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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기다림은 희망입니다 (사 64:1-7)

첨부 1


제목 - 기다림은 희망입니다.
본문 - 이사야 64:1-7

독일의 남부 뮌헨이란 도시 근교에 ‘다카우’(Dachau) 강제수용소가 있습니다. 뮌헨 출신인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1933년 제3제국의 수상이 된 지 불과 몇 주 만에 정치범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세운 최초의 수용소입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유대인을 수용한 강제수용소가 됩니다. 

1945년 연합군에 의해서 수용소의 포로들이 해방될 때까지 약 12년 동안 20여만 명을 수용했던 곳인데, 그 20여만 명의 포로 가운데 약 3만 5천 명이 굶어죽거나 살해되거나 아니면 인체실험용으로 희생되었습니다. 그렇게 희생된 사람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 수용소에는 유대인들이 처참하게 죽어가면서 부른 노래가 오늘까지 남아 있습니다. ‘나는 믿는다. 태양이 빛나지 않을 때에도 태양이 있음을.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사랑이 있음을.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에도 하나님이 계심을. 영원한 평화의 그 날이 이 땅 위에 오리라는 것을, 더딜지라도 그날이 반드시 오리라는 것을 나는 굳게 믿는다.’ 

여러분, 이 노래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이 노래는 포로수용소에서 부른 노래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부른 시입니다. 어쩌면 이런 희망이 있었기에 죽음의 수용소에서 견뎌낼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그 상황에서 ‘평화의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더디 올지라도 반드시 오리라’는 것을 믿는 희망이 없었다면 아마도 더 많은 사람들이 절망 가운데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희망을 노래하고, 그 희망을 기다릴 줄 알았기에 그들은 결국 그 희망을 환희로 맛볼 수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도 그 기다림은 희망이었습니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기다렸기에 기다리던 아기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마다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탄생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메시야께서 오셔서 뒤틀린 세상을 올바로 바꿔주시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도 기다리면 메시아가 오셨음에도 그들 가운데 그 메시야를 만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아니 세상은 그분을 모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던 날 베들레헴의 그 많은 집들과 여관방의 어느 한 구석조차도 예수님을 위해서 준비된 곳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구간 한 귀퉁이를 빌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의 품에 안겨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가셨지만, 성전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오직 두 사람만이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시므온이라는 할아버지와 안나라는 할머니뿐이었습니다. 

시대와 삶이 어려울수록 사람들은 더욱 큰 희망을 갖게 됩니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다림은 곧 희망입니다. 기다린 사람에게만 희망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대 속에서 어려운 삶을 산다 하더라도 희망을 품지 않는 사람은 기다리지 않습니다. 기다림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의 말씀은 그런 희망을 강렬하게 보여줍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오늘 말씀을 선포할 때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때였습니다. 주전 586년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나라가 멸망당해 없어진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이고 치욕입니다. 

더군다나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버렸고, 이스라엘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농사조차 지을 수 없을 정도로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숫자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땅을 경작할 수 없게 되자 이스라엘 땅은 더욱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이스라엘에 희망이 없어보였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힘을 모아 포로생활에서 탈출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힘을 길러 나라의 주권을 회복할 가능성도 전혀 없습니다. 지금의 이 황폐화된 상황에서 헤어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 바로 앞인 이사야 63:15절 이하입니다. “주님, 예전에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주님의 영광과 권능이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다 어디로 가버렸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구속자라고 하셨는데, 왜 우리 곁을 떠나버리셨습니까?” 이건 기도라기보다 절망의 탄식입니다. 
  
이 탄식에는 희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새로운 세상,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달라는 탄원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힘들어도, 그래서 탄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희망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만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을 때,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심으로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때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렇습니다.

