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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꿈 너머의 꿈 (창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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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너머의 꿈 (창 12:1-9)
   
일본 사람들이 관상어로 기르는 ‘코이’라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이 비단 잉어는 삶이 아주 독특하다고 합니다. 작은 어항에 넣어 키우면 5-8cm를 자란다고 합니다. 커다란 수족관에 넣어 두면 15-25cm 정도 자라지만 강물에 넣어 두면 90-120cm까지 성장한다고 합니다. 사는 환경이 자신의 몸 크기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사람도 비전의 크기와 내용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비전이 크면 큰 사람이 될 수 있고, 비전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으며, 비전이 거룩하면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장래를 내다보고 꿈꾸는 비전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힘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이끌어 가는 힘이 있습니다. 

제가 ‘꿈 너머의 꿈’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묵상하며 3주간 말씀은 나누고 있습니다. 제가 묵상한 꿈 너머의 꿈에 대해 예를 들어 보면 의사가 되기를 원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의사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꿈 너머의 꿈’은 의사가 되는데 어떤 의사가 되기를 원하느냐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버는 의사, 최고 의술의 의사,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의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의사, 선교를 하기 원하는 의사, 등이 있습니다. 의사가 되는 꿈만을 꾸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사가 되기를 원하는지 꿈 너머의 꿈을 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학교를 들어가는 학생들은 모두가 목사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그런데 목사도 어떤 목사가 되기 원하는가 ‘설교를 잘 하는 목사, 큰 교회를 이끄는 목사,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목사, 돈을 사랑하는 목사, 총회장이 되고자 하는 목사’ 목사가 되는 꿈이 아닌 어떤 목사가 되기를 원하는지 꿈 너머의 꿈을 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장로가 되는 것이 꿈인 신앙인이 있습니다. 아주 귀한 꿈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장로가 되기를 원하는지 ‘꿈 너머의 꿈’이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되는 것은 결혼 한 후에 자녀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아버지, 어머니가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아버지, 어머니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어떤 아버지, 어머니가 되고자 하는 ‘꿈 너머의 꿈’이 없으면 부모로서의 선한 영향력을 갖지를 못합니다. 교육의 목표는 꿈이 아닌 꿈 너머의 꿈을 꾸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교육의 목표입니다. 

단순히 사회와 기업에서 원하는 숙련된 기능인을 만드는 것이 교육이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을 만드는 것이 교육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교육은 단지 무엇이 되느냐에만 관심을 갖고 있으니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꿈 너머의 꿈’을 꾸었던 믿음의 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요셉이라는 사람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열 두 아들 가운데 열한 번째 아들입니다. 요셉은 야곱이 끔찍하게 사랑했던 아내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입니다. 아버지 야곱은 다른 아들들 보다 요셉을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그것을 이복형제들이 시기하며 미워했습니다. 

요셉이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곡식 단들이 있는데 요셉, 자신의 곡식 단을 향해 형제들의 단이 둘러서서 절을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 꿈을 형제들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미워 죽겠는데 그런 꿈 이야기를 하니 형들이 동생 요셉을 더 미워했습니다. 어느 날 형들이 들판에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요셉더러 형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라고 했습니다. 형제들은 요셉이 자신들에게 오는 것을 보고 죽이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형 유다가 죽이지 말고 미디안 상인에게 팔아 넘기자고 제안했고 그들은 요셉을 미디안 상인에게 팔았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 의해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애굽의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종노릇을 했습니다. 보디발 장군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재산을 다 관리하게 되었지만 음란한 보디발 장군 아내의 유혹과 누명으로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감옥에서도 간수에게 인정을 받아 다른 사람들을 섬기게 됩니다. 그곳에서 요셉은 바로 왕의 신하들을 만나게 되고 그 신하들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훗날 바로 왕이 이상한 꿈을 꾸게 되는데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하자 요셉이 꿈을 해석해 준 그 신하의 중재로  바로 왕에게 불려가 바로 왕이 꾼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바로 왕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워 앞으로 닥칠 가뭄을 해결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전 세계에 심한 가뭄이 닥쳤습니다. 가나안 땅에 있던 요셉의 형제들이 곡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왔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총리인 요셉에게 절을 하며 곡식을 팔라고 요청합니다. 그들은 애굽의 총리가 자신들이 판 동생 요셉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나중에 형제들은 애굽의 총리가 자신들이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았던 요셉이라는 사실을 알고 두려워 떱니다. 

