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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자 (호 3:4-5, 요 6:38-40) - 종말, 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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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자 (호 3:4-5, 요 6:38-40)

김정한님의 ‘산다는 것은 기다림과의 여행하는 것이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눈을 뜨면 사랑하는 사람, 미운 사람, 만남부터 이별까지 기다려야 한다. 아마 그것은 신이 내린 아름다운 선물일 수도 있고, 가장 고통스런 형벌일 수도 있다. 죽기 전까지 계속되는 기다림이다”. 

인생은 기다림입니다. 좋고 반가운 것을 기다리지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나쁘고 괴로운 것일 때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림은 반가운 일입니다. 즐거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림은 설렘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림은 즐거움입니다. 군대 보낸 아들 훈련 5주 만에 면회 갈 때에 어머니의 기다림은 설렘입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입니다. 기다림은 그 자체가 참 좋은 일입니다. 사랑은 49%의 사랑과 51%의 기다림이란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기다림은 더 많고 길어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움 받기 위하여 자신은 몰랐지만 40년을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얻기 위하여 25년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한 결 같이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2:25에는 예루살렘의 시므온이라는 할아버지를 소개합니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시므온은 메시야의 탄생을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입니다. 메시야를 안고 축복하는 은총을 받은 사람입니다. 시므온의 축복은 기다림의 은총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종말에 관한 비유 가운데 열 처녀의 비유가 있습니다. 신랑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잠든 사람은 신랑의 잔치에 들어갈 자격이 없음을 말합니다. 달란트 비유에는 기다리며 일한 충성된 일꾼은 축복을 받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기다리지 못하며 일하지 않은 악한 종은 책망을 받고 쫓겨났습니다. 충성된 종은 열심히 일하면서 주인이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상대일 때가 있습니다. 데이트할 때 보세요. 만날 가치가 없는 상대라면 기다리지 않고 가버립니다. 가치 있는 상대라면 한 시간이라도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이 기쁘고 보람이 있습니다. 맛있다고 소문난 식당은 낮 시간에 설렁탕 한 그릇을 먹으려고 30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30분을 기다려 10분 만에 먹고 가지만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맛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우리의 간절한 소망인 메시야를 기다리는 일은 어떤 것보다 가치 있는 일입니다. 
  
지구적 현상을 보면 종말적 현상이 곳곳에 있습니다. 미국 동부의 10월 폭설, 태국 방콕의 홍수, 터키의 대지진, 아프리카의 끊임없는 한발 등 이 모든 것은 성경이 이미 예고한 종말의 징조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성경에 근거하여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준비해야합니다. 언제일지 그 날과 시간은 모르지만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세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는 인내와 기다림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증명서였습니다. 지금도 제자의 도는 기다림입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는 성탄과 더불어 예수님의 두 번째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여야 합니다.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에게 성탄은 더 기쁜 날로 주어질 것입니다. 

첫째, 내게 주신 자 중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마음을 가진 자이다. 

요한복음 6:39에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합니다. 마지막 날까지 주님은 주님께 주신 자 가운데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살리는 것이 소망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 살리는 것입니다. 나의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마음은 어떻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마지막 한 사람이라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살게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만약 내일 종말이 온다면 과연 무엇을 하겠습니까?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하였습니다. 종말을 맞는 자세는 오늘에 충실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내일에 대한 환상이 아닙니다. 정말 종말이 온다면 사과나무가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죽음 이후의 삶, 예수님의 재림 이후의 삶을 안다면 사과나무 보다 더 중요한 것을 심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심어야 할 것은 복음입니다.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믿음의 환상은 무엇입니까?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님을 믿게 하는 일입니다. 한 생명이라고 더 살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임금의 잔치비유에 보면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핑계로 거절합니다. 밭을 샀으니 가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소 다섯 겨리를 샀으니 가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장가들었으니 가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 때 임금은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눅 14:21)고 합니다. 잔치를 준비한 왕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다 잔치에 참여하게 하려고 합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마음을 설명한 비유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다 하늘의 잔치에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한 사람이라도 더,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우리의 자세여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6:22에는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합니다. “주여 오시옵소서”, “주님 오십니다” 이 말은 아람 방언으로 ‘마라나타’라는 말입니다. ‘마라나타’는 초대교회의 인사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종말적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금방 다시 오실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 가운데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이 그들이 살아있는 희망이었습니다. 
  
