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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에 부탁함(2) : 생명의 빛 예수 (요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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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에 부탁함(2) : 생명의 빛 예수 (요 1:1-5)

대강절 둘째주일 낮예배 

지난주일 낮 예배가 끝난 후 예배당 뜰에서 한 여자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 자매가 교우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제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자매가 물은 질문은 간단했습니다. <저, 은혜가 뭔가요?> 질문은 간단했지만, 제 마음에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지난주일 우리는 <은혜에 부탁함>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우리의 한계, 연약함, 무능함, 고통과 죽음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힘들어하시는 교우님들을 도울 수 없는 저의 무능함에 대해서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한계를 느끼고 자신에게 절망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절박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여 그 은혜로 회복되고, 치유되고, 새로워지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는 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그 자매가 오늘 예배에 참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매는 지난주일 우리 교회 예배에 처음 참석했다고 했는데, 말씀을 아주 진지하게 들은 것 같았습니다. <은혜가 뭔가요>라고 묻는 자매의 눈에 눈물이 글썽였습니다. 은혜에 대해 정말로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이 시간 저는 그 자매를 축복하고 싶습니다. 그 자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길 원합니다. <은혜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졌으니, 이미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은혜 안에서 복된 삶을 사는 하나님의 따님이 되길 축복합니다. 

여러분, 저는 그 자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어떤 것일까요? 

은혜는 각자에게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마치 사랑이 다양한 것과 같습니다. 어떤 아이에게는 꾸중이 사랑이 됩니다. 그러나 어떤 아이에게는 꾸중은 독약이 됩니다. 오히려 포근하게 안아주는 것이 사랑이 될 때도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혼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는 아이가 있다고 할 때, 어떤 아이에게는 잘 못해도 그냥 놔두는 게 사랑입니다. 그 아이는 혼자 해 보면서 성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아이에게는 하나하나 친절하게 가르치는 게 사랑이 됩니다. 

은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만, 각자에게 은혜는 다양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다 보니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면서 동일한 설교를 나누어도 각자가 받는 은혜의 양과 질, 그 맛과 향이 사람에 따라 각기 다릅니다. 

그러나 각자에게 다르게 느껴지는 차원을 떠나서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할 공통의 은혜, 성경이 가르치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이것에 대해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하는 문제부터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절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 즉 <로고스>라는 헬라어 단어가 가리키는 분이 성자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탄생하셨습니다. 

14절을 보실까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했지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성자께서 육신, 즉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탄생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이 탄생하신 축제가 바로 성탄절입니다. 

그런데 14절의 그 다음을 보면 사람으로 탄생하신 예수님의 영광에 대해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다 각자의 영광을 가집니다. 스승은 스승의 영광을 가지고 있기에 제자들이 그를 존경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영광을, 어머니는 어머니의 영광을 가지고 있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이신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 분을 뵈니 하나님의 독생자, 즉 하나님의 외아들의 영광을 가지고 계심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고, 후에 갈릴리 나사렛 마을에서 성장하신 그 분, 목수의 일을 하셨던 그 분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당시 그 분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 분을 시골 출신의 목수라고 천대했지만, 그 분을 제대로 본 사람은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습니다. 

이런 그 분이 무엇을 가지고 세상에 오셨을까요? 14절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 은혜와 진리가 넘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은혜의 전달자이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충만한 은혜를 가지고 우리에게 오셨음을 분명히 확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신 은혜, 그 분 안에 충만한 은혜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은혜는 여러 가지이지만, 오늘 읽은 본문에는 그 대표적인 것 하나가 언급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생명>입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었고, 그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은혜는 <생명>입니다. 

그런데 4절은 생명을 빛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왜 생명이 빛이 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빛이 모든 것의 출발점인 것처럼 생명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말씀하는 창세기 1장 2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아직 하나님께서 본격적인 창조를 시작하시기 전 상태는 <흑암>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찬란한 세상을 만드시기 위해서 그 첫 단계로 흑암, 어둠을 물러가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둠을 물러가게 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빛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어둠을 몰아내는 것은 빛 밖에 없습니다. 어둠은 빛 앞에서 버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3절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어둠에 빛이 비치면서 모든 생명체들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빛은 창조의 첫 출발점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도 모든 것의 출발점입니다. 생명이 주어지는 순간부터 나머지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인생도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생명이 없으면 사상도, 예술도, 기술도, 사랑도 없습니다. 생명은 모든 것의  출발점입니다. 그러기에 4절 말씀은 생명을 빛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빛과 생명은 어디서 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대답은 하나입니다. 빛과 생명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빛을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상탄이란 모든 것의 근원이신 그 분이 사람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말합니다. 

