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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드로의 집에서 일어난 부흥 (막 1:2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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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집에서 일어난 부흥 (막 1:29-34)


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32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34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들의 이름이나 출신을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어떤 귀신들린 자, 한 문둥병자, 한 중풍병자, 어떤 손 마른 사람,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 혈루병을 앓는 한 여인, 어떤 소경이라 불릴 뿐입니다. 저는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그들 모두는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없기 때문에 우리들의 이름을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눈먼 소경이 바로 우리였고, 앉은뱅이처럼 무기력했던 자들이 바로 우리였고, 영혼의 문둥병을 앓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었습니다.

둘째는 주님은 단지 그들의 고통을 제거해 주는 데만 열중하셨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병을 고치기만 하면 되었지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은 보상을 받으려 하거나 무슨 업적을 자랑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치유 사역에 방해가 될까 기적을 행하시고도 잠잠할 것을 명하시거나 은밀히 치유를 행하셨습니다. 

학자들은 예수님이 은밀한 곳에서 기적을 행하시거나 소문을 내지 못하게 하시거나, 또 34절처럼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는 행동들을 가지고 ‘메시야 비밀론’ 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신학적 주제를 역설합니다. 사람들이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의 정체를 잘 알 수 없었던 이유는 주님이 이처럼 감추셨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환자와 그들의 치유에만 있었습니다. 귀신들이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떠들거나 사람들이 소문을 내어 그 사역에 지장을 받을까봐 침묵을 명하시거나 은밀히 행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사건은 세 절로 짧지만 치유를 받은 자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할 것입니다. 그녀는 베드로의 장모였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이름이 없습니다. 아마도 베드로 자신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기적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열병은 아마 장티푸스나 콜레라일 것입니다. 옛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열병으로 죽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의 병은 단순한 감기 정도의 병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장티푸스를 앓아 본 적이 있습니다. 장티푸스는 4주 만에 그 생명이 결정됩니다. 열이 40도를 오르내리며 펄펄 끊다가 4주를 견디면 사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습니다. 제가 처음 장티푸스를 앓을 때 그냥 감기인줄 알았습니다. 자취할 때였는데 감기약만 2주 동안 먹다가 도무지 견딜 수 없어 병원에 가니 장티푸스라 하였습니다. 죽을 뻔했습니다. 의사 분에게 혼 많이 났습니다. 제가 당시 대학에 다닐 때였는데 그때 제 전공이 미생물학과였습니다. 미생물학과가 장티푸스도 모르냐고 놀림을 받았습니다.

열병이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병이지만 주님은 이보다 더한 병들도 고치셨습니다. 단순히 병을 고쳤다는 사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치유의 당사자가 베드로의 장모였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 베드로는 참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결혼 풍습을 보면 여자가 남자 집에 시집 와서 사는 것이고 남자의 부모를 모시는 것이 가부장제도 하의 풍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 처의 어머니인 장모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장모가 단지 놀러왔다 병에 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베드로 장모의 열병의 정체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은 묵상이 필요합니다. 베드로 장모의 병이 단지 육신의 병만이었을까요? 그녀가 마음의 병에 걸려 누워 있던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이것을 화병이라 부릅니다. 열불 나는 병입니다. 원문도 ‘푸렛소’라 하여 ‘불이 나는’이라는 분사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29절에 보면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는 서로 형제입니다. 

그리고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이웃에 사는 형제들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자기 딸을 베드로에게 시집보내며 행복하게 살 것을 소원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부자는 아니지만 배 한 척을 소유하고 그런대로 딸을 행복하게 해주며 살았습니다. 더구나 장모인 자기에게도 매우 친절한 사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예수라는 사나이가 나타나더니 자기 사위가 예수에게 홀랑 미쳐 배를 버리고 떠나버렸습니다. 더 이상 고기는 잡아오지 않고 영의 양식을 듣는다며 산으로, 바다로 싸돌아다니느라 도통 집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그 형 안드레와 그 이웃집 두 총각들까지 미쳐서 야단입니다. 그러니 이런 꼴을 보고 있던 장모가 속에서 불이 나지 않았겠습니까? 열불이 난 것이지요. 저도 사위인데 제 장모님을 볼 때마다 늘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귀한 딸을 데리고 와서 엄청 고생시키고 있으니까요?

베드로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말씀을 듣는 것은 좋은데 자기 아내나 가족들에게는 미안했을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과 가족을 섬기는 것은 이처럼 서로 조화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주님을 위해 살면 가족이 어려울 때가 있고, 가족을 위해 살면 주님의 길을 가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불교의 스님이나 천주교의 신부님들보다 기독교의 목회자의 길이 더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 가정의 가장의 역할을 하면서 또 구도자의 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교회 목회자들의 사치나 물질에 대한 탐욕이 문제가 되는데 이는 구도자로서의 실존과 가장으로서의 실존을 둘 다 감당하려다 빚어진 비극이라 할 것입니다. 