그렇게 절망의 탄원을 하나님께 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 절망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시고 강림하소서.” 이 말씀을 공동번역 성경은 아주 더 실감나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아,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셔야만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에 ‘어서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시라’고 탄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면서 우리의 삶을 관망만 하고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우리가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말없는 동행자로 함께 하시며, 우리의 손을 붙잡고 우리의 걸음걸음을 인도해 주십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삶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인도해 가시는 길에도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시는 길을 가는데도 막다른 골목과 같은 상황이 우리 앞에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탄원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십시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내려오시면 막다른 골목에 문에 생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여 역사하시면 절망이 기쁨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걸 알기에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본문 2-3절에서 말씀합니다.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로 주의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 때에 산들이 주의 앞에서 진동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불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모습이 종종 불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불이 섶을 사르고 물을 끓인다고 말씀하는데, 불이 사르는 섶과 끓이는 물은 1절 하반절에 나오는 산을 말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은 거대한 산이 그들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수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간 바벨론이라는 강대국이 거대한 산이고, 모든 것이 폐허가 되어버린 현실이 도저히 뚫고 지나갈 수 없는 거대한 산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늘을 쪼개시고 강림하시면 아무리 거대한 산과 같은 절망적인 현실이라 하더라도 다 녹아내리고 말 것입니다. 불에 타 사라지는 섶과 같이 절망이 사라질 것입니다. 꽉 막힌 산과 같은 절망이 물이 끓는 것과 같이 끓어 어느 새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전에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강림하셔서 사람이 감히 생각하지 못한 엄청난 일들을 행하셨음을 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의 종살이를 마치고 애굽에서 탈출할 때에도 그랬습니다. 애굽의 학정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분명 그들에게는 힘이 없었습니다. 때리면 맞아야 했고, 일을 더하라도 독촉하면 그대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태어난 사내아이를 나일강에 던져 죽여야 한다는 명령이 떨어지면, 눈물을 머금고 사랑하는 아들 - 갓 태어난 핏덩이를 나일강에 던져 악어 밥이 되는 광경을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 저항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강림하셨습니다. 강림하신 하나님께서 저항 한 번 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이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애굽은 거대한 산과 같았습니다. 도무지 무너지지 않는 산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애굽이라는 산을 무너뜨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강림하셔서 애굽이라는 산을 불살라버리시고 물을 끓임같이 끓어 흩으시고 이스라엘을 건져내셨습니다. 

지금 이사야는 그런 기적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베풀어주시기를 탄원하고 있습니다. 그런 기적을 베푸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강림하셔야만 가능하기 때문에,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시라고 탄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강림하시는 것만이 희망입니다. 하나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것이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림이 그래서 우리에게 희망입니다. 때로 우리의 삶에 산과 같은 거대한 벽이 가로막혀 있을 때가 있습니다. 도저히 내 힘으로 어찌 해 볼 수 없을 정도로 큰 산이 내 앞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탄원해야 합니다. “주님,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십시오.” 
  
주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고 말입니다.(요한복음 14:18) 그렇습니다. 우리가 홀로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힘겹게 걷고 있을 때에도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 앞에 거대한 산이 가로막혀 도저히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어 주저앉아 있을 그 때에도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심 같이 그 때 그 자리에 우리 주님이 내려오십니다. 우리를 품에 안으시려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마가복음 6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신 후에 제자들을 배에 태워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게 하십니다. 그 때 예수님께는 제자들의 배에 함께 타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만 먼저 건너가게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던 중에 거센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러더니 커다란 물결이 배에 몰아쳤습니다. 제자들은 죽을 힘을 다해 거센 파도와 싸워야 했습니다. 제자들이 얼마 동안이나 거스르는 바람과 씨름을 했는지 아십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해 줍니다. “밤 사경쯤에” 사경이라는 말은 오늘로 말하면 새벽 3-6시를 말합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거센 바람과 몰아치는 파도와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앞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배는 바다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고생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마가복음 6:48절에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제자들이 밤이 새도록 바람과 싸우고 있는 모습을 주님께서 보고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로 오셨습니다. 바다 위를 걸어서 말입니다.

여러분, 때로 우리의 삶이 그 제자들과 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내 인생의 배를 저어 앞으로 가려고 아무리 애써보아도 앞으로 전진하지 않습니다. 아니 불어닥친 바람과 파도로 인해서 곧 가라앉을 것만 같습니다. 주위는 캄캄합니다.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도움을 호소할 곳조차 없습니다. 망망대해에 홀로 있습니다. 밤새도록 바람과 파도에 맞서 노를 젓느라고 힘은 다 빠져버렸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모든 게 절망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기억하십시다. 바로 그 때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힘들어할 때 우리 주님께서 다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물 위를 걸어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우리 곁으로 다가 오십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종살이하며 고생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른 척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울부짖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돌보셨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셨습니다.(출애굽기 2:24-25) 비록 아직 때가 되지 않아 그들을 구원할 지도자를 보내주시진 않으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은밀히 모세를 준비시키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바로에게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는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워주셨고, 그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힘들어 할 때, 때로는 너무 어려워 앞뒤가 꽉 막힌 상황에 놀일지라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강림하십니다. 하늘을 쪼개시고 임재하셔서 우리의 상황을 종료시켜 주십니다. 거대한 산과 같은 장애물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다 하더라도 하늘을 쪼개시고 임재하신 하나님께서 그 모든 산들을 불살라버리실 것입니다. 물이 끓음같이 끓게 하셔서 사라지게 하실 것입니다. 그 때를 기다리십시다. 조급해 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시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쪼개시고 강림하실 그 때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상황을 종료시키실 것을 희망 가운데 기다리십시다. 

