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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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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요한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아주 간결하고 단순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문장을 살펴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는 본문 14절의 말씀이다.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을 ‘성육신’ 혹은 신학 용어로 ‘인카네이션(Incarnation)’이라 부른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성육신이 사도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께서 종의 형체를 가진 것이라면 요한에게는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다. 

성육신은 죄인 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참 인간이 되신 즉 하나님의 자기 비움과 겸손 그리고 ‘낮아지심’의 표현이다. 성경을 살펴보면 예수의 제자 사도들은 성육신에 대한 신앙을 처음부터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처음 예수에 대하여 가진 인식은 ‘마리아의 아들’, ‘나사렛의 예수’, ‘목수의 아들’, ‘선생(랍비)’, ‘선지자’, ‘혁명가’, ‘기적을 행하는 사람’ 등으로 불린다는 것이었다. 그 후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예수에 대하여 알기 시작했다. 예수의 가르침,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 빈 무덤(부활) 등을 통해 참 예수에 대하여 알기 시작한 것이다. 

사도행전은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을 체험하면서 예수에 대하여 폭발적으로 알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요한복음서가 복음서 중에서 가장 늦은 시기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참고해 본다면‘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는 요한의 고백은 그가 처음 예수의 제자가 되었던 시기가 아니라, 제자가 된 후 또한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알게 된 사실일 것이다.

요한은 이 말씀을 깨닫게 되기까지 많은 사건들을 경험했을 것이다. 또한 그 사건들은 예수와 관련된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많은 시간을 묵상하며 기도했고 고민했을 것이다. 실제 예수와 함께 생활했던 것과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오랜 경건의 시간을 통해 그가 예수에 대하여 도달한 결론은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다’라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는 말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말이 아니다. 이 말 속에는 어려운 신학적인 의미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요한이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고 기도하며 묵상하며 또한 삶 속에서 체험한 예수가 녹아져 있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는 말에 이어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생활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시간이 흐르고 있는데, 하나는 실제 요한이 예수와 함께 생활했던 과거의 시간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요한의 현재 시간 즉 부활 후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더 이상 요한의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로,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현재를 의미한다. 요한이 고백하는 예수는 과거에도 요한과 함께 하셨고, 현재에도 요한과 함께 하고 계신다. 

이런 예수를 요한은 ‘본다’라고 본문에서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여기서 ‘본다’라는 것은 다시 보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의 것은 잊혀지기 쉽고 현재의 것은 무관심해지기 쉽다.” 실제 눈에 보이는 예수의 일은 이미 지나간 과거이다. 우리와 함께 생활하셨던 예수는 오랜 기억 속에서나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과거의 기억은 잊혀질 수밖에 없다. 현재의 삶 속에서 함께하시는 예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예수는 무관심의 대상이 되기 싶다. 보이지 않고 느낄 수 없으니 무관심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를 고백하면서 다시 본다는 의미로서 ‘본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과거에 실제로 함께하셨던 예수를 다시 생각해 보고 현재에도 함께하시는 예수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았을 때, 요한이 본 것은 예수의 영광이었고 또한 그 영광 속에 있는 충만한 ‘은혜와 진리’였다.(여기서 ‘영광’은 빛으로 번역될 수 있다.) 요한의 지나온 삶은 예수께서 함께하시고, 예수와 친밀하게 연결된 삶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의 삶은 예수의 빛으로 충만했고 또한 그 빛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했던 것이다.

요한이 오랜 신앙의 삶을 통해 깨닫게 된 본문의 말씀 ‘육신이 되신 예수’를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하지만 요한이 알게 된 것과 우리가 성경을 통해 읽고 알게 된 즉 문자적으로 알게 된 것은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왜냐 하면 요한은 위에서 언급한 내용처럼 예수의 제자가 된 이후 계속해서 예수와 함께하며 자신의 삶을 통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를 알게 되었고, 그렇게 알게 된 예수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를 문자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도 요한처럼 우리의 지나온 삶을 다시 한 번 뒤돌아보며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다시 봄”을 통해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지금까지 살아온 삶은 요한처럼 예수와 함께했던 시간들임을 보아야 한다. 또한 요한처럼 예수와 함께했던 시간이라면 그 가운데 함께하시는 예수의 빛을 찾고 바라 볼 수 있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빛 속에 있는 충만한 은혜와 진리까지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곧 자신의 지나온 삶을 은혜와 진리로 다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정녀 마리아 탄생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면 결혼하기도 전에 처녀가 임신했다는 사실로만 비춰질 수 있고, 그것은 율법 조항으로는 돌에 맞아 죽을 부정한 행위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요셉은 그것을 은혜로 받아들였고 천사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 또한 진리로 받았기에 마리아를 받아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과도 같은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이제 2011년도 얼마 남지 않았고 다음 주일은 성탄절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지난 1년은 어떤 시간들이었습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지나온 삶은 어떠한 삶이었습니까? 우리는 지난 1년을 정리하면서 또한 지나온 삶을 뒤돌아 볼 때, 혹 은혜와 말씀 없이 우리의 지나온 삶을 바라보지는 않습니까? 은혜와 말씀이 없는 우리의 삶은 불 꺼진 장작개비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재만 남은 부정적인 모습으로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형상이 아닙니다. 후회와 아쉬움만이 남습니까? 상처나 아픔으로 기억조차 하기 싫습니까? 

이러한 지난 삶의 기억들을 이제는 우리도 요한처럼 은혜와 진리를 통해 다시 한 번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뒤돌아 볼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변함없이 함께하셨던 예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예수는 오늘 지난 1년을 후회하고 상처와 어두움으로 아픔만 남기려고 하는 우리의 삶 속에 빛으로 다가 올 것입니다. 또한 그 빛은 우리에게 지나온 시간들을 은혜와 말씀이 충만함으로 예수의 빛으로 가득한 삶이었음을 고백하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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