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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약속대로 (슥 9:9, 눅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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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대로 (슥 9:9, 눅 2:3-7)
  

성경에는 많은 약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약속 가운데 가장 큰 약속은 장차 세상에 아들을 보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그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예수님의 오심을 학수고대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중에 마침내 오시리라고 약속하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본문은 그 약속 그대로 예수님이 태어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이사의 명령에 따라 호적하러 고향으로 가던 도중에 아이를 낳았다고 세세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환영해야 할 이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환영했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그럴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예수님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다고 700년 전부터 이미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그 일에 대해서 100여 번이나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 학수고대하며 기다렸습니다. 그 분이 오시기만 하면 모든 문제들이 다 풀어지고 해방 받고 자유함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로마도 물리칠 수 있고 이스라엘의 영광과 자존심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 모두가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맞이했어야 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성경 최대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의 중심은 “장차 예수를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7장에서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 낳을 것이라”고 하셨으며 53장에서는 그가 와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구약성경 전체에 메시야께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이 100여 번이나 됩니다. 그러니 마땅히 기다리고 환영했어야 합니다. 

세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모두 하나님의 배려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너희를 위하여 독생자를 보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큰 배려입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 말은 “인카네이션(Incarnation)” 하셨다는 말입니다. “인카네이션”(Incarnation)은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즉 한문으로는 “成肉身(성육신)”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선물 중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이 부분을 “하나님의 극난한 사랑”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또한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이며 인간의 값을 인정해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에는 이런 뜻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모두가 열렬히 맞이하고 환영했어야 합니다. 

네 번째 이유는 이스라엘에게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메시야가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섭리의 주역이자 주연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민족가운데 이스라엘 베들레헴 고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리라고 예언하셨고 실제로 그곳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황홀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렇기에 열광하고 환영했어야 마땅합니다. 

결정적 하자 

그런데 정작 그 예수님이 오셨을 때 사람들은 환영도 축하도 영접도 하지 않았습니다. 700여 년 동안 기다렸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세상에 오셨는데 누구도 몰랐습니다. 또한 맞이할 준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인간의 무성의 가운데 세상에 오셨습니다. 결정적 하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다음에 주님이 오실 때에도 똑같은 현상이 벌어질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다시 재림하실 때 새벽에 아무도 모르게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새벽은 모두에게 방심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앙인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 말은 잠을 자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영적으로 늘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언젠가 그 날에도 이런 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날에 둘이 함께 잠을 자다가 하나는 들림 받고 하나는 놓임 받고 둘이 함께 김을 매다가 하나는 들림 받고 하나는 놓임 받고 둘이 함께 맷돌을 돌리다 한 사람은 들림 받고 한 사람은 놓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된 메시야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다는 소식을 벌써 알고 기다렸지만 정작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무도 맞아 주는 사람이 없이 초라하게 오셨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상당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언젠가 다시 오실 그 날에도 그런 현상이 있을 것임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는 여행 중에 아이를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여행 중에 아이를 낳는 분들이 있습니다. 택시 안에서, 병원에 가는 도중에 낳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호적하러 고향으로 가던 도중에 낳았다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여관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는 여관은 있으되 아이를 낳도록 인정을 베푸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영접은커녕 냉대 속에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 냉대는 태어났을 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예수께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도 여전했습니다. 예수님은 요셉을 도와 목수 생활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 천한 직업이 어부 목수 목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저게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업신여기고 무시하고 빈정대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소년시절에 갈등과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현실과 이상의 차이에서 그리고 관심은 하늘에 있는데 몸은 세상에 있으니 얼마나 갈등과 고뇌가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한술 더 떠서 고발하고 방해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역을 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가르치는 것이 서기관들 같지 않았습니다. 능력이 있었고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찾아가 환영해야 마땅한데 사람들은 오히려 고발하고 방해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런 방해는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까지도 예수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아직도 2천 년 전에 오신 예수를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오늘 400만 명의 유대인 중에서 단지 0.1%만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합니다. 그 0.1%의 사람들도 나라 밖에서 예수를 믿고 건국 후에 귀국한 디아스포라들입니다. 오늘 이스라엘은 기독교를 유사종교 중 하나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오류를 범하는 이유

그렇다면 왜 그런 오류를 범한 것일까요? 그것은 편견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오시리라는 약속이 100여 번이나 기록되었습니다. 그것도 유대 고을베들레헴에서 나시리라고 정확하게 예언했습니다. 그랬으면 마땅히 그곳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거기에 처소를 예비하고 전체적 연구 기관이라도 세워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예언 때문에 우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면 수도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야지 어찌 시골의 작은 동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을 자의로 해석하는 우를 범하는 동시에 지독한 편견입니다. 이 편견이 무서운 것입니다. 편견은 보석을 돌이라고 하고 돌을 보석이라고 우기게 만듭니다. 이 편견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눈을 멀게 하여 예언과 계시를 무시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또한 기득권 때문입니다. 당시의 사회 지도자들은 바리새인과 제사장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기득권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내심으로 예수가 메시아인 줄 알았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의 예수의 행적과 능력, 가르침을 보고 “이는 서기관과 같지 않음이라”고 고백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와 소경, 나병환자와 죽은 자를 살아나게 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병을 고치는 사람은 메시야라고 인정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병을 수도 없이 고치고 살려냈습니다. 그런데 어찌 몰랐겠습니까? 당연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끝까지 예수를 반대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들의 기득권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사회의 지도자들이자 고소득층으로 많은 것을 누리는 기득권층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를 유지하려고 새 인물이 나타나면 누구라도 제거해야 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자신들의 안전의 심각하게 위협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결정적인 요인은 기다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이 기다림의 삶이 중요합니다.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은 성경을 매일같이 읽고 옆에 끼고 다니며 연구한 사람들입니다. 특히 당시 서기관들은 성경의 예언서를 매일 필경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오심을 누구보다 더 빨리 알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알고 사람들에게 신속하게 알렸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관심은 신앙의 삶 보다는 뇌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영적안목이 흐려졌고 그 결함은 자신은 물론이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백성들의 눈도 멀게 하고 그 시대를 보는 분별력도 잃게 만든 것입니다. 

