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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에 부탁함(3) : 은혜의 말씀이신 예수님 (행 20: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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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에 부탁함(3) : 은혜의 말씀이신 예수님 (행 20:17-32)

우리네 인생은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으로 이어집니다. 일반적으로 만남은 기쁘지만, 이별은 슬픔입니다. 특히 이별이 힘듭니다. 그 정이 깊지 않다면 이별이 쉽겠지만, 깊이 정든 경우에는 참 힘들 것입니다. 

종종 집회를 인도하러 갈 때가 있습니다. 한 사흘쯤 지나다보면 저와 그 교회 교우님들이 조금씩 익숙해지고 정이 듭니다. 집회 마지막 시간은 헤어지는 시간입니다. 담임목사님이 강사에게 박수를 보내자고 하기도 하고, 어떤 교회는 교인들이 모두 일어서서 축복송을 불러주기도 합니다. 

얼마 전 담임목사님이 안 계신 교회에 갔었는데, 담임목사님이 안 계시니 박수를 치거나 축복송을 불러주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장로님들이 하시는 말씀이 <땅끝교회에 오래 있었으니 이젠 당신들의 교회에서 목회하는 게 어떠냐?>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이 섭섭함의 표현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어쨌든 집회를 끝내고 떠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정든 사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교회가 평생 몸담고 섬기던 교회라면 어떨까요? 여러분, 교회를 평생 섬기시다가 은퇴하시는 목사님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저도 언젠가는 땅끝교회를 떠날 날이 있겠지요. 고별설교를 하시는 목사님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아마도 그 마음은 아들을 군대에 보내는 마음이거나, 딸을 시집보내는 마음과 비슷할 것입니다. 섭섭하고 마음이 안 놓일 것입니다. 또 좀 더 심하면 사랑하는 자식들을 남겨둔 채로 세상을 떠나는 부모님의 마음과도 같을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평생 최선을 다했습니다. 공부 시키고, 재산도 남겨 주고, 결혼도 시켰습니다. 나름대로 할 일을 다 하셨습니다. 그래도 부모는 마음이 놓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모님이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공부도 많이 못시키고, 재산도 남겨주지 못하고, 결혼도 못 시키고 세상을 떠나는 것이라면 그 마음이 얼마나 더 착잡하고 어렵겠습니까? 마음이 놓이지 않아 눈을 감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어떤 마지막 말을 남기면 좋을까요? 그들을 위해 뭘 어떻게 해 주고 떠날 수 있겠습니까? 

본문 말씀은 에베소교회를 위한 바울 사도의 고별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생각 같아서는 에베소로 직접 가서 교인들을 모두 만나고 싶었지만, 시간에 쫓겼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에베소교회 장로님들을 밀레도로 오시도록 했고, 거기서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하고, 석별의 정을 나누게 됩니다. 

우선 본문을 보면 이별의 섭섭함이 진하게 묻어납니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모두 숙연했을 것입니다. 

당시 바울은 원대한 선교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었지만, 후에 제자들을 통해 땅끝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바울 사도의 가슴은 땅끝 비전으로 설렜습니다. 당시 땅끝은 서바나, 즉 오늘날의 스페인이었습니다. 바울은 장차 로마를 거쳐 서바나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여 땅끝 사명을 완수할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할 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서 거둔 구제 헌금을 예루살렘에 전달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고, 이 소식을 들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의 성도들은 어머니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헌금을 바울 편에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 사도가 소아시아와 마게도냐, 아가야 등 전 지역을 다니면서 유대인의 회당에서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소문이 예루살렘에까지 퍼져 있었던 것입니다.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매우 분개했습니다. 한 때는 자신들의 동지로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서던 바울이 이제는 오히려 예수님이 구원자라고 설교하고 있는 게 너무 못마땅했습니다.그들 중에는 바울을 죽이기로 마음먹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소문이 여러 경로를 통해서 바울의 귀에까지 들려왔습니다. 

