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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이것이 무엇이냐 (출 16: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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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무엇이냐 (출 16:11-15)

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특히 신앙의 연조가 깊은 분들, 교회 생활에 익숙한 분들일수록 갖게 되는 질문이 될텐데 다른 것이 아니라 일년을 두 번 마무리하고 새해를 두 번 맞는 것입니다. 신정, 구정 양력 음력설을 말씀드리는 것은 아니고 교회의 절기에 대한 것입니다. 

11월 말쯤 되면 교회마다 한해를 마감한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단 앞에 있는 초 하나를 밝히면서 대림절이 첫 번째 주일이 시작되고 목사님들은 이 대림절부터 교회의 새해가 시작된다고 말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한두주가 지나서 연말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또 설교단에서 무슨 소리가 들립니까? 한해를 잘 마무리하자고 합니다. 일 년을 잘 결산하고 새해를 새로운 마음으로 맞자고 합니다. 그리고 그 결정판으로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자고 합니다. 

이상합니다. 분명히 교회의 일년은 벌써 끝났다고 했는데 또 다시 아직 안끝났다고 합니다. 헛갈리기 시작합니다. 괜히 복잡하게 말하는 것만 같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다 12월 31일을 마감으로 알고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사는데 우리 기독교인들만 한 달 먼저 한해를 보냅니다. 그러면 이것이 꼭 혼란스러운 것입니까? 아닙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꼭 이 때를 통해서만 주시는 깨달음이 있는데 바로  끝이 났지만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음을 우리가 해마다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한 해를 마감했지만 아직 마감되지 않은 것, 모든 것이 끝났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것, 지나갔지만 아직 오지 않은 것, 죽었지만 죽지 않고 아직 살아 있는 것, 지금이 바로 그 때이고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한해를 마무리하는 자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실 대림절 기간 동안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기도 하지만 앞으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기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교회를 통해 이런 마음으로 이미 지나간 것과 앞으로 올 것 사이를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한 마음이 바로 이 중간에 끼인 사람들이 가져야 할 마음이었습니다. 이미 애굽에서 나와서 예전 일들을 과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목표로 삼고 전진하는 길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입니다. 지금 현실은 광야에 내던져진 것이어서 앞이 막막하지만 우리 앞에는 기름진 땅, 비가 내리면 땅에 다 스며들지 않고 땅이 비를 머금는 땅, 가축이 먹을 풀이 있는 땅, 가나안이기에 그땅이 기다린다 생각하면 지평선밖에 보이지 않는 광야도 견딜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극히 당연한 일을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평하고 원망을 합니다. 미래에 주어질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당장 힘들고 어려운 것을 말할 뿐입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한해를 마치면서 동네의 작은 가게에서부터 대기업까지 꼭 하는 일들이 무엇입니까? 정부의 많은 부처들이 꼭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 한 해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해서 기록해 놓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금을 적게 내려고 이중장부를 적어도 어딘가에는 진본을 숨겨놓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그 이유는 자기는 정확하게 기억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잘 기억하기를 원하고 옛날 일들을 되짚기를 좋아합니다. 지난 한 해동안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무엇이냐 미국에서 조사를 했더니 어떤 책이라고 합니까? 10월에 나와서 딱 두달 남짓 판 자서전입니다. 

애플이라는 회사를 만들고 경영한 스티브 잡스의 자서전이 전세계적으로 큰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딱 두달 판 책이 그 해의 어떤 책보다 많이 팔렸고, 한국에서도 초판을 무려 10만부나 찍었는데 시장에 내놓은지 몇시간 만에 다 팔려서 곧바로 8만부를 인쇄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책의 내용은 사람들이 그토록 좋아했던 애플사의 어떤 제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최첨단 컴퓨터의 미래에 관한 예언도 아닙니다. 그저 그 사람이 살아왔던 과거의 일, 옛날에 대한 기억이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았습니다. 그가 자서전을 쓴 것은 자신의 죽음을 이미 예감한 2009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직 살아있지만 더 이상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것을 깨달은 순간 그는 자기의 기억들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것이 없었습니다. 가나안이라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옮겨가야 하는데 옮겨가는 사람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애굽이라는 과거와 가나안이라는 미래 사이에서 반드시 옛일들을 기억해야 새로운 땅에 들어갈 준비가 되는 것인데 그것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그 입에서 감사가 아니라 불평이 터져 나옵니다. 