인간은 너무 염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비장한 각오로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십자가에 제물로 삼으려 하셨습니다. 그 모두가 타락한 세상과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9장 7절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용서는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죄인 된 우리를 위해서 그 귀한 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 십자가를 너무 가볍게 생각합니다. 용서는 크든 작든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큰 대가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단지 말 한마디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어떤 부인은 남편에 죄를 짓고 그 죄를 고백할까 말까를 10년 동안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정말 어렵게 용기를 내어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뭐 그런 것 가지고 고민했느냐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습니다. 그 순간 아내는 가재도구를 집어던지며 화를 냈습니다. 

나는 10년 동안 고민하다가 고백한 것인데 그렇게 시시하게 말 몇 마디로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그 원작을 보면 초등학생 아들이 유괴되어 어느 날 시체로 발견됩니다. 범인을 잡고 보니까 아이가 다니던 학원 원장이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마음에 분노로 가득 찼습니다. 도저히 용서가 안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마음을 안정시켜 보려고 교회에 나가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교회의 여러 사람들은 용서하라고, 용서 안한다고 죽은 아이가 다 살아오겠느냐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화를 냈지만 차츰 용서할까 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큰마음 먹고 교도소에 면회를 갔습니다. 가면서 살인범을 만나면 큰마음으로 용서한다고 해야지 하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까 살인범의 얼굴이 평화로웠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나는 교도소에서 하나님을 믿고 다 용서 받았습니다.” 하더니 할렐루야를 외치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때 아이 엄마는 온 몸에서 힘이 쭉 빠졌습니다. 허무했습니다. 

그래서 면회실을 나오면서 하늘을 향하여 외치며 울부짖었습니다. “저 놈을 용서할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누가 저를 용서할 수 있단 말입니까, 누가 저를 간단히 용서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여인이 느끼는 허무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이 어머니는 그 살인범이 사형 받던 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우리는 용서를 너무 쉽게 말해 버립니다. 그러나 용서는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한 값이 따라야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세상을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십자가에서 갈기갈기 찢어 고통당하게 하여 죽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너무나 큰 대가를 치루어 용서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의 댓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하나님의 결단을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하고 부르짖을 때 그때 하나님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을까를 한번 생각 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그 때의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셨겠는가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일본의 지다구라 라는 신학자는 아픔의 신학을 말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아들의 비명소리를 듣고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예수를 보내신 데는 이런 결단과 아픔과 용단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700년 전부터 예수를 보내겠다는 소식을 전하였는데도 막상 그 예수께서 세상에 태어나셨을 때는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오신 예수를 덮으려고 예수를 죽였습니다. 당시 왕 헤롯은 왕이 태어났다고 하니까 그 왕을 죽이려고 2세 미만의 아이들 14,000명을 학살했습니다. 그러니 그 나라와 그 시대 백성들이 어떻게 복을 받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대림절은 오시리라고 예언된 메시야를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그리고 성탄절은 오신 예수를 축하하고 만나는 절기입니다. 대림절과 성탄절은 기다림과 만남이 없으면 무의미한 날입니다. 이스라엘은 한결같이 예수님 오신 날 낌새도 차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가운데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이 기다리던지 않던지 약속하신 그대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사실은 오신 예수를 가장 먼저 찾아와 만난 사람은 멀리 동방에서 예루살렘까지 찾아온 동방박사들이었습니다. 

문만 열면 만날 수 있었던 여관집 주인도 몰랐는데 그 멀리 동방 오늘의 이라크 땅에서 온 사람들이 미리 알고 찾아와 만났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동방박사들에게는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기다린 사람들에게는 한결같이 천사들이 예수 태어나심을 계시해 주었습니다. 신앙의 삶에는 거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시간도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 곳이든지 언제든지 기다림이 있는 사람에게는 영감으로 천사들이 계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기다림을 갖고 살아가야 합니다. 성탄절은 예수께서 처음으로 세상에 오신 초림의 날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오시리라고 예언하신 그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고 또 예언하고 있습니다. 분명 그 말씀대로 어느 날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도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처럼 많은 이들이 허둥댈 것입니다. 성경은 그 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대림절은 오시리라고 예언된 예수님을 기다리는 기간이고 성탄절은 오시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날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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