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미가 신학의 3대 원리 (미 2:1-13)

첨부 1


미가 신학의 3대 원리 (미 2:1-13)

미가서는 작은 이사야라고 불리는 미가 선지자의 세 편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미가 1-2장은 첫 번째 설교인데 그 내용은 북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와 남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이 우상 숭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미가 2장은 첫 번째 설교의 결론 부분으로서 선지자 미가의 신학의 원리가 무엇인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학이라고 하면 나와는 상관없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각각 신학은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무신론자(atheist)”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무도 신이고, 돌도 신이고, 해도 신이고, 달도 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범신론자(pantheist)”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내 신은 내 신이고, 네 신은 네 신이다”라고 말하며 각각 사람마다 신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다신론자(polytheist)”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학”이란 각 사람이 신에 관하여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정리한 것입니다. 신학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거짓 신학”과 “옳은 신학”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진리를 말하는 신학도 있고, 거짓된 신학도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신학을 모르겠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어떻게 하면 내가 바른 신학을 가질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미가 선지자는 유다 왕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때의 거짓된 신학을 가르치는 거짓 선지자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거짓된 사상을 가지고 백성들을 미혹하고 오도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가는 미가서 2장에 ‘올바른 신학의 3대 원리가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Ⅰ. “심판의 원리” (1-5절). 

1-5절까지는 ‘하나님의 심판 원리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심판하실 때 어떤 원리를 따라 심판 하시는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밤이 되면 침상에 누워 편안히 쉬지 않고 악한 계획을 세운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내일 날이 밝으면 약한 백성들의 밭과 집을 빼앗을 것인가?’라는 악한 계획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침상에서 악한 계교를 세우는 이유는 그들의 손에 권력과 법을 주무르는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권세를 악용해서 약한 백성들의 재산을 탈취하고 조상으로부터 유업으로 받은 땅을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의 포도가 탐스럽게 열리는 것을 보고 그것을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합은 나봇에게 포도원을 팔라고 말하였습니다. 나봇은 포도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이고, 우리 조상 대대로 농사지은 땅이기 때문에 당신이 아무리 왕이라도 줄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합은 침상에 들어가 누워버렸습니다. 그때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왕인 당신이 그거 하나 빼앗지 못합니까?’라고 말하며, 거짓된 증인 둘을 세워 나봇을 죽이고 그 땅을 빼앗았습니다. 

아합과 같이 권력을 가지고 기업과 땅과 밭을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전 4:1). 백성들은 빼앗겨도 하소연 할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약한 백성들의 집과 밭을 빼앗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려는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앗수르 군대와 바벨론 군대를 보내서 너희의 집과 밭을 빼앗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유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슬프다 우리가 온전히 망하게 되었도다.”라는 슬픈 애가를 지어 부른다고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미가는 대단히 중요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죄 많은 자나 죄 없는 자나 하나님께서 동일한 형벌로 심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원리는 “동해보복(Lex talionis)”의 원리입니다. 라틴말로 ‘Lex’라는 말은 법이란 뜻이고, ‘Talionis’는 보복이란 뜻입니다. 쉬운 말로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원리입니다. 남의 눈을 뽑은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의 눈을 뽑으시고, 남의 이를 뽑은 사람은 그 사람의 이를 뽑으신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재앙을 내릴 계획을 세우시고, 지도자들이 밭과 집을 빼앗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밭과 집과 산업을 빼앗으십니다. 또한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슬프게 만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슬픈 노래를 부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동해보복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이 원리를 이스라엘 과거의 신정 통치 국가의 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일반적인 원리입니다.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시 7:15). 남을 빠뜨리려고 웅덩이를 파놓고서 자기가 거기에 빠진다는 말입니다. 

에스더서 7장에 보면, 악한 아각 사람 하만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궁궐에 출입을 하는 대신입니다. 그가 궁궐에 들어갈 때 유대인 모르드개가 인사하지 않는다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으로 성이 풀리지 않아 모르드개의 민족 모두를 말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하나님께서 역전시키셨습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자기 집에 오십 규빗이나 되는 장대를 달아 놓았는데, 그 장대에 하만이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1789년에 길로틴(guillotine)이라는 사람이 남의 목을 자르려고 교수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교수대에서 자신의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이것이 동해보복입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려 하면 자기가 그 해를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 원리입니다.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다윗이 저녁에 왕궁을 거닐다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보고, 남의 아내인 밧세바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빼앗은 밧세바의 남편이자 자신에게 충성을 다했던 장군 우리아를 고의적으로 전쟁터에 앞장서게 하여 사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때에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당신이 남의 가정을 파괴하고 남의 아내를 빼앗았으니 칼이 당신 집에서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다윗 집안에는 자식들끼리 죽이고 자식들이 아버지를 쫓아내고 아버지의 후처를 겁탈하는 일이 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동해보복입니다. 