여러분 받은 은혜에 대해서 기억하지 못하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은 감사가 그치게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감사가 그친 인생에서는 감격도 사라지고 맙니다. 감격이 사라진 인생이 무슨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입에서 거친 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2절에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합니다. 기억이 희미해지니까 감사가 그치고 그러자 그들의 입에서 찬양이 아니라 원망이 시작됩니다. 어느 누구 하나 할 것도 없이 “온 회중”이라고 합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가 다 마음에 불만이 가득합니다. 이렇게 한 목소리로 불만을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어린 아이들대로 관심사가 다르고 좋아하는 것이 다르지요. 어른은 어른대로 다르고, 여자와 남자가 또 관심사가 다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지금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가 불만입니다.  

우리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급해서 기도해놓고 하나님이 들어주시면 “하나님 도우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바로 자기 입으로 이렇게 감사기도 해놓고 그 다음날 딴소리를 합니다. 원망을 합니다. 성격만 급한 것이 아니라 잊어버리는 것도 급하게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면 우리가 다 배은망덕하기로 작심하고 기억을 못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나이가 들면들수록 또 여러 가지 일이 복잡하게 몰려오면 잘 잊어버리게 됩니다. 내가 어떤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가 낭패를 경험하고 나서 그때를 기억하면서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이 조금씩 이해가 됩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성경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것을 잊어버리느냐, 하나님이 해주신 그 크고 놀라운 이적들을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느냐, 해를 멈추시고, 바다를 가르시고 여러 가지 징조를 보여주신 것들을 이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있느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사람의 기억력이라는 것이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구나 생각을 하니 이해가 됩니다. 

게다가 얼마전 뉴스를 보니까 결정적으로 아 그럴 수도 있겠다하는 연구 결과가 있었는데 전혀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면 사람이 이전 것을 기억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도 문지방 효과 때문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말하는가 봤더니 사람의 머리라는 것이 여기 있다가 다른 곳으로 가면 여기서 봤었던 것, 경험했던 것은 자연스럽게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방에 있다가 저쪽 방으로 옮겨가면 방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이쪽에서의 기억은 자동으로 지워지고 저쪽 것만 생각을 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이 기사를 읽고 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전까지 살던 땅에서 광야라는 새로운 공간으로 홍해라는 또 출애굽이라는 큰 문지방을 넘어섰기 때문에 이전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이 됩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이해가 됩니다. 문지방 이론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의 감격을 잊고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에게 불평을 하고 불만을 합니다. 

어디 오늘 본문뿐이겠습니까? 본문 앞과 뒤에서 물이 있다 없다, 물이 쓰다 달다 먹을 것이 있다 없다 도무지 감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불평과 불만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먼저 드는 생각이 그래도 조금 위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 사람들도 환경이 험악해 지니까 어쩔 수 없이 이리 되는구나, 그래 사람은 다 그런 것이지. 환경이 좋아지면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겠지. 그래 형편이 조금 나아지면 다시 내 마음속에 감사가 생겨나겠지. 스스로 위로를 합니다. 

그러나 그렇습니까? 상황이 바뀌면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감사하게 되겠습니까?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로 문지방을 넘어선 효과 때문에 과거를 어쩔 수 없이 잊어버린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억력이 멀쩡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매우 생생하게 과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말합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이 소리를 지릅니다. 

3절입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모세와 아론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밥도 못먹고 굶어 죽게 하는구나.” 

