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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의 능력 (느 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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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능력 (느 8:1-12)


느헤미야서는 포로기 이후 유다 공동체의 재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멸망을 당한 뒤,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70년 만에 저들이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크게 세 차례로 나뉘어 돌아왔습니다. 

1차 포로귀환은 주전 537년 스룹바벨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2차 포로귀환은 주전 458년에 에스라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3차 포로귀환은 주전 444년에 느헤미야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저들이 포로 귀환 한 뒤에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선 성전을 재건했고, 그리고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이 둘을 재건하느라 정말 온갖 고초를 다 겪었습니다. 주전 530년  경에 시작된 공사가 주전 445년경에 끝이 났습니다. 그러니까 무려 85년이 걸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건 사역 도중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재건 사역 도중에 태어나서, 평생을 이 재건 사역에 몸 바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드디어 저들은 재건 사역을 완성하게 됐습니다.

그 황량했던 예루살렘 땅에 성전이 웅장하게 들어섰습니다. 이제 저들은 꿈에도 그리던 성전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언제라도 원하는 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폐허가 됐던 예루살렘 성이 다시 과거의 위용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난공불락의 천혜의 요새가 저들을 지켜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포로 귀환 후에 유다 공동체가 온전히 재건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른 차원의 재건에 나섰습니다. 바로 영적 부흥입니다. 지금까지는 눈에 보이는 성전을 재건하는데 힘썼다면, 이제부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을 재건하는데 힘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외적인 형식을 재건해왔다면, 이제부터는 내적인 본질을 재건하고자 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이야 말로 성전재건축을 진행하고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점을 깊이 느끼게 됐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성전재건축을 이루려면, 단지 눈에 보이는 교회당의 재건축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 재건축 즉 우리의 영적 부흥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들이 어떻게 영적 부흥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 자발적 참여

본문을 필두로 8장에서 10장까지 이어지는 영적 부흥의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 주요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 ‘8:1-12’의 율법 낭독 사건과 ‘8:13-18’의 초막절 준수 사건과 9장-10장의 ‘회개와 서약’ 사건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원어 성경을 보면, 이 세 사건이 시작되는 8:1, 8:13, 9:1을 보면 모두 같은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로 “와예아스푸”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문법적으로 “모이다”라는 뜻의 “아삽”이라는 동사의 재귀형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몰려들었다”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느헤미야는 이 세 가지 영적 부흥 사건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스스로 몰려들었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이 영적 부흥의 성공 요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절을 상반절을 보면,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라고 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수문 앞 광장으로 모여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백성들의 자발적인 참여입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해 보면, 백성들의 적극적인 자발적 참여입니다. 바로 이런 백성들의 태도가 영적 부흥의 토양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14년 전 처음 중국교회에 참여했을 때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중국의 깊은 산골 농촌 교회인 [삼성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사천성 수도인 성도에서 당시 비포장도로로 다섯 시간 정도를 폐차 직전의 작은 자동차를 타고 달렸습니다. 사천성 간양현 삼성진이라는 아주 작은 마을 뒷산에 있는 허접한 창고를 개조한 교회당에 도착했습니다. 

깊은 산골마을이어서 그저 많아야 40-50명 정도 모였을 것이라 추측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당에 들어서니 교회당 안에 약 800여명과 자리가 없어 마당에 서 있는 사람들이 약 700여명 도합 1500여명이 예배를 드리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앞에 있는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예배드리기 위해 3시간을 걸어왔다는 것입니다. 예배 4시간 드리고 또 3시간을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매주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답니다. 그 옆에 있는 할머니는 네 시간을 걸어왔다는 것입니다. 산골이어서 버스가 하루에 두 번 다니는데, 시간을 맞출 수도 없고 또 돈이 없어 버스를 탈 형편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했습니다. 누구하나 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 말씀이라도 땅에 떨어질까 정성을 다해서 경청했습니다. 설교 도중 감동이 되는 장면에서 뜨겁게 박수를 쳤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분들의 예배 태도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삼성 교회는 지금 크게 부흥했습니다. 우리가 후원해서 교회당을 잘 지었습니다. 유치원도 하게 됐습니다. 훌륭한 목사님도 모시게 됐습니다. 

이 삼성교회의 모습은 현재 전반적인 중국교회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적극적인 자발적 참여가 눈에 띱니다. 그래서 중국교회가 전체적으로 부흥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해 전에 독일 교회를 돌아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독일은 형식적으로는 기독교 국가입니다. 국민들이 종교세를 냅니다. 그 돈으로 성직자들이 봉급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목사와 신부는 준공무원인 셈입니다. 그리고 그 돈이 교회로 보내져 지역 사회에 구제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주일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은 3%가 안 됩니다. 그리고 성직자들도 여름이면 두 달간 교회 문을 닫고 지중해 지역으로 휴가를 떠납니다. 갈수록 모이지를 안습니다. 그래서 점점 영적 쇠퇴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부흥하려면,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적극적인 자발적 참여가 필수적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의 한국교회는 저 유럽교회를 닮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칫 한국교회의 부흥의 촛대가 저 중국교회로 옮겨갈 것 같아 불안합니다. 