이 때 바울의 각오는 어떠했습니까? 본문 22-24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아멘!  이게 바울의 신앙이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목숨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에베소교인 장로님들에게 자신을 다시 볼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실제로 후에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었고, 가이사랴에서 죄수의 신분으로 2년 동안 머문 후, 로마로 호송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님들과 만난 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던 것입니다. 이별의 슬픔, 이게 본문에 진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더구나 본문의 이별이 더욱 마음 아픈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그 어떤 곳보다 에베소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에베소교회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이 있고, 좋아하지 않았다면 섭섭함도 없었을 것이고, 굳이 장로님들을 부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베소는 바울에게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에베소란 도시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제국은 거대한 제국이었습니다. 많은 속주들이 있었는데, 소아시아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중심도시, 즉 오늘날로 말하면 수도나 도청 소재지에 해당되는 도시였습니다. 에베소는 행정, 교통, 경제의 중심지였고, 상업이 번창했던 항구도시였습니다. 

에베소가 이처럼 크고 중요한 곳이었기에 이곳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에 전심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는 무려 3년을 에베소에 머물렀습니다. 본문 31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에베소를 제외하면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머문 것이 가장 오래 머문 곳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에서는 3년이나 머물렀으니, 에베소에 대한 바울의 관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겸손과 눈물로 정성을 다해 모든 것을 다 가르쳤습니다. 18-21절까지 함께 읽어봅시다.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그런데 이렇게 정성들여 사랑하면서 복음을 전한 곳, 거기서 믿게 된 믿음의 자녀들, 그들로 이루어진 사랑스런 에베소교회를 뒤로 하고 떠난 바울은 이제 그 교회의 대표인 장로님들과 마지막 이별을 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섭섭했겠습니까? 사랑했고, 오래 머물렀고, 깊이 정들었습니다. 그들과 헤어져 다시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섭섭하고 슬펐을까요? 그들의 섭섭함은 36절 이하에서 잘 나타납니다.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더구나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는 이유가 또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떠난 후에 에베소교회가 매우 어려운 일들을 만날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바울은 자신이 떠난 후 사나운 이리 같은 자들이 와서 순진한 성도들을 해하고, 갖가지 유혹과 이단들의 공격이 있을 것을 예상하였습니다. 어려움에 봉착할 어린 자식 같은 교인들을 남겨두고 떠나는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무슨 대책을 세워 놓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바울의 절박한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때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이 말씀이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32절을 다같이 읽어 봅시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할렐루야!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바울의 대책은 에베소교회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전 이들을 남겨두고 떠나야 합니다. 저는 더 이상 이들을 돌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들을 맡아주십시오. 주님과 주님의 은혜의 말씀에 이들을 부탁합니다. 이들을 든든히 세워 반드시 승리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많은 돈을 남긴 것도 아니고, 권력을 남긴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돈도, 권력도 없었습니다. 바울의 대책은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도대체 <은혜의 말씀>이 무엇이길래 그들을 부탁했을까요? 

<은혜의 말씀>이란 <은혜로운 말씀>이란 의미입니다. 세상에는 들으면 들을수록 번뇌가 커지고, 사람의 마음을 악하게 하고, 좌절시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말로 우리를 흔드는 존재는 사단입니다. 그러나 들으면 힘이 되고, 양식이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할수록 달게 여겨집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면 마구 살던 사람에게 질서가 생기고, 길을 모르던 사람에게 길이 보이고, 갈등하던 사람의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바라보던 사람에게 영원한 세상이 보입니다. 좌절에서 용기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성품이 넉넉해지고 부드러워지고, 뚜렷한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지게 됩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긍정적 사고를 하게 하고, 사명을 발견하게 합니다. 우리 인생을 아름다운 방향으로 인도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또 <은혜의 말씀>이란 <은혜가 담겨 있는 말씀>을 말합니다. 말씀 안에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찾아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 안에 있는 은혜가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르쳐 주고,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믿음을 줍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로마서 10장 17절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그 믿음은 우리를 승리로 인도할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4절을 보면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승리하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이긴 사람들의 예를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백 살에 낳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시험을 어떻게 통과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믿음으로 통과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7절 이하를 보면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그는 이삭을 통해 후손을 번성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삭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설령 이삭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줄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그로 하여금 위대한 행동을 하게 했습니다. 