그때 요셉은 형제들에게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먼저 이곳으로 보냈습니다. 아직도 5년 동안 흉년이 이어질 것인데 하나님께서 아버님과 형님들,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이곳으로 보내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셨습니다. 고향에 올라가 아버님과 모든 가족들을 이곳으로 데리고 오십시오. 제가 아버지와 형님들과 자녀들 모두를 부족함이 없이 잘 모시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요셉의 곡식 단을 향해 형제들의 곡식 단이 절을 하는 꿈을 생각할 때 요셉이 성공해서 높아지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것도 맞습니다만 더 중요한 것은 요셉이 꾸었던 꿈의 내용이 곡식 단이었다는 것과 심한 기근으로 인해 곡식을 얻기 위해 애굽을 찾은 형제들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요셉의 꿈을 생각하면서 우리들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높은 자리에 있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요셉의 꿈의 내용은 애굽의 총리가 되는 성공하는 꿈이 목표가 아니라 그 꿈 너머에 있는 꿈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기근에서 구원하는 것이고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큰 복의 근원이 되는 꿈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요셉의 꿈에서 총리가 되는 꿈에 머물렀다면 요셉은 꿈 너머의 꿈을 꾸었고 그것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 높은 자리에 올라 성공한 삶을 꿈으로 간직하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창세기 50장에 나오는 그런 유언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50장 24-26절의 말씀을 읽어봅시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 하였더라’ 요셉은 애굽을 위기에서 건진 총리였기에 애굽의 역사에 두고두고 이름을 새길 수 있는 훌륭한 총리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명성과 성공에 꿈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의 꿈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되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라는 꿈은 애굽에서 성공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즉 자신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일에 쓰임 받는 꿈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3장 19절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올 때 그는 요셉의 유언을 잊지 않고 요셉의 유골을 챙겨 애굽을 떠납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더라’ ‘단단히 맹세하게 하였다’ 고 말합니다. 

요셉이 죽고 400년이 지났는데도 이스라엘 후손들이 요셉의 유언을 기억할 만큼 단단히 일렀습니다. 요셉은 단순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성공한 삶을 꿈꾸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 받는 꿈 너머의 꿈을 꾸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꿈 너머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온갖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서도 인내하며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부정을 행하고, 세상의 쾌락과 음란한 문화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절제하며 자신을 철저하게 관리했습니다. 결국 요셉은 하나님 안에서 품었던 ‘꿈 너머의 꿈’을 이루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인 요셉도, 다윗도, 사도 바울도 모두가 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꾸었던 꿈은 단순히 높아지고 부자가 되고 성공하는 꿈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꾸었던 꿈은 ‘꿈 너머의 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 백성답게 사는 꿈이었습니다. 

‘꿈 너머의 꿈’을 가장 먼저 꾼 사람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꿈이라고 말하는 가장 부요하고, 가장 즐거움이 있는 삶의 자리의 복판에서 ‘꿈 너머의 꿈’을 꾸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갈대아 우르가 아닌 가나안 땅을 선택해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이 꾸었던 꿈은 자신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그에게 그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꿈 너머의 꿈을 상징하는 가나안 땅에 이르는 과정을 본문 5절에서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고 말합니다.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입니다. ‘마침내’입니다. 그곳까지 이르는데 쉽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돌아가고 싶은 유혹과 중간에 주저앉고 싶은 유혹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통과 힘겨운 일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온갖 유혹과 힘든 과정을 극복하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착한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꿈 너머의 꿈’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사는 꿈을 가지고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품고 있는 ‘꿈 너머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온갖 유혹과 시험을 통해 우리를 흔들어 놓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다가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서는 과정에서 ‘마침내’라는 표현은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면서 ‘꿈 너머의 꿈’을 간직한 주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꿈 너머의 꿈’을 가진 목사, 장로, 권사, 안수집사와 성도들, ‘꿈 너머의 꿈’ 을 가진 부모와 자녀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꿈 너머의 꿈’을 꾸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은 나눔을 통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교회 자체만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주변의 이웃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여줄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성탄절에 드리는 헌금이 아기 예수 오심을 기억하며 몸이 아파도  돈이 없어 수술을 못하거나 치료받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에게 따뜻한 선물로 전달하게 됩니다. 이 일이 ‘꿈 너머의 꿈’을 향한 우리 교회의 작은 몸짓이 되기를 바랍니다. 땅을 밟고 살고 있지만 우리의 꿈은 하나님 나라에 두고 그 나라를 향해 곧게 걸어 나가 ‘마침내’ 그 나라에 이르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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