마태복음 26장 52절에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에게 이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증해 주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마 26:52). 남을 죽인 자는 자기도 죽게 된다는 동해보복의 원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현세의 심판이든 내세의 심판이든 자기가 저지른 죄와 같은 종류의 형벌을 주시고, 자기가 저지른 죄의 경중에 따라서 많은 죄를 저지른 사람은 많은 형벌을 주시고, 적은 죄를 저지른 사람은 적은 형벌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 원리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눅 12:47-48). 똑같이 맞을 일을 했어도 알고 저지른 자는 많이 매 맞고 모르고 저지른 자는 적게 매 맞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많은 죄를 저지르셨습니까? 적은 죄를 저지르셨습니까? 많은 죄를 저지르셨으면 많은 형벌을 받을 것이고, 적은 죄를 저지르셨으면 적은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죄를 저지른 자는 지옥에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벌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가 많이 있습니다.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은밀하게 지은 죄, 공개적으로 지은 죄, 마음으로 지은 죄, 몸으로 지은 죄, 크게 지은 죄, 작게 지은 죄 등 우리의 삶 가운데 죄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가 있어도 벌을 안 받는 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내가 받아야 할 벌을 대신 십자가에서 받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을 나의 구주로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어떤 죄가 있어도 벌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를 동해보복의 원리로 심판하시지만 믿는 자는 그 심판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옮겨 버리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심판이 면죄된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Ⅱ. “올바른 성서해석의 원리” (6-11절). 

미가 시대의 악한 지도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을 좋아했습니다. “사람이 만일 허망하게 행하며 거짓말로 이르기를 내가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네게 예언하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되리로다” (미 2:11). 선지자가 나와서 하나님을 믿으면 포도주를 풍성히 주실 것이라고 말하면 그러면 다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되고, 건강해지고, 출세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좋아합니다. 

그러나 복을 많이 받아 돈을 많이 벌고, 쾌락을 많이 누리며 처첩을 천명이나 두었고, 지혜가 세상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났던 솔로몬의 결론은 무엇이었습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1:2). 거짓 선지자들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가지고 마음을 미혹합니다. 그런데 부자가 되고, 병 낫는 것들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에 목표를 두면 안 됩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문제는 성경해석이 편파적이라는 것입니다. “너희 야곱의 족속아 어찌 이르기를 여호와의 신이 편급하시다 하겠느냐 그의 행위가 이러하시다 하겠느냐 나의 말이 행위 정직한 자에게 유익되지 아니하냐” (미 2:7). 

미가 2장 7절은 세 개의 질문입니다. 두 개는 거짓 선지자가 하는 것이고, 하나는 미가가 하는 질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첫째로, 여호와의 신이 어찌 편급하시냐는 질문을 합니다. 편급이라는 말은 영어로 ‘Impatient’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그렇게 참을성이 없으시냐는 말입니다. 거짓선지자들이 미가에게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한다고 예언하지만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신데 참을성이 없어 우리를 심판한다는 말이냐? 미가야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예언하기를 그치라.” 

거짓 선지자들은 출애굽기 34장 6절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출 34:6). 

거짓 선지자들은 이 말씀만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의 행위가 그러하느냐?”라고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광야에서 40년간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가나안 땅도 주시고 왕도 세워 주셨는데 어찌 우리를 심판하신다고 하느냐? 심판은 하나님의 행위일 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의 문제는 출애굽기 34장 6절만 읽고 7절은 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녀 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출 34:7). 아버지가 악을 저지르면 삼사대까지 죗값을 받고, 착한 일을 하면 천대까지 인자를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자식들이 삼사대까지 아비의 죗값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잘한 것은 천대까지 복을 주고 잘 못 한 것은 삼사대만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한 것을 우리 대에서 끊지 않으면 우리 자손 삼사대까지 우리 죗값이 내려간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남의 재산에 손해를 끼쳤다면 삼사대가 재산에 손해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이 남에게 못할 짓을 하고 바람을 피웠다면 삼사대가 그러한 문제로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때에 우리의 죗값을 끊고 우리 후손들에게 나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했지 하나님의 심판은 의도적으로 무시했습니다. 이것은 반쪽 진리입니다. 반쪽 진리는 비 진리입니다. 진리는 온전한 진리가 되어야 합니다. 비 진리는 부패한 삶을 낳게 됩니다. 이렇게 거짓 선지자들에게 배운 사람들이 행하는 짓은 무엇입니까? “근래에 내 백성이 대적 같이 일어나서 전쟁을 피하여 평안히 지나가는 자들의 의복 중 겉옷을 벗기며, 내 백성의 부녀들을 너희가 그 즐거운 집에서 쫓아내고 그 어린 자녀에게서 나의 영광을 영영히 빼앗는도다” (미 2:8-9). 