본문 1절 이하는 이 내용을 잘 말씀합니다. 태초에 말씀이신 성자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셨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라고 했지요. 그리고 그 뒤에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명확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 사실은 그 본질과 영광과 능력에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십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께서 세상이 창조될 때 하신 역할이 무엇입니까? 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할렐루야!  그 분이 하신 일은 세상을 만드신 일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 하늘과 땅과 바다, 그 안의 모든 생명체가 다 그 분을 통해 지어졌습니다. 그 어떤 것 하나도 그 분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 분이 온 세상의 근원이시라면,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도 다 주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생명은 존귀한 것이고, 우리는 한없이 귀한 존재입니다. 

바로 이 사실, 주님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 자체가 최고의 은혜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생명을 주신 것이 은혜>라는 말은 육신의 부모에게도 적용됩니다. 부모님께서 자녀에게 주신 가장 큰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설령 부모님이 좋은 옷, 맛난 음식을 주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호강을 시켜주지 못했어도, 생명을 주셨다는 한 가지만으로도 자녀는 부모님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은혜는 생명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님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벌써 은혜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기 전부터 이미 생명이라는 근원적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생명 주신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자, 그런데 그 후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우리 생명이 망가졌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을 망가뜨린 주범은 <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는 죄를 지은 이후로, 인생들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후로 우리 생명은 상처를 받았고, 말할 수 없는 연약함과 한계 안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그 일을 늘 보고 듣습니다. 

얼마 전 이인수 집사님께서 가족들의 안타까운 눈물을 뒤로 한 채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집사님은 쓰러지셨고, 머리 수술을 받으셨고, 언어 기능을 잃으셨습니다. 그 후 내내 병원에 계시다가 장기가 약화되시고, 음식물이 기도로 들어가게 되고, 결국 의식 없이 누워계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여러분, 이 모습이 우리네 생명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그래도 난 지금 살아있지 않은가?>라고 생각하면서 위로를 받고자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지금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은 너무도 많은 한계를 가지고 고통 받고 있습니다. 

연세의료원 원목실에서 일하는 <김복남 전도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의 간증을 들으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간증을 <최루탄 간증>이라고들 말합니다. 전도사님은 병원에서 일하면서 인간의 숱한 고통을 바라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만족이 없습니다. 용역업체에서 파견된 청소 아주머니는 식당에서 밥하는 아주머니를 부러워한다고 합니다. 정식 직원이니까요. 그런데 식당 아주머니는 사무직원을 부러워한다고 합니다. 사무직원을 붙들고 말해보면 <병원은 뭐니 뭐니 해도 의료진이 최고지요>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간호사나 치료사들은 의사를 부러워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들은 전도사님을 부러워한다고 합니다. <우리 의사, 요즘 인기 없습니다. 의료법도 까다로워지고, 환자들과 가족 등쌀에 법정에 서는 일도 많습니다. 늘 생명을 다루면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런데 전도사님은 위로해주고 기도해주면서 평안 가운데 사니, 얼마나 좋습니까?>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도사님은 원목 목사님이 부럽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또 뭐라고 말씀할까요? 이런 식으로 세상살이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만족함이 없다>, 이것이 우리 생명의 불완전함을 보여줍니다. 

게다가 병원에서 보는 인생의 고통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입원 환자 중에는 본인이 의사이면서도 자신의 당뇨병을 다스리지 못해서 엉덩이 부분까지 절단하여 의족조차 끼울 수 없는 분도 있습니다. 그 분은 의족 한쪽이라도 끼울 수 있다면 전 재산과 바꿔도 좋다고 말했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두 다리가 엄청난 가치를 가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남편이 수년을 식물인간으로 있어서 <전도사님, 제 남편이 ‘여보!’라고 한 마디만 불러줘도 소원이 없겠어요.>라고 말하는 아주머니도 있다고 합니다. 대학교 입시가 있는 날, 병원 창문으로 입시생들이 드나드는 것을 보면서 <우리 애가 단 하루라도 학교에 가는 것을 보면 원이 없겠다>고 눈물 흘리는, 중증 장애아동을 둔 어머니도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겠지요? 

