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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그리스도를 보기까지 (눅 2: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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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보기까지 (눅 2:25-30)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H. van Rijn)는 ‘시므온의 노래’ (Simeon in the Temple)라는 작품을 1669년, 그가 죽던 해에 그렸습니다. 그림은 시므온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렘브란트 특유의 검은 색을 배경으로 시므온은 눈이 먼 듯 거의 감겨진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이마에는 깊은 주름살이 배어있고 대머리에 흰 수염을 날리며 고뇌와 우수가 담긴 듯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마치 노년의 렘브란트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렘브란트는 청년시절에 부유하게 지냈지만 노년에는 파산 선고를 당하여 아무도 임종을 지켜보지 못할 정도로 쓸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두 아내와 자녀 여섯이 있었지만 모두 자기보다 먼저 죽는 모습을 본 비운의 화가였습니다. 그런 고뇌가 그의 얼굴 표정에 담겨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젊은 시절에도 ‘성전에 나타나심’ ‘아기 예수의 정결예식’ 이란 제목으로 시므온을 그린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는 시므온이 클로즈업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 사람 중에 하나이거나 다른 한쪽을 쳐다보고 있는 옆모습이 그려졌습니다. 전체적으로 밝은 색의 톤을 유지하고 있으며 아기 예수를 힘 있게 안고 있습니다. 그 손은 보통 손보다 더 크고 밝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젊은 시절 렘브란트가 가진 희망과 신앙을 드러내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유작이 된 ‘시므온의 노래’는 나이 들어 늙고 처연하고 고통에 찬 모습의 시므온이 그려졌습니다. 아기 예수보다 시므온이 주인공이 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을 통해 인생의 깊이와 신앙의 신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육신의 눈이 멀고 나서야 비로소 영혼의 눈이 뜨인 깨달음을 시므온의 얼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림 속 아기 예수는 눈멀고 주름진 시므온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곳에 빛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므온은 아기예수를 두 손으로 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떠받들고 있습니다. 

그 손 또한 어두운 색으로 검은 색 배경과 구분이 가지 않지만 매우 거칠고 뼈마디가 돋아 있습니다. 삶과 죽음의 모습이 교차되고 있지만 그것은 분명 희망입니다. 육신은 늙고 눈은 보이지 않지만 떠받든 손 안에 아기 예수라는 희망이 들려 있습니다. 이제 그 인생을 평안히 놓아주시기를 간구하는 노인의 모습이 리얼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평생을 무명으로 산다 해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쓰임 받는다면 인생은 존귀할 것입니다. 시므온은 성령께서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는 한 마디 부르심에 그의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품에 안겨 성전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를 모두 몰라보았으나 시므온만큼은 이스라엘의 위로자로, 만민의 구원자로, 이방의 빛으로 증언하며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부르심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부르심을 깨닫고 인생을 걸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가치는 사명을 감당하는 자리에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시므온처럼 주 그리스도를 보기까지,  

첫째로 경건하리라

로마 바티칸 궁전에 ‘피에타(Pieta)’라는 조각상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무릎에 안고 비탄에 잠겨 있는 모습인데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슴이 저미는 아픔과 성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작품입니다. 이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탁을 받고 3년간에 걸쳐 조각한 것입니다. 피에타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교황과 추기경들과 귀족들이 피에타상 제막식에 모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피에타 상에 압도 되고 말았습니다. 교황은 “미켈란젤로, 당신은 정말로 위대한 예술가요” 라고 치하했습니다. 

그러자 미켈란젤로가 대답합니다. “교황 성하, 피에타상은 제가 조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만 신이 이미 대리석 덩어리 안에 만들어 놓으신 피에타상이 밖으로 드러나도록 곁에 붙은 부스러기를 제거했을 뿐입니다.” 경건이 무엇입니까? 온갖 죄와 탐욕으로 얼룩진 모습을 다듬어 내면의 깊은 곳에 담아 두신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경건하지 못한 마음에는 탄생하신 예수를 모셔 들일 수 없습니다.

