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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말씀이 내 혀에! (삼하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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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이 내 혀에! (삼하 23:1-7)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규정하였습니다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하는 말을 유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어떤 말을 하고 인생을 끝낼 것인가를 종종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아마도 화를 내고, 불평하고, 억울하다고 원망하면서 인생을 끝마치고 싶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고맙습니다. 즐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지켜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라고 말하며 우리의 삶을 마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늘 마음속에 불평과 원망을 가지고 살다가 어느 날 죽음 앞에 서니까 갑자기 “고맙다. 감사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 말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준비된 대로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다윗이 그의 생애를 마감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 나옵니다. 다윗은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조명하고 있었을까요?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 (사무엘하 23:1)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높이 세운 자”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 받아 왕이 된 자,” “이스라엘 사람 중에 누구보다 노래를 잘하는 자”라고 말하며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규정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0에서부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기 전에 먼저 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새의 아들인 다윗”이라는 자신에 대한 확인입니다. 이것은 족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아버지의 이름이 이새였습니다. 가문의 자랑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은 별 볼일 없던 존재, 미천한 존재, 보잘 것 없었던 존재였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새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을 미워했던 사울 왕도 요나단에게 “이놈아! 이새의 아들 다윗을 없애라! 그가 없어야 네가 왕이 될 수 있다!” 라고 말하면서 다윗을 낮춰 부른 말이 ‘이새의 아들’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스스로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 자신의 연약한 모습, 겸손한 모습으로 자기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새의 여덟 아들 중에 막내였습니다.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왕이 될 수 있는 자격과 여건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사무엘 선지자가 이새의 아들들을 초청했을 때에도 이새는 일곱 아들만 초청했고 막내아들인 다윗은 잊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아버지의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자기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고백합니다. 세 가지 수식어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높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노래를 제일 잘 하는 자로 나를 세워주셨습니다.” 이것은 음악적인 능력이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 영혼의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 차 있다는 다윗의 고백입니다.

 그는 이것 때문에 수많은 시편을 쓰며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나를 높여주신 하나님, 절망 속에서도 내 노래를 잃지 않게 하신 하나님. 그것은 자신이 0에서부터 시작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감사의 기도를 할 수 있을까요? 많이 가진 자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높이 올라간 자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인생의 시작이 0이었다는 사실, 나는 바닥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감사의 기도를 할 때마다 자신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I am noting." 어쩌면 과거로 얘기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본래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이것이 확인될 때 내게 주어진 모든 삶이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한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을 받았던 대표적인 성경의 인물인 욥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욥이 어떻게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요? 40장 이상의 욥기 속에서 욥은 1장부터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먼저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욥기 1:21)

그는 자신이 본래 무(無)에서부터 시작했다고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난을 받으면서 하나님께 대들기도 하고, 항의하기도 하고, 불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근본 사상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본래 벌거벗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벌거벗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내게 주신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것을 가져가셔도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나는 내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뿐입니다.” 이러한 의식이 욥으로 하여금 인생의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나가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이 말은 인생에 땀과 수고가 없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가 막힌 웅덩이와 고난의 자리를 경험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눈물과 탄식의 골짜기에 전혀 들어가 보지 못했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 모든 것들을 다 지나왔지만, 아니 지금도 그 속에 있지만, 이만큼 살게 해주신 하나님, 이만큼의 건강을 주신 하나님, 이만큼 먹고 마실 것을 주신 하나님, 이만큼의 인간관계속에서 나를 인도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주권과 섭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사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모습이 바로 오늘 다윗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향해서 질문하십시오

다윗은 하나님에 의해서 자기를 규정한 후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를 얘기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사무엘하 23:2)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삶이 함께 묶여져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말씀의 사건이 자기의 삶에 일어났던 하나님의 영의 사건의 현장이라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늘이 성서 주일이라는 생각을 다시 해봅니다. 어떻게 우리가 말씀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가 다윗처럼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고, 하나님의 영이 나와 함께 동행 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저는 설교자로서 이 말씀이 다시 제게 부딪쳐왔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도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저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신앙의 기쁨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저는 본래 질문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질문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신앙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그러했습니다. 

어떤 때는 질문하는 것이 두렵지만 질문하는 것이 소중하다고 여겼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하나님께 내 실존과 생명을 드려도 괜찮은지, 그리고 성경말씀이 인간의 말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게 다가오는지를 끊임없이 물었습니다. 