이상합니다. 똑같은 기억이고 한 인간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예전에 풍족했던 기억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도 주위에서 많이 목격하지 않습니까? 사업하다 부도가 나서 집안의 형편이 어려워졌을 때 옛날에 풍족하게 살던 기억은 잊어버려야 지금 고된 형편을 이겨나가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텐데 오히려 예전의 좋았던 기억만 납니다. 광야에서의 생활이 고되니 예전에 넉넉했던 생활은 잊어버리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상황인데 내 몸이 편했던 기억에 대해서는 문지방 효과가 안보입니다. 오히려 더 생생하게 과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애굽에서의 생활보다 더욱 뚜렷하게 남아있어야 할 가장 최근의 기억, 불과 한달 여 남짓의 기억, 하나님께서 온갖 증거들과 바다를 가르는 이적으로 자신들을 구해주신 사건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 점입니다. 며칠 전의 기억인 쓴 물을 바꿔서 단물로 바꿔주신 일에 대해서도 함구합니다.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니 기억하지 않습니다. 

아하 이것이 인간의 기억이구나. 감사해야 할 것은 쉽게 잊어버리고 반대로 내게 유리한 것을 말할 때는 과거의 것들을 다 동원하는구나. 내 권리를 주장할 때는 사사건건이 세세한 것까지 끄집어 내서 되뇌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구나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를 우리 머릿속의 앞뒤가 맞지 않는 것들을 통해서 드러내십니다.

이런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하십니다. 우리와 달리 과거를 기억하심을 통해서 우리를 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 메추라기와 만나를 준비해서 먹이시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백성들을 이리도 사랑하십니까? 지으신 것을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우리의 살과 영혼을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의 사정과 형편에 관심하십니다. 

여러분 이 은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인간의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만나를 본 백성들이 뭐라고 합니까? “만후” “이것이 무엇이냐?” “만나”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라고 합니다.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그 외침을 통해서 자동적으로 엿보게 합니다. 

도대체 근원을 알 수 없는 보살핌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눈으로 보고도 알 수 없는 것이 만나입니다. 그러나 그 알 수 없는 것이 결국 그들을 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시작을 알 수 없는 은혜가 우리를 살립니다. 그리고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사랑이 앞으로도 우리를 살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에 관한 것을 기억하시는데 지난 한해를 돌이켜 보면 그동안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지나갑니다. 하나님은 실컷 주셨는데 우리는 그것이 만나인지도 모르고 삽니다. 이러니 감사가 나올 수 있습니까? 그저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서 잘 먹어놓고도 어디에서 그것이 왔는지 모르고 지나갑니다. 

그래서 은혜가 은혜로 깨달아지는 것은 만나를 단순한 먹을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표식이라고 생각할 때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주셨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고개를 숙여서 만나를 쳐다보지 않습니다. 이걸 어떻게 먹어야 하나? 이걸로 무엇을 요리해야 하나? 오늘은 얼마나 걷어가야 하나?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하늘로 올리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농사면 땅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나는 내가 노력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내 땀이 들어가서 나오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하늘을 보면서 만나가 내려온 길을 눈으로 쭉 따라 그려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신앙의 자격이 있는 사람의 모습인 것을 만나를 주시고 거두게 하심으로 분별하십니다. 세상 자격은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기 마련이지만 하나님에 관해서는 특별한 힘과 권능이 필요 없습니다. 재능이 없어도 됩니다. 그저 하늘을 보면서 만나가 내려온 길을 기억해내면 됩니다. 