신학자 에른스트 케제만은 “종말론은 모든 기독교의 어머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마지막 날을 기대하는 종교입니다. 이 기대감이 없으면 기독교의 신앙도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종말을 기다리는 신앙은 초대교회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탈무드에는 “오늘은 최초의 날이자 최후의 날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모두의 남은 날의 첫째 날입니다. 종말적 삶의 의지를 가지고 살면 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7세기의 영성가 요한 클리마쿠스는 “당신이 오늘 하루를 마지막 날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날을 경건하게 보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종말적 자세로 살면 하루하루 경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종말적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종말적 자세로 산다는 것은 개인의 신앙에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1944년 9월 1일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기의 격추로 미 공군 병장이었던 로버트 스틴슨이 실종되었습니다. 미군은 15년 동안 수색하여 팔라우 근해에서 스틴슨 병장의 시체를 발견하였습니다. 그의 시체는 65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와 안장되었습니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끝까지 찾는 열정이 대단합니다. 비록 시체지만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까지 찾는 마음이 갸륵한 것입니다. 
  
지난 달 하마스에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던 이스라엘의 샬리트 병장은 팔레스타인 무장 게릴라 단체인 하마스의 요구대로 팔레스타인 병사 1,027명과 맞교환하여 석방되었습니다. 천명보다 한사람의 생명이 더 소중하다는 이스라엘의 정신에 세계는 감동했고 큰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하마스는 한 사람을 석방시키고 1,000명 이상을 찾아왔으니 엄청난 덕을 봤다고 할지 모르지만 정반대입니다. 하마스 1,000명이 유대인 1명 가치밖에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마스에게는 굴욕적 교환입니다.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이스라엘의 정신은 언제나 그랬습니다. 유대인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비행기를 띄우고, 전함을 보내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만일 오늘이 여러분의 마지막 날이라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마지막 날을 마무리하겠습니까? 마지막 순간까지 잃은 양을 찾아야 하고, 버린 양을 데리러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가족이나, 친척이나, 이웃이나, 친구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일이 마지막 날이라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내일 주님이 오신다면 반드시 해야 할 한 가지 일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내일 죽는다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일을 한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제자들의 심정을 보세요. 사도행전 1:11에는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있는 동안 다시 오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빨리 땅 끝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전도는 화급(火急) 전도였습니다. 정말 물불을 안 가리고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정신없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종말적인 전파였습니다. 

  
둘째, 예수님이 모두를 다시 살리실 것을 믿는 자이다. 
  
요한복음 6:40에는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자는 다시 살리실 것을 기대하는 자입니다. 마지막 날, 다시 살 것 믿지 못하면 이생에서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앞으로 살아야 할 아무 비전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다시 산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냥 하루하루 그렇게 살아갑니다. 
  
