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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귀히 쓰이는 그릇 (딤후 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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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히 쓰이는 그릇 (딤후 2:20-21)
    
바울은 디모데에게 큰 집에 있는 그릇들을 비유로 하나님께 쓰임받는 일군이 어떤 사람인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제자였고 바울이 전도하여 개척한 에베소 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였습니다.   선배 목회자이며 스승이었던 노사도 바울은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교회의 일군들은 이렇게 준비되고 섬겨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우리가 읽은 디모데전후서는 목회서신으로 분류되어 지금도 교회의 모든 직분 맡은 일군들을 양육하고 교훈하는 말씀으로 읽혀집니다.  

지난 주일 교회설립기념주일에 김북경 목사님이 사도 바울의 말씀을 인용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복음을 맡은 사신들이라(고후 5:20)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 복음,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받아 세상에 전하는 사절, 대사라는  영광스런 직무를 맡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와 연관지어 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맡은 대사는 큰 집의 그릇이며 하나님 나라의 일군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반포자,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받은 나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받는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부탁하신 그리스도를 신뢰한다.  나는 그분이 어떤 분임을 잘 안다.  그가 나에게 맡기신 이 직무를 완수하는 그날까지 나를 지켜주실 것 또한 확신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야 너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 내게 들은 말씀들을 본받아 지키라.    아들아,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 강하고 또 네가 많은 증인들이 보는 앞에서 나에게 들은 모든 것을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도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포함하여 디모데와 또 다른 성도들, 그리스도의 복음을 맡은 모든 일군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 또는 운동장에서 경기하는 선수, 그리고 밭에서 일하는 농부로 비유합니다.  군사와 선수, 농부는 각자 맡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고난의 과정을 필연적으로 통과합니다.   그러나 최후까지 견디고 자기 사명을 완수한 사람에게는 영광스런 상급이 있습니다.   

로마 병정은 로마제국과 황제를 위해 싸우는 군사로 부름받음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로마 황제를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하였습니다.   로마 군인이 전쟁터에 나갔을 때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이나 생업을 염려하여 전쟁을 망치는 일이 없었으니 로마 군병으로 모집된 것이 그만큼 영광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불러 준 황제를 기쁘게 하는 것이 로마 군인으로서의 명예였습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군사들에게는 황제가 하사하는 특별한 포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하늘나라의 왕 그리스도의 군사로 모집된 성도들을 로마 군병의 명예에 비유합니다.  ‘디모데야 네가 나와 함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고난을 받자.   전쟁터에 나간 군사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아니다.  오직 나를 불러주신 왕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나이가 많고 이 세상을 떠날 기약이 가까웠다.   내가 주께 부름을 받은 이후 나에게 주어진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예비된 의의 면류관을 받으러 의로우신 주님께 가게 된다.   

이 영광스런 면류관은 나 뿐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주실 영광스런 상급이다.   디모데야, 이 고난의 때에 너를 둘러싼 참혹한 핍박과 너를 유혹하는 거짓 스승들의 헛된 가르침에 한 순간도 흔들리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고 절망하지도 말며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서지도 말아라.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너에게 주어진 선한 싸움을 끝까지 잘 싸우라.’   이것이 디모데를 아들처럼 사랑했던 사도 바울의 마지막 당부였고 세상에서 영적 군사로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입니다.   어떤 그릇이 귀하게 쓰이는 그릇입니까?   비싼 그릇입니까?   골동품 가게에서 찾아낸 진귀한 물건입니까?   사도 바울이 그릇 비유에서 말하고 싶은 귀히 쓰이는 그릇은 주인이 필요할 때 즉시 사용할 수 있도록 깨끗하게 준비된 그릇입니다.  오늘 본문의 그릇이라는 말은 NIV 성경 20절에 Articles로 번역되었고, 21절에는 instruments로 번역되었습니다.  다른 번역에서는 utensil이라 번역되기도 했는데 바울이 쓴 오늘 본문과 다른 편지, 예를 들어 로마서를 보면 instrument라는 단어가 이 말씀을 이해하기에 적당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13절에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했습니다.   

이때 불의의 병기 또는 의의 병기는 불의한 일 또는 의로운 일을 위해 쓰이는 도구라는 말로 해석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의 옛사람을 못박아 나의 옛 죄성이 죽었음을 믿는 성도는  이제 더 이상 죄에게 끌려다니는 노예로 살지 말고 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 몸과 내 지식과 재주가 불의한 일, 불법을 행하는 일에 쓰이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작년에 아빙돈에 있는 체리티 숍에 중고 가구를 구하러 갔다가 마침 주방용품과 작은 사이즈 오나멘트 등 소품을 진열해 놓은 코너에 있던 나무그릇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그릇을 보는 순간 이것을 우리교회 세례식 물그릇으로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것처럼 그다지 멋진 그릇은 아닙니다.   물론 채리티 숍에서 구입하는 중고물건이라 가격도 아주 저렴하였습니다.     