본문 25절입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시므온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고 경건한 자였습니다. 여기의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는 정직한 모습을 의미합니다. 시므온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 공의와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경건은 하나님께 헌신된 모습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기기에 순종하며 삽니다. 시므온은 사람에게는 의롭고 하나님께는 경건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죄와 불의를 두려워하는 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므온에게 눈으로 메시아를 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시므온은 오로지 이 약속을 붙들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민족의 구원이 올 것이라는 소망도 가졌습니다. 

비록 현실이 어렵고 힘들었지만 메시아가 오시면 절망이 떠나가고 소망이 넘치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마침내 약속대로 그는 죽기 전에 예수를 만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의롭고 경건한 마음이 되어 성탄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를 만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기다리리라

바실레이아 슈링크 (Basilea Schlink)의 저서 ‘사랑의 승리(The Victorious Love)’ 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중국에서 공산주의 혁명으로 핍박이 많을 때 장로님이 끌려갔습니다. 예수를 부인하고 전도를 중단하면 살려주겠다고 하였지만 듣지 않자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심한 매를 맞았습니다. 어느 날 영문도 모르게 석방이 되었습니다. 교회로 돌아왔더니 교인들이 영접하고 반가워하면서 온몸에 낭자한 피를 닦아주는데 놀랍게도 상처 하나 없고 거짓말처럼 깨끗한 것입니다. 모두 어찌된 일이냐며 놀라워하니까 장로님은 매를 맞을 때마다 스데반을 생각했다고 웃으며 말합니다.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었다면서요?” 계속 스데반을 사모하다보니까 자신도 모르게 천사의 얼굴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석방이 된 것입니다. 신비로워 석방을 해준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그렇게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갈 때마다 예수께서 나타나 상처난 자리를 만져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마음에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하십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는 것은 사모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림의 내용이 증거로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본문 25절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시므온이 경건한 삶을 살게 된 동기는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그가 받은 약속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시므온은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은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시므온은 세상적인 것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형통함이나 개인적 행복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이스라엘 위에 임하시기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로해주실 그 날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위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실 날을 간절히 사모하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시므온처럼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시므온이 기다린 위로는 바로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죄 중에 버려진 자의 구원과 고난당하는 자들을 위로해 주시기 위한 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마음에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이 임할 것입니다.
 
셋째로 충만하리라

존 하이드(John Hyde)가 선교를 위하여 배를 타고 인도로 항해할 때였습니다. 젊어서부터 위대한 선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그것은 야망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으로 잘 포장되었지만 밑바닥에는 자아 만족과 명예욕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한 통의 편지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친구 목사가 그에게 보낸 편지에 짤막한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존, 네가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까지 너를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을 것이야!” 그는 편지를 보고 화가 치밀어 구겨서 바닥에 던졌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까지’ 라는 말은 지금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선교사가 되기 위해 인도에 가고 있는 나는 당연히 성령 충만한데, 성령 충만 받지 못했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말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동안 분노가운데 있던 하이드는 다시 편지를 집어 들고 읽고 또 읽었습니다. 마음은 여전히 괴로웠으나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기도하면서 자신이 품었던 꿈이 이기적인 야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령 충만을 구하였습니다. 배가 항구에 도착하기 전에 성령으로 충만하고 말리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봉사하는 무명의 선교사가 되어도 좋으니 다만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달라고 구했습니다. 그의 영적 몸부림은 항해가 끝날 무렵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일을 통해 하이드는 진정으로 성령 충만한 선교사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본문 25절입니다.“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시므온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다렸습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메사아가 오면 맞이하리라며 수동적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의 기다림은 능동형이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실 것을 능동적으로 준비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았기에 가능하였습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이 떠나지 않으셨기에 소망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은 거룩한 소망으로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고 인내하고 기다립니다. 기쁨으로 자신을 경건하게 지키며 기다립니다.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전에 들어갔을 때 아기 예수가 들어오셨습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시므온의 인생에 있어 축복의 절정이었습니다. 성령이 인도하셨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였기에 메시아 예수를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던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았습니다. 

지금 가슴에 무엇을 안고 있습니까? 금번 성탄에 미움을 안고 경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를 안고 찬양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죄악을 안고 맞이해서는 더더욱 안 될 것입니다. 부디 예수 그리스도를 안고 경배하는 성탄이 되시기 바랍니다. 경건하고 의로운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한 자가 되어 아기 예수를 안고 경배하는 성탄을 맞이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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