옛날 우리 신앙 선배들은 가장으로서의 길은 포기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복음전도자의 한 길로만 갔습니다. 그들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하늘나라” 하며 천국의 낙원을 생각하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목회자들은 세상에서도 잘 되고 죽어서도 잘되려고 하니 오히려 세상에서나 하늘나라에서나 비난받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제가 그렇다고 해서 가정을 버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가장의 역할은 아무도 대신할 수 없고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의 제자로서 부름 받은 이상 가장 중요한 본분은 십자가의 길을 가는 구도자의 삶입니다. 자기 가정을 위한 최소한의 물질은 필요하나 필요 이상의 물질은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주님의 길을 좇는 제자의 마땅한 모습일 것입니다. 

이처럼 가정을 버리며 나갔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시고 자기 집으로 들어오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변변히 대접도 못하고 장모님은 몸져누워 있습니다. 베드로는 가족들에게나 예수님에게 모두 죄송스러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곤혹스런 마음을 아셨는지 아무 말씀도 없이 베드로의 장모에게 다가가 그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그 순간 열병이 떠나고 베드로의 장모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나아갈 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그것이 먹을 것이든 그것이 입을 것이든 그것이 건강이든 그것이 어떤 생활의 필요이든 채워주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필요를 채워주셨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장모를 이제 주님의 사역자로 만듭니다. 31절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수종들다’는 헬라어로 디아코니아 입니다. 디아코니아는 교회의 봉사 사역을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기도하며 하나님의 일에 열심 하면 우리 가정에서 예수 믿는다고 핍박하던 사람을 바꾸어 오히려 주님의 사역자로 만들어주십니다. 그를 반대자가 아니라 변하여 열렬한 지지자가 되게 만드십니다. 장모의 열병이 떠나고 그가 봉사의 일을 하게 되자 베드로의 집은 이제 교회가 되었습니다. 32절 이하의 치유의 장소는 아마 베드로의 집이었을 것입니다.

손을 잡아 일으키니

주님은 베드로의 장모를 31절 “그 손을 잡아 일으키는” 방법으로 고치셨습니다. 누워 있는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잡고 아무 말씀도 없이 그냥 일으키신 것입니다. 여기 일으키다는 동사는 헬라어로 ‘에게이로’입니다. 이 단어는 평범한 단어가 아니라 부활을 연상케 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안식 후 첫날 무덤을 방문했던 여인들은 천사들로부터 “그가 살아나셨다”(막16:6)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가 살아나셨다’는 원래의 뜻은 ‘그가 일으킴을 받았다’입니다. ‘에게이로’의 수동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손을 잡고 일으키신 사건이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잡고 일으키는 장면은 마치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부활의 장면을 연상케 만듭니다. 우리의 마지막 날 주님은 우리의 손을 잡고 모든 믿는 자들을 다시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것이 미래의 부활 사건이라면 현재의 부활 사건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자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던 자들이 진리되신 예수님을 만나는 사건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기적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고 말씀하셨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엡2:5-6)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일으키셨다, 앉히셨다를 미래형이 아니라 단순과거형을 사용함으로써 그것이 바로 현재 이루어진 사건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이미 부활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손을 잡아 일으키는 사역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낙담한 자들, 무기력한 자들, 병든 자들을 다시 일으키고 계십니다. 봄은 부활의 계절입니다. 겨우내 죽었던 것처럼 보이던 나무에서 새순이 돋고 잎사귀와 꽃들이 피는 것을 보면 마치 우리는 부활의 현장을 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마치 죽은 고목과 같은 우리 인생에서 꽃이 피게 하는 부활의 기적을 지금도 행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역사의 현장에서도 부활의 기적을 행하고 있습니다. 소망이 없고 어둠만이 지배하고 이대로 끝날 것 같은 불모의 역사 현장에서도 주님은 그 손을 잡아 역사의 혼을 일으켜 세웁니다. 그러니 신앙인들에게 절망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황무지가 장미꽃으로 덮히는 그 날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늘 부활을 꿈꾸는 자들 그들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이런 예수님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33) 32절에 저물 때 사람들이 몰려온 이유는 이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일의 범주에는 병자를 고치는 치료행위도 들어갑니다. 거룩하고 복된 날로 축복받은 안식일이 오히려 사람들을 얽매는 날이 된 것입니다. 주님은 두 팔을 벌리고 언제든지 사람들을 치유하시려 하였지만 율법에 매인 사람들은 바리새인관 서기관들의 눈치가 보여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안식일이 끝나는 저녁에 주님이 계신 베드로의 집으로 몰려든 것입니다. 