어느 날 제 자신에게 스스로 명령했습니다. 질문을 마음껏 퍼부어라. 모든 의심과 호기심을 갖고 성경에 대해서 질문해라. 그리고 성경의 내용이 정말 사실인지 성경을 파헤치고 필요하면 공격해라. 그런 마음을 스스로 먹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여러 사건들은 질문을 해야 대답을 해줍니다. 질문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은 성숙의 과정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것을 깨닫는 삶의 길이 바로 질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다 두 번째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성경에 대해서 질문하면 성경이 저를 그냥 놔두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거꾸로 내게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나한테 질문하는 너는 도대체 누구냐고 성경이 제게 말했습니다. 성경을 향한 나의 질문과 나를 향한 성경의 질문이 충돌했습니다. 대답과 대답이 갈등을 겪으면서 서로 부딪쳐나갔습니다. 그러면서 놀랍게도 성경 속에 나보다 먼저 질문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보다 더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자했던 인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공감의 영역이 넓어졌습니다. ‘아, 하나님의 사람들도 그 속에 아픔을 갖고 때로는 고통 받고 갈등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질문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구나.’ 그러면서 성경과 가까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과일 중에 수박을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여름철에 수박이 익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수박을 두드려봅니다. 때로는 꼭지를 살펴봅니다. 그러나 정말 이 수박이 맛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칼을 가지고 와서 가운데를 쫙 갈라야합니다. 그리고 빨갛게 익은 수박을 입에 대고 와작와작 씹어서 먹어봐야 이 수박이 정말로 맛있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 말씀이 무엇입니까? 까만 것은 글자요 하얀 것은 여백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보통 책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씹어 먹고, 내 것으로 소화하면 이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음악의 악보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콩나물 머리 같은 것이 그려져 있습니다. 열심히 음악 공부를 한 사람만이 그 악보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악보는 그림일 뿐입니다. 악보에 맞추어 연주가가 자기의 악기로 그것을 연주해야 음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마추어처럼 음만 맞추어서는 감동이 되지 않습니다. 그 음악에 악보를 쓴 작곡자의 영혼의 그 깊이 속에 함께 공감이 되어야 살아있는 음악, 그 음악이 남에게 감동을 주는 음악으로 변하고 성숙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말씀은 살아있는 능력입니다. 생명력입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지혜를 가지고 있는 보고와도 같은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말씀 속에 들어가고, 말씀을 쓴 저자와 같은 마음이 되어서 말씀이 내 속에 살아 움직이는 것을 경험할 때, 말씀이 우리를 향해서 다가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경탄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노래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세 번째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내 생각보다 더 큰 생각이 말씀 속에 있구나. 내 지혜보다 더 위대한 하늘의 지혜가 담겨있구나.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신비한 세계가 열려있구나!’ 이것은 단순한 질문과 호기심을 뛰어넘습니다. 이것은 경외감입니다. 놀라움입니다. 경탄입니다. 성경 속에 이런 비밀의 세계가 담겨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고 다시 이 세상을 보면 이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고 멋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떠오르는 태양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를 경험하면서 가슴이 뛰고 울렁이는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을 읽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마치 어두운 터널 속에 갇혀 있다가 그 터널을 벗어나서 높이 떠오르는 찬란한 햇살을 보는 기쁨과도 같은 경험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성경을 자기의 삶으로 끌어들였던 하나님의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단계로 넘어갑니다. 성경에 놀람과 경탄을 통해서 누구를 발견하게 될까요? 살아계신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위대하신 창조주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부르는 것이 노래입니다. 그때 부르는 것이 찬양입니다. 그때 부르는 것이 시편의 수많은 노래들입니다. 누구도 이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노래를 잘 부르는 자.” 다윗의 생이 그렇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노래를 불렀습니다. 깊은 구덩이 같은 곳에 빠졌는데도 노래를 불렀습니다. 편안할 때는 더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드렸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사무엘하 23:2)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을 그가 매일매일 경험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삶이 어쩌다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이요, 하나님께서 만드신 축복인 것을 그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 함께 계시고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내 인생을 이끌었다는 고백하면서 그는 하나님 앞에 마지막 말씀을 유언처럼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말씀을 읽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어떤 노래를 부를까요?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가 얼마만큼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들에게 권면해드립니다. 다시 성경책을 펴서 읽기 시작하십시오. 선반위에 얹어놔서 먼지가 쌓이도록 두지 마십시오. 다시 말씀을 읽어야 우리의 삶에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때로는 혼자 읽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큐티책이 나왔을 때 한번 구입해보라고 말씀드리는 것도 성경말씀을 매일 읽으라는 말씀입니다. 

소망교회의 영성이 어디 있을까요? 주일예배의 영성이 소망교회의 영성입니다. 또 소망교회의 영성이 어디 있을까요? 새벽기도회의 영성이 소망교회의 영성입니다. 새벽에 일찍 나오기가 어렵다면 때로는 집에서 인터넷으로 새벽의 제단을 함께 쌓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의 30분씩을 하나님 앞에 드려야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밥을 먹는데 3시간 이상 쓰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의 육체는 건강해집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는 말씀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목사가 된다고 신앙이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직분을 맡으면 신앙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야만 올바른 신앙이 생깁니다. 위대했던 모든 신앙의 인물들은 성령의 사람이자 말씀의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을 놓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어있습니다. 성경을 다시 읽으셔야 합니다. 몰아서 읽는 것도 중요하지요. 

그래서 통독도 합니다만, 어떤 분은 통독 한번 하고 나면 나머지 1년간은 성경을 내려놓는 분들이 있습니다. 식사도 한꺼번에 많이 하면 위가 잘못됩니다. 그것은 어쩌다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매일 읽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D. L. 무디가 재미있는 말을 한 것이 있습니다. “성령의 도움의 역사가 없는 성경읽기는 마치 달빛아래 있는 해시계와도 같다.” 시간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오늘 읽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면 오늘부터 시작을 해야 합니다. 내일 아침부터 하겠다? 아니요. 내일은 우리에게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늘은 천사의 날이고 내일은 마귀의 날이다.”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내일부터 예배를 드리겠다고 하면 마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참 좋구나. 내일부터 시작해라.” 우리가 내일부터 기도를 시작하겠다고 하면 마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맞다. 내일부터 해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은 오직 오늘 뿐입니다. 지금 뿐입니다. 지금 즐거워하고, 지금 감사하고, 지금 말씀을 읽고, 지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역사를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통해서 말씀하시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입에 있나이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주신 이 말씀을 가슴에 품고 말씀대로 살 것을 다짐하시고, 마지막 주님 앞에 섰을 때에 “하나님, 여기까지 지켜주신 것 감사합니다. 노래하는 자가 되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말씀의 사람이 되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라고 선포할 수 있는 복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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