌 주민들은 벌거벗은, 아름답지 못한 모습으로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사아난'이란 진군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사아난 주민들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패망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벧에셀'은 쉬는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정류하거나 쉴 수 없는 곳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마롯'이라고 하는 것은 쓰다, 비통하다는 의미입니다. 마롯 주민들이 예루살렘에 도움을 청해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결국에는 씁쓸하고 비통한 심령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라기스'는 준마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라기스는 애굽에서 말을 수입하는 관문입니다. 그래서 시온의 죄의 근본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라기스 사람들이 준마를 타고 도망하려고 해도 결국은 심판을 피할 수도 없고 도망할 수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곱째, '가드모레셋'이란 가드의 소유물이란 뜻인데 가드의 소유물이 아니라 앗수르의 소유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덟째, '악십'이라는 말은 거짓말인데, 악십 주민들이 거짓말을 해서 유다 왕을 속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앗수르가 침공해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고 유다 왕을 속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홉째, '마레사'는 상속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 상속물을 모두 다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열째, '아둘람'이란 영원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나라가 영원하기는커녕 지도자들이 다 아둘람 동굴로 도망쳐 피신 오는 신세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도시 이름과 심판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우상숭배를 해서 결국 예루살렘만 남고 나머지 성읍들은 다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앗수르왕 산헤립과 그 군대 장관 랍사게가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는 상황 속에서 그들이 보낸 편지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고 있는데, 가만히 보고 계십니까?' 이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도 기도로 도와주었습니다.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The Angel of The LORD)에 정관사 ‘The’가 붙여졌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성육신하기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성육신하기 이전에도 보내주셔서 하룻밤 사이에 산헤립의 군대 18만5천명을 다 죽이셨습니다. 산헤립은 앗수르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갔지만 자신의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결국 앗수르의 위협으로부터 예루살렘은 가까스로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 왕국은 계속해서 범죄하였습니다. 결국 BC 587년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당하고 유다는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포로가 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남자는 다 끌려가고 여자는 겁탈당하고 아이들은 다 바위에 던져서 죽이고, 그 현장을 보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슬픈 일 입니까?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 되는 슬픔을 기록한 것이 16절입니다.“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 네 머리로 크게 무여지게 하기를 독수리 같게 할지어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너를 떠났음이니라” (미 1:16). 

시드기야 왕은 유다의 마지막 왕입니다. 자기 자식들이 자기 눈앞에서 죽는 것을 봐야 했고, 그것을 다 본 후엔 그 두 눈이 뽑히며 끌려갔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으면 사람들이 머리를 밀어서 독수리처럼 만들겠습니까? 자기 스스로 머리카락을 밀어 대머리가 되는 것은 극한의 슬픔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상숭배로 인하여 유다는 극한 슬픔을 겪는 포로가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우상숭배 때문이라고 강력하게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질병으로 말하자면 너무나 깊어서 치료할 수 없는 암입니다. 그리고 전염성이 강해서 사마리아도 걸리더니 유다와 예루살렘까지도 걸리게 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가는 지금 유다왕국을 강력하게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가가 유다왕국을 어떤 자세로 책망을 하고 있습니까? 


Ⅱ. 미가의 책망하는 자세는? 

첫째, 애곡하고 애통하면서 진실을 말했습니다. 미가는 유다백성을 책망하지만 교만한 고자세로 책망하지 않습니다. 미가는 자기 스스로 울고 애통하고 애곡하면서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같이 애곡하고 타조같이 애통하리니” (미 1:8). 

어떤 사람이 밤에 동네에서 양말도 신지 않고 맨발과 옷도 입지 않은 벗은 몸으로 큰소리로 울면서 돌아다니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엄청나게 슬픈 일이 있는가 보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미가 선지자는 이처럼 애통하는 마음으로 유다 백성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어떤 미국 목사님께서 미가 1장 8절을 가지고 한 짧은 설교를 보았습니다. 제목은 ‘사랑이 없으면 진실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미가가 유다를 책망할 때 사랑의 마음으로 책망하였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본문에서 배울 자세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 우상숭배에 빠져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입니다. 하지만 미가는 거만하게 이것을 말하지 않고 애통해하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책망하고 비판할 때는 진실한 애통의 마음 없이 책망해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유다의 멸망을 예언하고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울면서 증거하였습니다.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나의 중심이 번뇌하도다” (렘 8:18).“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륙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 (렘 9:1). 

그는 눈물 근원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가리켜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예수님도 누가복음 19장 41절에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면서 예루살렘 성읍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눅 13:34).

“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눅 19:43-44). 