이렇게 잘 못된 사상을 가진 백성들이 하는 짓은 전쟁을 싫어하는 평안한 사람들을 지나가는 것을 잡아 겉옷을 벗깁니다. 그리고 부녀들을 집안에서 쫓아내고 자녀들이 누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약탈합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거짓 사상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너희의 쉴 곳이 아니니 일어나 떠날지어다. 이는 그것이 이미 더러워졌음이라 그런즉 반드시 멸하리니 그 멸망이 크리라” (미 2:10). 너희같이 악한 거짓말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가는 이런 거짓 선지자들을 향해서 질문합니다. “나의 말이 행위 정직한 자에게 유익되지 아니하냐?” 미가가 심판의 말을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마음이 올바른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여 유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나가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심판받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들이 그것을 듣고 회개하여 돌이켜 심판이 거두어진 것처럼 심판의 메시지도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출애굽기 34장 6절은 취했어도, 7절은 버렸습니다. 하지만 미가는 하나님께서 은혜도 주시지만, 심판도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미가는 성경을 균형 있게 이해하고 적용하고 선포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 이단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단들의 특징은 성경을 편파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경을 균형 있게 해석 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미가 신학의 바른 원리입니다. 


Ⅲ. “올바른 구원의 원리” (12-13절). 

 미가는 하나님께서 죄에 따라 심판하시는 중에도 “남은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남은 자의 신학’(The theology of the remnants)을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아 내가 정녕히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정녕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 양떼 같게 하며 초장의 양떼 같게 하리니 그들의 인수가 많으므로 소리가 크게 들릴 것이며, 길을 여는 자가 그들의 앞서 올라가고 그들은 달려서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좇아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행하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리라” (미 2:12-13). 

이것은 미가가 ‘올바른 구원의 신학’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죄에 따라서 동해보복의 원리로 심판을 하시지만, 남은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전부 보스라의 양떼 같이 모으신다는 것입니다. 보스라의 양떼같이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을 모으셔서 특별히 보호하시고, 공급하시고, 돌보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 앞에 앞장서서 원수들을 공격하고 물리치시고 승리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전쟁은 지휘관이 뒤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적인 전쟁은 지휘관이신 하나님께서 앞에 나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에게 보호와 인도와 승리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앞장서서 길을 열어 주시는 “바알브라심”의 하나님입니다. 사무엘하 5장 20절에 보면 다윗이 블레셋 사람과 싸울 때도 하나님께서 먼저 앞장서시고 큰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 동네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고 붙였습니다. 그것은 ‘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성도들 앞길에 하나님께서 앞장서서 길을 열어주시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들을 모아서 특별히 돌보시고, 원수를 물리치시고 승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학자는 이 말씀을 히스기야 왕 시대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공격해왔을 때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겠다는 약속으로 해석합니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그런 의미일 수 있겠지만 남은 자의 신학은 구약 예언서에 전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구원의 신학’입니다. 
 
“남은 자의 신학”은 구약 예언서에 전반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이 망할 때에도 기생 라합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 선지자 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우상 숭배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000명을 남겨 두셨습니다. 그들이 남은 자입니다. 이 세상이 다 망해가는 것 같아도 참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남은 자들은 언제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시고 이방인의 택한 자를 접붙여서 교회를 완성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적인 이스라엘을 심판하셔도 영적인 이스라엘인 남은 자들을 건져 구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그루터기가 되고, 참감람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돌감람나무였는데, 이방인 중에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을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이방인의 택한 자가 하나님의 위대한 교회를 구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아 참감람나무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참감람나무입니다. 그리고 돌감람나무인 우리가 접붙임을 받아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하나님 역사의 운행 계획이고, 미가의 구원신학인 것입니다.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구원을 받는다는 신학은 성경이 지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택한 자를 건져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 주권의 신학이고 옳은 신학이며 루터와 칼빈이 찾아낸 위대한 개신교 신학인 것입니다.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구원의 대상은 남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자입니다. 이들도 본질상 죄인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합당한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심으로 그들의 죗값을 십자가로 다 옮기셔서 죄 사함을 받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롬 11:5).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구원의 대상은 남은 자이고, 구원의 결과는 목자 되시는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과 돌보심이며 하나님께서 길을 여는 자가 되어 승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결론 

현대인은 진리를 상대화하려 하거나, 탈신학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신학은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바른 복음, 바른 신학을 추구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바른 복음을 믿고 행하는 길은 이사야, 예레미야, 미가처럼 외로운 길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합니다. 포스트모던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마다 각각 자기 옳은 소견대로 산다는 것이고, 진리가 상대화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상대화되면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부정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윤리의 기준이 없어지고, 삶이 부패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라고 말씀하셨지만, 남자가 남자와 여자가 여자와 결혼을 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기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것이 나쁘다고 말하면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을 공격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신학을 기피하고 탈신학화를 표방합니다. 신학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시고, 인간을 창조 했다는 것은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악에 빠져 죄인이 되었다는 것도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주신 구세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도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천하에 인간이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천국 가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도 훌륭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믿어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살고, 다시 살 때는 영화로운 몸으로 다시 살아 죽지 않고,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슬프지 않고, 질병 없는 영광스런 육신을 입고 영원히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이것이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학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진리를 믿는 바른 신학을 추구해야 합니다. 바른 복음을 믿고 행하는 것은 때로는 외로운 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로워도 가야 될 길입니다. 바른 복음을 믿고, 평생 정도를 행하며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