이 하나님의 기억하시는 사랑과 더불어 또 하나의 특징이 만나를 주신 일에서 드러나는데 바로 하나님이 자기를 부인하셨다는 것입니다. 법을 집행하는 경찰이나 국회의원이 자기를 부인하면 부정부패와 연결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스스로 만드신 법을 어기시면 인간에게 은혜가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시기 위해서 스스로 세우신 법, 또 자신의 뜻을 스스로 어기셨습니다. 어떻게 그러하셨습니까? 심은대로 거둔다는 원칙을 하나님이 스스로 어기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께서 매일 먹이셨습니다. 광야에 가득한 만나를 거두는 것 고작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이 그것인데 거두는 것은 일이 아닙니다. 일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순수하게 값없이 부어주시는 은혜였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가능했습니다. 은혜가 내리는 곳에 있었던 것 단 한가지 이유만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가라 하신 땅에 하나님과 함께 서 있으면 그 자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임하는 장소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지만 새롭게 시작되는 장소가 바로 그곳입니다. 모든 것이 말라죽고, 생기있는 것들이 부석부석해지는 거친 땅이 사람을 살리는 생기 있는 땅이 되는 비결, 죽음의 장소가 살아나는 비밀, 말라 비틀어지는 것이 탱탱하게 영양과 수분이 올라오는 놀라움이 거기에 있습니다. 광야의 모래마저도 은혜로 덮으시는 만나의 복을 누리는 비밀이 거기에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인간들을 돌보십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서야합니다. 광야같은 우리 앞의 문제들을끌고 이리저리 다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라하신 곳에서 서야 하고 그때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런 신실하심을 의지하라 하십니다. 그것을 받아먹는 사람들마저 이것이 무엇이냐 어리둥절할 정도로 강권적으로 역사하셨고 개입하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왜 동일하게 역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인간들은 잊어버리지만 일해야 먹는다는 원리마저 스스로 깨시고 극단적으로 일하신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서, 우리 가정에서 저마다의 자리에서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하루하루 성실하게 감당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왜 만나를 공급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또 한가지 하나님 은혜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반대로 기억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하실 것이 하나 없으십니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일부러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스스로의 능력을 부인하시는 또 하나의 자기부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가 보려고 일일이 점검하시면 우리 중에 살아남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얼마나 우리가 선하게 사는가 따지시려고 들면 아침에 눈 뜨자마자 걸리지 않을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두가지 경우에만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스스로 우리 과거를 기억하시지 않으시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죄보다 훨씬 크실 때입니다. 이 두 가지가 없으면 광야에 만나가 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기부정은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인간은 유리한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기억력을 자기 마음대로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조종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을 베푸시기 위해서 기억하시는 능력을 잠시 멈추십니다. 보십시오. 양식을 내리시기로 마음먹으시고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4절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겠다. 백성이 나가서 날마다 먹게하겠다” 이 말씀만 하십니다. 무엇을 언급하지 않으십니까? 이 백성들이 과거에 어떠했는데 지금 이렇게 변하였다 책망하는 말씀이 오늘 본문에는 없습니다. 이 백성들이 심성이 고약하고 잊기를 잘하는 백성들이다 서운해 하시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저 담담하게 모세에게 이 백성을 먹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78편 역시 하나님이 과거를 기억하지 않으심을 말합니다. 그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심히 배불렀다고 증언하면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그들의 원대로 그들에게 주셨다고만 노래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이들의 불평과 불만을 기억하지 않으시고 필요대로 원하는대로 공급해주셨습니다.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구원하심과 돌보심이, 또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기억하심에서 시작되었고 망각하심, 기억하지 아니하심이 결과가 되어서 우리에게 임하였습니다. 이 사랑과 풍족히 내려주시는 비밀을 알고 깨닫는다면 억지로 감사하십시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감사하게 될텐데 그 이유는 이전에는 못보던 것을 비로소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나로 땅을 덮으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는 사람의 눈에는 지금 비록 광야에 먼지 바람만 일고 있어도 그곳에서 내일 아침에 내릴 은혜가 펼쳐지게 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내 눈을 의지하지 않고 곧 있을 풍성한 허락하심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의 눈에 만나, 이것이 무엇이냐하는 질문은 더 이상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것이 무엇이기에 우리에게 내리게 되었나. 이것이 도대체 어떤 사랑이냐 하나님에 대해 더 알기 원하는 희망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매일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만나를 기대하며 살지만 하나님은 만나가 내 육신의 건강만을 지키기 원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것을 통해서 이 가운데 시간, 끝이 났지만 끝나지 않고 마지막이지만 새로운 미래가 기다리는 이때를 분별할 지혜를 갖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어떤 지혜인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데 먼저는 만나가 하나님의 은혜를 분별하는 표지가 됩니다. 어떤 일이 내게 일어났을 때 그것이 왜 내게 일어났는지 만나를 기억하면서 생각나게 하십니다. 