예배당에서 거룩한 예식을 위해 사용되는 이 그릇이 이전에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저도 모르고 채리티 숍 주인도 모릅니다.  나무로 만든 그릇이었으니 물기 있는 음식을 담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영국 사람 가정에서 과일을 담았던 그릇이었는지 아니면 집주인이 맥주를 마실 때 마른 안주를 담았던 접시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그릇이 목사의 눈에 뜨여 깨끗하게 닦여진 다음에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고백하는 성도들에게 세례를 주는 물그릇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귀히 쓰이는 그릇이 되지 않았습니까?   바울의 말씀처럼 거룩한 일에 사용되고 이 그릇을 사용하는 주인의 마음에 합하여 좋은 일에 요긴하게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2절에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했는데 이 그릇을 우리의 마음이라 비유하면 변화가 되어도 획기적인 변화를 받았습니다.   그 그릇이 처음부터 교회에서 사용하는 세례용 성구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옥스포드 한인교회 세례식 기구가 되어야겠다 작정하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에 어떻게 쓰였는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은 새롭게 변화를 받아 거룩하고 좋은 일에 쓰임을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옥스포드에 살면서 영국의 옛 귀족들이 살았던 성이나 저택들을 방문할 기회가 많습니다.  옥스포드 가까이 우드스톡에 있는 브랜하임 팔래스를 방문해 보셨지요?   거기 가면 영국 수상 처칠 집안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처럼 그 큰 집에는 금과 은 그릇, 값진 본 차이나와 청동 그릇들이 진열된 커다란 방이 있습니다.  그 큰 집에 화려한 고급 가구들과 고가의 그림들이 가득합니다.  

옥스포드대학 Christ Church College 기념품 가게에 가면 그 교회당에서 역대 사제들이 대대로 사용해왔던 성찬식 그릇들이 시대별로 진열되어 있습니다.  값비싼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 당대 최고의 기술자가 조각하고 세공하여 만든 화려한 성찬식 그릇들을 보면 그 시대의 교회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화려한 기술로 멋지게 만들어졌는지 입이 쩍 벌어집니다.   주부들은 그릇 공장에 가면 눈이 번쩍 빛나고 활기를 띠는 것처럼 목사는 교회에서 사용하는 성찬 그릇을 보면 입안에 군침이 돕니다.   우리교회도 저런 멋진 그릇을 사용하여 세례식과 성찬식을 하면 더 은혜로운 성례식이 될 수 있을까 잠시 상상해본 적이 있습니다.  

크라이스트 처치 컬리지 성당의 성찬 그릇은 그만두고 서울에 있는 반포동 고속터미널 앞 기독교용품 백화점에만 가도 황금색, 은은한 은빛 색깔을 자랑하는 성찬기들이 진열되어 목회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지난 초여름에 서울을 방문하여 우리교회 행사용 현수막을 제작하러 갔다가 기독교용품 백화점을 구석구석 둘러보았습니다.   그때도 성찬식 용품 가게 앞에 발이 멈추었습니다.  역시 그곳에도 화려한 성찬기구들이 진열되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또 한 번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성도들이 마시는 작은 포도주 잔이 우리처럼 투명한 플라스틱 잔이 아니라 금색과 은색으로 도금되어 번쩍이고, 잔을 담은 그릇도 번쩍번쩍 빛이 납니다.   빵을 담은 접시도 우리처럼 밋밋한 사기그릇이 아니라 아름다운 포도덩굴이 새겨진 금빛, 은빛 쟁반들입니다.  세례식 때 물을 담는 그릇도 금은 도금을 하여 번쩍번쩍합니다.   물론 가격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 앞에 멈춰 이것저것 구경하며 우리도 이런 그릇을 구입하여 사용하면 어떨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화려한 그릇을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로마와 유대인의 박해를 피해 지하동굴 카타콤에 숨어 예배드렸던 초대교회 성도들도 이렇게 고급 그릇들을 사용했을까?   사도 베드로와 요한과 바울이 세례를 베풀 때 그리고 성도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줄 때 이런 그릇을 사용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너무 비싸고 사치스러워 우리 형편으로 구입하기 부담스러우니 먹을 수 없는 신포도로 여기고 마음을 바꾼 것이 아닙니다.   

값 비싸고 화려한 그릇이 아니라 세례와 성찬의 뜻을 자신의 몸으로 가르쳐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거기 담겨있어야 옳다.   금그릇 은그릇이 아니고 질그릇과 나무그릇, 플라스틱 그릇이면 어떠랴.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던 예수님도 마지막 유월절 음식을 드실 때 그렇게 고급스런 그릇을 사용하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주님이 떼어주신 빵과 부어주신 잔을 감사함으로 받아먹는 우리 자신들이 주님 보실 때 깨끗하고 거룩한 그릇이어야지.  성찬식 그릇이 고급스러워야 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마음을 접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도 저와 같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성찬식에 사용하는 그릇을 아무거나 집어다 사용하고 가볍게 다루어도 괜찮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성찬식을 준비하고 성찬식을 마친 다음 정리하는 성례부 집사님들이 그 그릇들을 아무렇게 다루고 하찮은 물건으로 취급해도 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교회에서 거룩한 용도로 사용하는 물건이나 사람 앞에 구별되었다는 의미로 ‘성,聖’자를 붙여 ‘성전, 성경, 성구, 성도 그리고 성찬식’이라고 부릅니다.   같은 물건이고 같은 사람이며 예식이지만 하나님께 드려지기 위해 거룩하게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 드려지기 위해 구별된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성도라 부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 내 스스로 내 몸과 내 인생의 주인이었고 내 마음대로 내 인생을 살았던 그때에 나는 하나님께 드려진 성도가 아니었지만 이제는 성도라 부름을 받습니다.   주님을 알게 되었고 주님을 나의 주인과 왕으로 고백하며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게 됨으로 나는 주님을 위해 쓰임받는 거룩한 그릇이 되었습니다.   