윤심덕은 일제강점기의 성악가이며 가수이며 배우입니다. 최초의 신여성이라 불립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요는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의 멜로디에 가사를 붙인 차용한, 윤심덕의 ‘사의 찬미’입니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려 왔느냐, 이래도 한 평생 저래도 한 평생,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녹수청산은 변함이 없건만 우리네 인생은 나날이 변한다, 이래도 한 평생 저래도 한 평생, 돈도 명예도 다 싫다”. 마지막 날에 대한 아무 기대가 없는 노래였습니다. 윤심덕의 마지막은 아무 희망이 없이 돈과 명예를 좇다가 자살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인생의 마지막, 인류의 마지막에 인생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한 해의 마지막에는 다시 새해가 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에는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류의 마지막 종말에는 하늘의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에는 다시 영원히 사는 삶이 우리를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예수님과 마르다의 대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하십니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의 확신에 찬 대화가 오갔습니다. 마지막에는 구원받은 우리 모두가 다시 사는 영광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과학자 마이클 파라디(Faraday)는 임종 시에 어떤 사람들이 “당신의 영혼이 장차 어떻게 되겠다고 추측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는 “추측이라고? 나는 추측에서 살지 않는다. 나는 확신에서 살고 있노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어릴 때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종말과 재림의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전쟁 후에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가정예배 때가 되면 재림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으면 “산아, 바위야, 나를 가리워라”라는 말씀을 같이 읽고,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를 외치고, “하나님의 나팔 소리 천지 진동할 때에”를 찬송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저의 교회에서 가까운 교회에 훌륭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목사님은 재림 설교를 하시면서 “예수님, 다시 오실 때 천사들의 나팔소리와 함께 오십니다”라고 했습니다. 교인들은 그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목사님은 실감나는 설교를 하시려고 나팔수를 강단 뒤에 숨겨 놓았다가 “나팔소리와 함께 오십니다”라고 할 때 크게 나팔을 불었답니다. 나팔소리가 나자 “아멘”하던 교인들이 모조리 의자 밑으로 숨더랍니다. 종말을 기다린다고 하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을 알지만, 막상 오신다면 두려워하고 조금 후에 오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준비된 자는 설레는 맘으로 기다립니다. 준비된 자는 기대감이 차 있었습니다. 공포와 환난과 지진과 어두움이 있으면 그 뒤에 빛과 영광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마지막을 기다리는 마음이며 확신입니다.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은 종말의 ‘대 격변’(catastrophe)이란 말에 ‘좋다’, ‘기쁘다’란 뜻의 헬라어 접두사 ‘eu’를 붙여 ‘선한 대 격변’(eucatastrophe)이란 말을 만들었습니다. 환경재해가 점점 심해지고, 대홍수가 있고, 한발이 대륙을 덮치고, 폭설이 뒤덮고, 한반도 몇 배의 빙하가 떠내려 온다고 합니다. 이런 종말적 현상이 다시 살아 영원히 사는 새 생명의 잔치의 서곡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 영원히 새 생명으로 사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5:43에는 예수님께 자신의 무덤을 드려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한 아리마대 요셉이 등장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을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마지막 날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무덤을 예수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자기 죽음을 준비하는 자는 다시 살 것을 예비하는 자입니다. 

  
결론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랭커스터에 가면 ‘아미쉬’들이 사는 마을이 있습니다. 재세례파인 이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어 자신들만의 마을을 만들어 살았습니다. 이들은 검은 옷을 입고, 옷에는 단추가 없고, 마차를 타고 다니고, 지금도 전기를 거절하고, 가전제품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미쉬’의 고집은 “믿음은 행함이다”라는 것입니다. 
  
2006년 10월 2일 마을에 총격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외부인의 총격으로  다섯 학생이 죽었습니다. 이 마을에서 우유를 수거하던 트럭 운전사가 자신의 딸이 출산 직후 죽은 것이 신의 저주라고 생각하여 이 마을에 총질을 하고 범인도 자살을 하였습니다. 전국에서 이 마을 피해자 가족을 위하여 성금을 보냈는데 이 성금을 범인의 유가족에게도 전달하였습니다. 자기들의 유가족과 똑 같이 나누어 범인의 유가족에게 준 것입니다. 

범인은 교실에서 10명의 학생을 나란히 세워놓고 총을 겨눴습니다. 13세 소녀가 “나를 먼저 쏘세요”(Shoot me first)라고 했습니다. 이 소녀의 세 살 아래 동생이 “그 다음에는 저를 쏘세요”(Shoot me next)라고 하였습니다. ‘아미쉬’는 늘 이렇게 묻습니다. “둘째 단추를 끼우기 전에 당신은 첫째 단추를 끼웠는가?” “예수께서 당신의 죄를 용서하기 전에 당신에게 죄 지은 자를 당신은 용서했는가”. 그들의 신앙은 행동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의 머리에는 한 생명을 귀하게 여깁니다. 하나라도 잃지 않겠다는 마음이 극진합니다. 용서할 때 마지막 하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3:5에는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고 합니다.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자는 여호와를 기다리며 그 은총으로 나아갑니다. 최후의 일인까지 잃지 않고 얻으려고 애씁니다. 마지막 날에는 다시 살 것을 기대하며 삽니다. 우리개인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자, 한 해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자 그리고 우리 인류의 마지막을 기다리며 영원히 살 것을 확신하고 용기 있게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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