잘 아는 목사님이 바로 이달 12월 초 어느 아침에 경험한 일이라고 합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쯤이 되어 반쯤 잠이 깨는 상태인데 머리 위가 묵직하더랍니다. 뭔가 하고 봤더니 사모님이 머리에 안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일찍 일어나서 잘 단장하고 안수를 하는 것이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그것이 아니고 사모님이 잠든 상태에서 팔을 뻗은 것이 그만 그 목사님 머리에 딱 얹어졌던 것입니다. 

처음 생각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려고 했는데 꼭 목사안수 받을 때처럼 손이 얹어져서 아니다, 사모님이 잠결에서도 나를 축복하는 모양이다 마침 새로운 달이기도 한데 나에게 하나님이 무슨 복을 주시나 오늘 한번 헤아려 보자 그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데 정말로 좋은 일들이 생깁니다. 막혔던 자녀의 문제가 풀렸습니다. 이런 저런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습니다. 정말 안수가 축복의 안수가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정말 모든 일이 척척 풀렸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실수해서 물건을 떨어뜨리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속상한 일도 생기고 그 또 다른 염려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일어나는 일들마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모든 것이 복이라는 생각이 도저히 들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난 다음에 목사님이 깨닫기를 잠결에 머리에 얹어진 손으로 인해서 복을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모든 일을 분별하기 시작한 점이 특별한 은혜임을 깨달았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날 그 아침의 일이 있고 나서부터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그냥 대수롭게 흘려버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떤 작은 일이라도 그것이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냐, 아니면 내 힘과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냐,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겠느냐 아니면 시험과 연단이겠느냐 끊임없이 분별하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니까 작은 것에도 감사가 나오고 예전에 받은 은혜가 지금 결실을 맺는 그 과정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만나가 내린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불평하고 불만하고 다른 은혜를 구하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그 은혜를 갈구하는 이스라엘인들이었다면 아침마다 내리는 만나를 보며 이것이 무엇이냐, 이 은혜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렇게 부족하고 어리석은 우리에게 이것을 허락하시는가 매순간 확인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당연하게 주어지는 작은 것들이라도 이것이 무엇이냐, 왜 나에게 이것이 주어졌느냐,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셨던 것을 되뇌이게 된다면,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가르침과 말씀들을 생각해내게 된다면 예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풍성한 생명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며 새로운 해를 맞을 수 있게 됨을 만나를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만나는 동시에 어둠을 이겨내는 생명의 빛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생명의 떡(요6:48)이라고 하셨습니다. 누구에게나 내리는 만나처럼 예수님도 누구에게나 하늘의 생명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생명이 없고 어두움과 슬픔만이 이 땅에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이 그러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베들레헴은 벧과 레헴 집과 빵 한마디로 빵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님이 태어나실 곳으로 예언되어있던 곳입니다. 그런데 구약 미가 선지자는 다른 이름을 말하지 않습니까?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합니다.(미 5:2) 