기다림이 언제나 낭만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 때까지는 아픔을 참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이 완성될 때까지는 여전히 힘든 삶의 터널 안에 갇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기다림이 완성될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희망 가운데 기다리면 반드시 우리에게 승리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쪼개시고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는 이렇게 노래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편 30:11)  

그렇게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하늘을 쪼개시고 강림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강대국 바벨론을 하루 아침에 무너뜨리셨습니다. 페르시아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말입니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기다림의 완성은 아니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한 번의 좌절을 맛보게 됩니다. 고레스 왕의 배려로 고향에 돌아왔지만, 그들을 맞이한 것은 폐허가 되어버린 땅이었습니다. 절망 가운데 살고 있는 고향 사람들의 깊은 신음이었습니다. 지독한 가난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이겨보려도 무던히도 애써보았지만, 그들은 더 큰 역사의 좌절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또 기다렸습니다. 메시아가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들의 기다림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오늘 우리의 삶도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 시대보다 여러 면에서 우리가 사는 시대가 나아 보입니다. 경제적인 풍요가 그렇고, 삶의 여유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깊은 내면을 보면 황폐화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적인 풍요는 누리고 있지만, 마음의 빈곤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습니다. 사랑이 점점 메말라져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고 저지르고 맙니다. 
  
얼마 전에 우리에게 들려온 안타까운 소식이 그런 우리네 세상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고등학교 3학년 아이가 자기 엄마를 부엌칼로 목을 찔러 죽였습니다. 그리고 엄마의 시신을 안방에 놔둔 채 8개월을 살았습니다. 시체 썩는 냄새가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도록 문틈에 본드를 바르기도 했고, 심지어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그 집에서 라면을 끓여먹기까지 했습니다. 
  
이 아이는 공부를 잘 했습니다. 전국에서 4천등 안에 드는 아이입니다. 학교에서는 1-2등 하는 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는 그것으로도 모자라 전교 1등이 아니라 전국 1등을 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심지어는 아들의 성적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밥을 주지 않고 굶기거나 잠을 자지 못하게 했고, 때로는 골프채와 야구방망이로 아들을 구타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아주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오늘 우리 시대의 슬픈 단면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아들의 인격이나 삶보다도 성적이 더 중요하고, 아들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이냐 하는 것보다도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게 되어버렸습니다. 

또 엄마의 잔소리와 공부하라는 성화를 참아내지 못하고 엄마를 부엌칼로 살해하고도 8개월 동안이나 집안에 방치한 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사는 아이, 엄마를 죽였다는 죄책감과 양심의 소리조차 외면찬 채 친구들을 불러들여 라면을 끓여먹는 비정상적인 인격을 가지고 사는 아이들, 이런 세상이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인 무엇인지 잊어버리고 돈과 성공이 인생의 목표처럼 되어버린 세상입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각종 범죄가 날로 늘어가고 그 수법도 지능화되어 갑니다. 정의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무엇이 선인지 생각해보지도 않고 감정이 끄는 대로 살아갑니다. 익명성이 보장된다고 해서 인터넷 등을 통해서 상대방을 모욕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사람이 죽어가는 데도 아무런 가책도 받지 않습니다.
  
교회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세상의 가치가 너무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교회가 외형과 물질에 의해서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습니다. 한국기독교를 대표한다는 한기총이 돈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말씀을 전한다는 부흥사협회가 회장이 되기 위해서 엄청난 돈을 뿌려댑니다. 정말 그들을 통해서 한국교회가 부흥될 수 있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잘못된 신앙인들이 선교의 열정이라는 명목 아래 타종교에 대한 배려 없이 안하무인격으로 설치면서 오히려 선교에 문을 막고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도 이사야처럼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십시오.” ‘이 땅에 오셔서 모든 것이 뒤틀려진 이 세상을 바꿔주옵소서.’
  
우리의 삶에도 주님이 오셔야 합니다. 아니 주님을 오시도록 초청해야 합니다. 하늘을 쪼개시고 우리의 삶에 임재하시도록 기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힘든 문제를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에는 더욱 탄원해야 합니다. “주님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시옵소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세상을 닮아가고 세상에 가치에 물들어 있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주님께서 하늘을 쪼개시고 우리 안에 오셔야 합니다. 주님이 오시는 것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오시는 것만이 우리 자신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 그래서 그것이 희망입니다. 우리 시대의 희망이고, 우리 자신의 희망입니다. 그 희망이 이뤄지기 위해서 기도하십시다. “주님, 하늘을 쪼개시고 내려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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