오늘 바울의 비유로 말씀하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큰 집에서 거룩한 일을 위해 주인의 손에 들려 쓰임을 받는 깨끗한 그릇,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을 위해 예비된 그릇, 도구들입니다.   아빙돈 채리티 숍 중고가게 선반에 다른 그릇들과 섞여 먼지가 뽀얗게 앉아있던 나무그릇이 목사의 손에 들려져 옥스포드 한인교회 세례식 그릇이 되었습니다.   값주고 사서 그 이름을 바꾸었고 용도가 새롭게 바뀌어 거룩한 일에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으로 값주고 사신 새로운 피조물들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 쓰시려고 성도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 영광스런 신분으로 변화되어 주님이 원하시는 좋은 일에 쓰임받는 일군이 되었음을 소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열심히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 우리는 그의 손에 들린 흙덩이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만들어져가는 질그릇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금이나 은이나 나무와 질그릇으로 구분하기 전에 우리는 모두 한 덩이 흙으로 지음을 받은 질그릇입니다.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에 사용하시려고 우리를 그릇으로 만드십니다.   주인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군은 그것이 금이든 은이든 나무와 질그릇이든 큰 그릇이든 작은 그릇이든 차별이 없이 하나님께서 필요하실 때 쓰임받는 깨끗한 그릇입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이 다음에 자라면 큰 일하는 큰 그릇이 되라 가르칩니다.  큰 그릇이 되려는 꿈과 희망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선한 목적이 아닌 헛된 야망을 가지고 큰 그릇이 되려다 도리어 세상을 어지럽히는 쓸모 없는 그릇, 큰 일을 저질러 사람들에게 고통과 근심을 가져다 주는 골치아픈  물건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 믿는 큰 일군, 큰 그릇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일에 쓰임받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나 기독교인이라면서 하는 일마다 못되고 악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며 기독교 전체를 욕먹이는 불의한 큰 일군, 큰 그릇들도 많습니다.   

바울 시대에도 벌써 그런 사람들이 등장하여 교회를 어지럽혔고 지역사회에서도 지탄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군 디모데에게 깨끗한 그릇, 귀히 쓰이는 그릇이 되라 말한 것은 바로 그런 사람들과 분명히 구별된 삶을 살도록 당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옥스포드에서 학위를 하고 연구를 하는 여러분, 잠시 영국에 나와 영어를 공부하는 젊은이들, 그리고 모든 성도 여러분 각자 자기 전공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고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일에 힘써 수고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몸담고 있는 그 자리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십시오.   좋은 머리를 가지고 세상을 위해 선하게 쓰임받아야 할 사람들이 도리어 못된 일에 앞장을 서면 그 사람은 아무리 큰 그릇일지라도 더럽고 추한 그릇입니다.   선한 일에 제대로 쓰임받지를 못하는데 세상 기준으로 금 그릇이나 은 그릇이라 평가받으면 무슨 영광이 있겠습니까?   옥스포드에 오신 여러분의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재주를 선한 일에 사용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쓰임 받는 의의 도구가 되시기 바랍니다.   

연말을 맞이하여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집을 위해 수고할 일군들을 찾고 있습니다.    여전도회와 남전도회에서, 구역모임과 주일학교와 찬양팀을 위해 그리고 예배와 친교와 복음 전하는 일을 위해 수고할 깨끗한 그릇, 좋은 일에 귀하게 쓰임받을 그릇들을 필요로 합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열심히 봉사했다고 상주는 것도 아니고 이력서에 경력이 올라가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적으로 말해 나에게 무슨 이득이 돌아오는 것도 없는 헌신과 희생의 섬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손에 들려 쓰임받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기쁨으로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밖을 나가면 성도라는 이름 가지고 세상을 위해 선하게 쓰임받는 깨끗한 그릇들로 살아가십시오.  가진 것이 건강과 시간이라고 여러분의 젊음을 함부로 허비하지 맙시다.   지나고 나면 허무하고 헛된 일에 여러분의 소중한 세월 낭비하지 말고 아무쪼록 생명 살리는 일에 여러분의 시간과 물질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큰 일이 아니라고 주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작은 일이지만 선한 일에 준비되고 충성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자신의 신앙이 한층 성숙해지는 복된 기회를 얻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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