결국 예수님의 말씀대로 AD 70년 로마 장군 타이투스가 침공해서 유다백성 100만 명 이상 죽고 아이들은 돌에 매어 쳐 죽게 되고, 죽지 않은 사람들은 전 세계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대인들은 전 세계에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눈물로써 말씀하셨습니다. 눈물과 애통과 사랑이 없는 책망은 그 책망의 내용이 진리이고 사실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마음에 전혀 감동을 줄 수가 없습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런 메시지를 사무적이고 의무적인 자세로 무리하게 증거한다면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비행기에서 모두가 조용하게 쉬고 있는데 성경을 들고 맨 앞에 나가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친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죄를 책망을 해도 미가의 자세가 요구되는 줄로 믿습니다. 
 
둘째, 미가는 동족의 허물이 이방인에게 알려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미가는 책망 할 때 자기 가족을 책망하는 자세로 하였습니다. 이방인에게 자기 동족의 허물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가드에 고하지 말며 도무지 호곡하지 말지어다 베들레아브라에서 티끌에 굴지어다” (미 1:10). 전반부에 보면 가드에 고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Tell it not in Gath.” 가드에 그런 사실을 말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사무엘하 1장 20절에서 직접 인용된 것입니다.“ 이 일을 가드에도 고하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삼하 1:20). 이것은 다윗의 말입니다. 다윗의 선왕인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얼마나 괴롭혔습니까? 

그런데 사울 왕이 길보아 산 전투에서 사망하자 다윗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다윗 왕은 자기의 선왕 사울이 그렇게 죽은 것을 슬퍼하고 사울을 위해서 슬픈 노래를 지어 야살의 책, '활의 노래'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것이 사무엘하 1장 19-27절의 말씀입니다. 활의 노래를 보면 가드에 고하지 말고 아스글론에도 고하지 말고 블레셋 사람들이 즐거워할까 염려하라고 했습니다. 사울이 죽은 것은 사울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방인 블레셋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가드는 블레셋의 5대 도시 가운데 중요한 도시입니다. 그리고 골리앗의 고향입니다. 가드 왕은 아기스라고 불리우는 사람입니다. 다윗 왕이 한 때 사울을 피해 아기스에게로 피신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고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삼상 21:11). 아기스에게 신하들이 블레셋을 많이 죽인 다윗을 왜 데리고 왔냐고 물어본 것입니다. 그때 다윗이 미친 척을 하여 가까스로 생명을 유지했던 곳이 가드입니다. 다윗은 사울이 죽었을 때 가드에 이 소식을 알려주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방인들과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죄와 허물로 멸망하는 것을 보고 좋아하고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미가는 가드에 사마리아가 멸망한 소식도 알려주지 말고, 예루살렘이 심판받을 예언도 말하지 말고, 그 근처에 가서 애곡도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최근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문제가 있어 감옥에 가고 망신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뉴스에 나와서 택시기사들도 그 방송을 듣고 목사가 감옥에 갔다고 비웃는 것입니다. 저는 그 목사가 잘못했는지 잘했는지는 정확한 정보가 없어서 잘 모릅니다. 하지만 목사가 설사 잘못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가지고 여기저기 다 이야기하고 일반 법원에서 불신자 판사가 재판하여 감옥에 보내면 되겠습니까? 그것을 본 불신자들이 얼마나 목사를 비웃겠습니까? 
 
이것은 불신자들에게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점점 불신자들이 목사를 멀리하고 교회를 멀리하며 예수님을 믿으라고 해도 믿지 않으면 그 사람들의 영혼을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교회 안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다윗은 시편 여러 곳에서 자기 원수가 다윗의 고난을 기뻐하지 말게 해 달라고 기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시 30:1).“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시 25:2). 

싸워도 우리 안에서 싸우고 어떤 문제든 우리 안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방에 소문나서는 안 됩니다. 
 
셋째, 미가 자신은 책망하는 내용에서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책망하는 사람은 책망하는 내용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미 3:8). 

동성애에 빠져있으면서 동생애를 책망하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자기가 간음하면서 다른 사람보고 간음한다고 책망하는 것 또한 우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책망할 때 책망하는 일이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우리 자신은 책망하는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가족들 중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죄로 인해서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간다는 사실은 진리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지옥에 갑니다. 그런데 남편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남편을 마귀라고 하면 남편은 마음을 닫고 교회를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세로는 전도가 되지 않고 진리를 전해도 감동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미가의 자세로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우리 눈에 눈물이 있어야 하고,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부터 믿음 위에 확고히 서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의를 가지고 살아야 우리가 남을 전도하고 책망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남의 죄를 책망할 때도 애통하는 심령으로 이것이 이방인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그렇게 우리 자신이 먼저 정결한 가운데 책망해야 할 것입니다. 
 
비판과 책망은 어려운 일입니다. 미가로부터 이러한 바른 자세를 배우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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