이게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예외 없이 늙습니다. 약해집니다. 병으로 고통 받습니다. 그와 함께 외로움과 슬픔, 허무함이 함께 찾아옵니다. 누구나 겪게 되는 인생 말년의 고독은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죽음의 순간은 모든 사람이 홀로 감당해야 할 절대 고독의 순간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세상을 떠납니다. 우리 생명이 이렇게 낡아가고 좀먹어가는 생명이다 보니, 생명이 복이 아니라, 무거운 짐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 생명이 너무 무거워서 스스로 버리기도 합니다. 유명인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 모든 생명의 고통이 죄로부터 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 언급되는 <생명>이란 단어는 죽음의 반대말입니다. 즉 전쟁터에 포탄이 떨어졌는데, 어떤 병사는 죽었고, 어떤 병사는 살았다고 할 때, <살았다!>라고 외치게 되는 그 사건, 그 기적을 말합니다. 그게 생명이지요. 죽지 않고 산 것, 이게 생명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생명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단지 죽지 않고 살아난 순간적 사건만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복되게 살아있는 지속적 상태>를 말합니다. 즉 <아, 살았다>라고 외칠 때의 그 기쁨과 감격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것을 말합니다. 살아있는 기쁨이 없어지지 않고 계속 유지될 때, 그게 진정한 생명이라는 겁니다. 만약 나중에 <아, 그 때 죽었으면 좋았을 걸...>이라고 말하게 된다면, 그건 참된 생명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은 <그 분 안에 머물러 있는 완전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일시적 사건이 아니라, 변함없이 완벽한 생명이 지속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전에 물이 흐른 적이 있다>고 말한다면, 지금 당장 목이 마른 사람에게는 절망이 됩니다. 한 때 물이 흘렀지만 지금은 물이 말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물이 흐르고 있다>는 말은 목마른 사람에게 축복이 됩니다. 얼마든지 목을 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는 말이 바로 그런 말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그러한 복된 생명이 차고 넘쳐 사람들에게로 흐릅니다.  만약 한 때만 예수님께 생명이 있었다면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는 영원 전부터 생명이 넘쳤고, 그 후로 지금까지, 영원까지 넘쳐흐를 것입니다. 더구나 그 생명은 현재 우리의 생명처럼 한계에 에워싸여 고통 받는 생명이 아니라, 모든 한계를 이기는 축복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이 바로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의 은혜를 두 가지 차원에서 받아야 합니다. 첫째는 처음 태어날 때 받는 생명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두 번째는 죄로 인해 망가지고 고통 받는 생명이 예수님 안에 있는 풍성하고 온전한 생명으로 채워지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려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아, 살았다>라고 소리칠 때의 그 기쁨, 그 감격을 상실하지 않고 평생을 살게 됩니다. 비록 늙고, 병들고, 힘들고 어려워도 생명의 기쁨이 시들지 않습니다. 이런 생명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삶을 사랑하게 됩니다. 은혜를 받기 전에는 살기가 싫었던 사람이 은혜를 받고 나면 삶에 대한 경외심이 생깁니다. 잘 살고 싶은 열망이 생깁니다. 그 삶을 위해 결단하게 됩니다. 날마다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됩니다. 

부산신학교에서 학생으로 저를 만났던 임상이란 신학생이 있습니다. 그는 지금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임 목사님은 부부가 전부 시각장애인입니다. 전혀 보지 못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면 얼마나 살기가 힘들겠습니까? 목사님 부부는 생선을 굽다가 손을 구운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 불편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은혜를 받고나자 삶의 목표가 생겼습니다. 기쁨이 생겼습니다. 언제나 씩씩합니다. 지금은 중국의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선교 활동을 열정적으로 감당하고 있습니다. 두 눈을 뜬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게, 더 긍정적으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힘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던 생명이 목사님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여러분, 이런 은혜를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을 얻으십시오. 단지 숨 쉬고 있기 때문에 살아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매 순간 삶의 기쁨이 넘치길 축복합니다. 매일 아침 눈뜰 때마다 기뻐하게 되길 기원합니다. 백 가지 한계가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생명력 안에서 기뻐할 수 있길 축복합니다. 그래서 <왜 사는가, 어떻게 사는가> 등의 근원적 질문에 정답을 가지고 살길 원합니다. 

이러한 생명은 예수님 안에만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생명이란 은혜를 가지고 우리에게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예수님의 은혜에 부탁하십시오. 그 분에게 인생을 맡기고 기도하십시오. 땅끝교회 성도 모두가 풍성한 생명을 얻길 기원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 10장 10절의 말씀입니다. <주님 영접하는 자 하나님의 자녀요 주님 안에 생명이 있네 주님 앞에 오시오 어서 빨리 오시오 주안에 생명이 있네 예수 안에 생명 있네 주님이 빛이 되시네 예수 안에 생명 있네 주님이 빛이 되시네>  우리 모두에게 생명의 은혜가 가득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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