우리교회는 어떻습니까? 감사하게도 아직은 열심히 모이고 있습니다. 이제 성전을 건축하고 입당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더욱 모이기에 힘서야 하겠습니다. 적극적인 자발적 참여가 더욱 필요한 시점입니다.

2. 말씀에 대한 사랑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적극적인 자발적 참여 후 보인 행동입니다. 저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무엇을 했느냐 입니다.   

본문 1절 하반절을 보면,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 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라고 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학사 에스라에게 율법책을 가져와 달라고 청했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촛불집회가 유행입니다.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거리로 몰려나옵니다. 그리고 콘서트 형식의 모임도 유행입니다. 청춘콘서트니 해서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자발적인 모임입니다. 

모여서 무엇을 합니까? 우리 사회의 현안의 문제를 논의합니다. 때로는 잘못된 문제들을 비판합니다. 때로는 개혁과 변화를 촉구하고 시위를 벌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정치적인 모임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모임도 비슷합니다.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모였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한 행동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한 것입니다. 학사 에스라에게 율법책을 가져와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2-3을 보면, 학사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져와 읽었습니다. 그 때 백성들이 새벽부터 정오까지 말씀 낭독에 귀를 기울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5절을 보면, 에스라가 백성 위에 서서 율법책을 폈습니다. 그 때 모든 백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또한 6절을 보면 에스라가 율법책을 읽으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 때 모든 백성들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하고 응답했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을 경배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했습니다. 이런 말씀에 대한 사랑이 영적 부흥의 힘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문은희라는 시인이 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백이라면
그 중 하나는 나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열이라면 
그중 하나는 나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뿐이라도
그는 바로 나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그건 내가 이 세상에 없는 까닭일겁니다.

이런 사랑이 두 사람의 행복을 일구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 없이는 두 사람의 행복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 119:97을 보면,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해 놓고 있습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옲조리나이다” 바로 이런 말씀에 대한 사랑이 한 사람의 영적 부흥을 일으키는 힘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이스라엘에 새로운 영적 부흥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꿈에도 그리던 예루살렘 성전을 봉헌했습니다. 이제 원하면 언제든지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지난 날 성전이 없어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없던 때와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성전 중심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영적 부흥을 이를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렇습니다. 성전에 나와 영으로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영적 부흥에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더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영적 부흥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가 살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열심을 품고 교회에 자발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우리들 마음 가운데 불 일듯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늘 말씀을 가까이 하고, 늘 말씀을 읽고, 또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3. 말씀의 능력 체험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제로 영적 부흥이 일어난 원인이 말씀의 능력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지만, 이것들은 다 영적 부흥을 위한 간접적인 원인일 뿐이었습니다. 영적 부흥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말씀의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 점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8-9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깨닫게 하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 지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그리고 감동을 받아 울었다는 것입니다.


한 집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상도동으로 이사를 와서 교회를 정하기 위해 몇 교회를 탐방하고 있었답니다. 남편은 모태신앙으로 교회는 다니는데 늘 예배 시간에 졸다오는 사람이었답니다. 우리교회에 첫 예배를 드리기 위해 참여했답니다. 그런데 설교시간 내내 왠지 계속 눈물이 흐르더랍니다. 그리고 남편도 전혀 졸지 않고 눈을 크게 뜨고 설교를 듣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교회에 등록하게 됐고, 지금은 교회에서 큰 몫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 우리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때로는 마음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또 때로는 눈물이 나기도 합니다. 더 심할 경우 통곡을 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현상일까요? 우리 심령을 기경하는 것입니다. 마치 농부가 봄철에 농사를 짓기 전, 겨우내 얼어붙었던 밭을 기경하는 것과 같습니다. 

본문 13절 이하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학사 에스라를 통해서 말씀의 내용을 자세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초막절을 지키라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초막절에 초막을 지으라는 명령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저들이 그 말씀 그대로 순종하여 초막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예외 없이 다 그 초막 안에서 거하면서 절기를 지켰습니다. 

17절을 보면,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한 일이 없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며...” 저들이 말씀을 듣고 철저하게 그 말씀대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초막절을 하나님의 명령 그대로 지킬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을 새롭게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을 새롭게 변화시킵니다. 바로 말씀의 능력이 심령을 부흥시키고, 교회의 영적 부흥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성전을 재건축하고 있습니다. 머지  않아 새성전에 입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새성전에 입당하는 것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가 새성전에 입당함과 동시에 영적 부흥이 다시 한번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모이기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여 새롭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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