베들레헴의 옛이름이 에브라다라는 말인데 창세기는 이 땅이 기쁨대신 슬픔과 어두움이 가득한 땅이었음을 증언합니다. 창세기 35장에 나오는 에브랏이 에브라다인데 그곳은 야곱이 사랑하던 부인 라헬이 아들 베냐민을 낳다가 숨을 거둔 장소입니다. 그래서 베냐민의 이름은 베노니, 내 슬픔의 아들이지 않습니까? 어렵게 낳은 아들에게 미처 젖도 물려보지 못하고 생명이 끊어질 즈음 의식이 희미한 가운데 이 엄마가 얼마나 울며 이야기했으면 이름이 슬픔의 아들이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바로 이곳에 아기로 오셨습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네 개의 초에 다 불이 붙었고 마지막 하나의 초, 예수님의 초만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슬픔의 땅, 아픔의 땅, 죽음의 땅에 오셨을 때 비로소 참된 생명의 떡, 먹으면 죽음이 아니라 소망과 생기를 얻는 떡의 마을이 그 이름의 의미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두움이 아직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 슬픔이 바뀌어서 기쁨이 되는데 우리가 성탄절 이맘 때 자주 부르는 109장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찬송의 가사도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가사가 어떻게 됩니까?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입니다. 그 뒤에 두장을 넘기면 있는 112장은 그 맑고 환한 밤중이라고 했는데 109장은 어둠에 묻혀 있다고 합니다. 

똑같이 예수님이 나신 밤인데 왜 어디에는 어둠이 가득하다고 하고 어디에는 맑고 환하다고 합니까? 이유는 번역하는 과정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곡이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된 미국의 찬송가 가사는 어둠에 묻힌 밤이 아니라 all is bright 모든 것이 밝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슬픔의 땅 에브라다는 더 이상 슬픔의 땅 에브라다가 아니고 생명의 고장, 빵의 고장이 되었습니다. 어둠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초처럼 자기 몸을 태우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물러갔습니다. 그래서 만나가 떨어져있는 땅만 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 계획과 사랑을 깨닫기 어렵지만 만나가 내려오는 하늘을 보는 사람은 징조를 읽게 되고 빛으로 인도하는 하늘의 별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어둠을 이겨내게 됩니다. 베들레헴을 에브라다라고 부른 미가가 이런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가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하면서 현재의 이름 베들레헴을 말하지만 과거의 에브라다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만 보는 것도 아니고 과거에만 얽매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무엇을 예언했습니까?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미 5:2) 앞으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미가 뿐만이 아닙니다. 어둠에 있는 사람들이 고통으로 고개를 떨구기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들어서 하늘을 봐야 한다는 것을 일본의 억압 아래 있었던 윤동주 시인이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하나의 시에 동시에 담아냈습니다. 별헤는 밤이 그렇습니다. 쉽게 쓰여진 시도 그렇습니다. 서시도 그렇습니다. 자기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온 민족이 어둠에 갇혀 있을 때 시인은 하늘을 봤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괴로워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과거를 보고 미래를 본 사람이 현실에 낙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게 됩니다. 비록 해방을 6개월 남겨놓고 감옥에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지만 그의 시와 정신을 일본사람들마저 기리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별을 보여주셨듯이 시인에게도 별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듯이 윤동주시인도 장로님의 할아버지와 신앙 있는 집안의 영향 아래서 태어났고 자라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별을 보여주시며 상상하지 못한 세계를 준비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도 불쌍히 여기셔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을 가진 시인을 보내주셨고 우리를 하나님 섬기는 백성으로 키우실 하나님의 계획을 준비하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암울한 날들이 이어질지라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별이 그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빛을 따라 살지 않고 밤을 살아가려면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됩니다. 별을 바라보지도 기억하지도 않는다면 양심도 거룩함도 다 버리고 내 생각대로 살아도 됩니다. 그러나 하늘에 별이 있기에 어두운 밤을 따라 살려고 하지 않고 별을 노래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를 기대하십니다. 만나를 보면서 과거를 기억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별을 보면서 어둠을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다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광야가, 황무지가 하나님의 비전으로 변화되고 채워지고 그곳에 하나님의 집이 세워지는 모든 과정을 두 눈으로 똑똑이 목격한 증인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과거는 기억하지 않으시고 이 땅에 은혜로 부으시는 것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내일도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에브라다가 베들레헴이 되는 기쁨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그때에 만후, 이것이 무엇이냐? 어디에서 온 것이냐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만후, 도대체 이 은혜가 어떻게 내게 임하는 것이냐 이것이 무슨 은혜이냐 고백하게 되시기를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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