또 다니엘은 <앞으로 한 달 동안은 오직 다리오 왕에게만 기도하고 그 외의 어떤 신에게도 기도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사자굴에 넣으리라>는 왕의 명령 앞에서도 어떻게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고 굳건히 설 수 있었습니까? 그것 역시 믿음의 힘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3절은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라고 했는데, 이는 다니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니엘은 계속 하나님께 기도했고, 결국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입을 막으실 것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보호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선배들은 모두 믿음으로 승리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굳센 믿음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런 믿음은 어디서 얻습니까? 다름 아닌 말씀에서 옵니다. 말씀 안에는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은혜를 구하러 굳이 여기저기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 안에 은혜가 담겨 있고, 그 말씀은 이미 우리 손에 있습니다. 여러분, 말씀을 가까이 하시길 바랍니다. 말씀에 가까이 하는 것이 곧 은혜에 가까이 하는 것이요, 참되고 강한 믿음을 얻는 지름길입니다. 

말씀 안에 이런 놀라운 은혜가 담기게 된 경위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곧 말씀이시고, 그 말씀이신 예수님 안에는 은혜가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 본대로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는데, 그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곧 예수님이시고, 그 예수님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기 때문에, 말씀 안에 은혜가 충만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그냥 말씀이 아니라, <은혜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이 영적 비밀을 알았기에 바울 사도는 에베소교인들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라고 한 것입니다. 주님이 곧 말씀 안에 계신 은혜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인들을 은혜의 말씀에 부탁한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울이 떠난 후 수많은 환란과 핍박과 유혹이 에베소교회에 밀어닥쳤습니다. 그러나 에베소교회는 든든히 서서 소아시아 지역의 어머니교회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비결은 다름 아닌 <은혜의 말씀이 그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32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라고 했지요? 그 다음을 보십시오.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그렇습니다. 말씀 안에는 은혜가 있어서 우리를 든든히 세웁니다. 거룩하게 합니다. 그리고 기업을 얻게 합니다. 누구나 은혜에 말씀에 사로잡히면 그 누구도 손대지 못할 강한 사람이 됩니다. 말씀의 능력이 그를 붙들 것입니다. 은혜의 말씀, 이게 바로 승리의 비결이었습니다.  

저도 바울처럼 은혜의 말씀에 우리 자신과 자녀들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말씀의 능력을 믿읍시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를 변화시키고, 삶의 고통을 이기게 하고, 새로운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올리십니다. 말씀 그 자체가 은혜요, 능력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 설 때마다 말씀 안에 있는 은혜와 그 은혜의 능력을 믿습니다. 제가 하는 이 설교는 부족하기 짝이 없는 저라는 사람이 합니다. 저는 은혜를 끼칠 수도 없고, 변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고, 그 은혜가 믿음을 주고,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는 힘을 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저는 계속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잘 하던 못하던 상관없이 말씀이 은혜이기 때문이고, 성도님들에게 축복이 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내년에 새로운 노력을 해 보고 싶습니다. 내년도 우리 교회의 표어를 <말씀과 함께 새 역사를 향하여>라고 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내년에는 이렇게 해 보길 원합니다. 전 교인이 1년에 성경을 1독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매일 세 장씩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세 장의 말씀 중에서 몇 절을 골라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본문을 가지고 매일 새벽기도회에서 나누고, 수요예배 때도 그 날의 묵상 말씀을 생각하고, 주일 예배도 일주일간의 본문 중의 하나를 골라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주보에 한 주간의 성경 읽기와 묵상할 본문과 각 본문을 묵상하는데 필요한 몇 가지 설명과 질문, 그리고 적용 질문을 넣어 드릴 것입니다. 쉽지 않은 힘든 여정일 것입니다. 그렇게만 몇 년만 한다면 온 교우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더 깊이,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적 작업은 어른들만 하는 게 아니라, 학생과 어린이들도 함께 하도록 할 계획입니다. 학생들과 어린이들도 부모님과 같은 본문으로 묵상하도록 할 것입니다. 가정에서 여건만 된다면 부모님과 자녀들이 그 날의 말씀을 함께 생각하면서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부모님과 자녀가 말씀을 통하여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해 보고 싶습니다. 

여러분,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그 안에 은혜를 담아가지고 우리에게 탄생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과 가정과 영혼과 우리의 미래를 은혜의 말씀에 맡기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따라 사시길 바랍니다. 성서주일을 맞이한 오늘 다시 한 번 말씀에 대한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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