여기서 회당과 베드로의 집이 뚜렷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회당에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29). 그곳은 항상 불신과 음모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회당은 귀신들린 자들이 있고 손마른 무기력한 사람이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는 사람을 평가하고 안식일이라는 죄목으로 사람을 얽어매는 곳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교만과 허영이 있고 진리를 대적하려는 음모와 폭력이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주님은 사역을 제대로 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새로운 공동체가 베드로의 집을 중심으로 탄생하고 있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문 앞에 모였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그 문턱은 낮아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오갈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생명과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떤 곳을 찾고 있습니까? 생명이 있는 곳입니까? 화려한 건물이 있는 곳입니까? 예수님이 계신 곳입니까? 유력한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까? 진리가 있는 것입니까? 회칠한 무덤처럼 겉은 아름답지만 온갖 썩은 내가 진동하는 곳입니까?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각색 병든 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이 몰려듭니다. 해외 의료선교나 봉사를 가면 이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야 무료 진료 왔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몰려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인도나 필리핀 등 가난한 지역에 의료 선교나 봉사하러 가면 정말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몰려듭니다. 하루에도 수백 명의 사람들을 진찰하고 치료해줍니다. 우리들이 마치 예수님이 된 것 같습니다. 모여든 사람들에게 회충약 한 알 먹이는 것도 큰일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처럼 이 기생충이 모든 영양분을 빼앗아 가고 복통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 가운데 있으면 왠지 모르게 생기가 도는 것을 느낍니다. 사람들 간의 진정한 만남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놓는 사랑을 행할 때 인간은 행복을 맛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고 우리는 도울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 행복한 교환이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각색 병든 많은 사람들을 고치셨으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귀신들렸다는 것은 실제 영적인 세력에 의해서 장악 당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질병에 걸린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귀신에 의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이처럼 정신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눈에 뜨이지 않는 이유는 이들을 모두 정신병원이나 수용시설에서 감금하거나 보호해두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이런 심한 정신병자가 약 50만 명에 이를 것이라 추정합니다. 그외 우울증이나 가벼운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 또한 많을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이들을 모든 억압과 부자유함에서 자유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마음에 병든 자와 육신의 병든 자 모두를 치유하러 오셨습니다. 주님의 구원은 미래의 약속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생하게 지금 벌어지는 현재였습니다. 말만이 아니라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요한 사도는 성도들을 향하여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고 기도합니다. 주님의 복음은 우리 영혼이 잘되는 복음입니다. 주님의 복음은 우리 범사가 잘되는 복음입니다. 주님의 복음은 우리 육신이 강건하게 되는 복음입니다. 이 은혜가 온전히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병들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서술하며 마태복음에서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8:17) 우리 주님이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셨다는 것은 떠 맡으셨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것을 ‘행복한 교환’이라 불렀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가져가시고 대신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가져가시고 우리에게 강건함을 주십니다. 이사야서에서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채찍에 맞아서 깊게 패인 상처는 바로 우리가 가진 모든 연약함들을 상징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맞은 채찍의 상처를 대신 가져가시고 우리에게는 자신의 깨끗한 몸과 마음을 대신 주십니다.

사실 이는 부모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부모는 자식이 아프면 자기가 대신 그 아픔을 당하고 자기 자녀는 강건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들의 부모들처럼 우리 곁에 계시면서 우리가 받은 상처에 대해서 더 아파하십니다. 마태는 이사야를 인용하며 예수님께서 우리 병을 짊어지셨다고 말씀합니다. 병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면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때 나 홀로 그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간다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힘들 때 “주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하고 원망하지만 주님은 바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를 업고 함께 힘든 길을 걸어가고 계십니다. 여러분 혹시 어렸을 때 갑자기 아팠던 적이 없습니까? 그때는 차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그럴 때면 어머니가 우리를 등에 업고 병원을 향해 달렸습니다. 저도 한 번 갑자기 식중독을 앓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방안을 데굴데굴 굴렀는데 그때 저희 어머니가 저를 등에 들쳐 업고 병원을 향해서 뛰었습니다.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우리 주님이 마치 그와 같습니다. 우리가 아플 때 우리를 업고 함께 뛰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병을 짊어지셨도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에서 확인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신음하던 주님의 고통은 바로 오늘 이 순간 내가 당하는 고통을 미리 내다보며 아파하시던 고통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어머니와 같으신 예수님 이 사랑으로 위로 받고 새 힘을 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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