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대림절] 왕께 경배하라 (마 2:1-12)

첨부 1


왕께 경배하라 (마 2:1-12)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뉴욕에서는 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가정마다 유리창에 별을 하나씩 만들어 붙여 놓았습니다. 한 남자가 어린아이와 함께 밤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이 꼬마는 각 집마다 불이 켜져 있고 유리창에 빛나는 별이 달려있는 것을 보고 멋있다고 손뼉을 치며 좋아했습니다. 이집 저집 지나치면서 집집마다 별을 달아둔 것을 보고는 꼬마가 “아빠, 저것 보세요. 왜 집집마다 별을 달아 뒀을까요?”하고 물었습니다. “저것은 아들을 전쟁터로 보낸 표시란다.” 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어린아이는”아빠 저 집에도 아들을 전쟁터로 보냈나 봐요. 저 집에는 별이 두 개나 달렸어요.“ 하고 외치던 아들은 고개를 들어 하늘에서 빛나는 무수한 별들을 보았습니다. 그러고는 깜짝 놀라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아빠 저기보세요. 하나님도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셨나 봐요. 별이 저렇게 많이 빤짝이고 있잖아요!“

그렇습니다. 이 천진한 어린아이의 말처럼 우리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미혹에 빠져 죄의 종이 된 채 멸망으로 끌려가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 예수님은 십자가의 피로 승리하시므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제 다음 주일은 우리의 구원자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는 크리스마스입니다. 

이에 대해 신약성경 요한복음 3장 16절에“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가장 큰 선물을 주신 날이 성탄절입니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지 다 명절은 있습니다. 그러나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지구촌의 명절은 성탄절 외에는 없습니다. 가장 귀한 명절, 가장 즐거운 명절, 가장 큰 세계적인 명절이 성탄절입니다. 2천여 년 전 아기 예수로 탄생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들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귀한 성탄절을 앞둔 이 시간 성탄절이 세계적 명절이 된 이유와 성탄절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一. 왜 성탄절이 지구상에서 가장 큰 명절이 되었을까요?

1. 세상에서 가장 높으신 분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의 지위는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권능은 전능자이십니다. 한 나라의 통치자에 비길 분이 아니십니다. 우주의 설계자, 우주의 건설자, 우주의 관리자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 요한복음 1장 3절 말씀에“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고 말한 나폴레옹이 1821년 5월 5일 유배지 세인트 헤레나드 섬에서 죽으면서“나사렛 예수는 승리자요 나는 패배자로다.”라고 말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미국의 국부(國父)로 불리는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백악관 뒤뜰의 흰 눈 위에 엎드려 나라를 위해 간절하게 눈물로 도움을 구했던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계정치사의 가장 위대한 정치인으로 불리는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 집무실 카펫을 쥐어뜯으며 몸부림을 치듯 도움을 간청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일본 천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전쟁영웅 맥아더 장군이 태평양 전쟁의 승리를 위해 밤을 새워 기도하며 도움을 구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발명왕 에디슨과 그의 어머니가 하루 두 시간씩 에디슨에게 지혜를 주시기를 간청하며 기도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처럼 세계를 움직인 위인들이 한결같이 받들어 섬긴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분께서 오신 날이 곧 성탄절입니다.

2. 세상에서 가장 고마우신 분이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 세상을 구경하시고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 인사차 오신 것도 아닙니다. 삶의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오셨습니다. 일반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난제들을 해결하시고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해결하시고자 오셨습니다. 죽음의 문제, 죄악의 문제, 질병의 문제, 근심과 걱정의 문재들을 해결해 주시고자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하셨습니다. 

인간의 본향 하늘나라를 잊고 살아가는 소경 같은 인간들에게 영화로운 하늘나라를 알게 하시며 그곳으로 인도하시고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하신 말씀이 그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나아갈 길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승리의 길입니다. 행복의 길입니다. 참 평안의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6절에 말씀하시기를“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하셨습니다. 

二. 이 귀한 성탄절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1. 당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처럼 지키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에 그 징조로 이상한 별이 나타났습니다. 이 별을 동방의 박사들이 발견했습니다. 이들은 천문학자들이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국경을 넘어 예루살렘까지 와서 헤롯왕에게 이 사실을 말하며 왕이 나신 곳을 물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헤롯왕은 성경의 전문지식을 지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불러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이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대답한 내용을 마태복음 2장 5절~6절에 기록하기를“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서기관들은 이처럼 구약 율법에 능통하며 구약의 구전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율법 해석자요 교사였습니다. 이 서기관을 가리켜 율법사라 불리기도 했고, 때로는 랍비라 칭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지식에 능한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큰길가에서 종을 치고 모인 사람들에게 축복기도를 하며, 구제품을 나눠주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선생들이며 최고의 종교도자들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전해들은 헤롯왕이 서기관들에게 그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서기관들은 메시야께서 오실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메시야 이신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장소까지 알아 베들레헴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 베들레헴으로 갈 때에 함께 가지 않았습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들은 누구보다 가장 먼저 달려가서 경배해야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알긴 했지만 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지식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실천이 없었습니다. 말은 있었지만 행동은 없었습니다. 이러한 경우를 가리켜 야고보서 2장 26절에 말씀하시기를“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훗날 이들을 가리켜“회칠한 무덤 같은 자”“외식하는 자”“독사의 새끼”라 책망하셨습니다. 

성탄절을 맞아 축하카드와 선물을 주고받으며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도 잘하는 일입니다. 이런 것이 없다면 어찌 성탄절 분위기가 조성되겠습니까? 하지만 이러한 것들로 만족하고 만다면 우리가 지키는 성탄절이나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의 외식적 행위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동방박사들처럼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작은 마을 한 가정의 말구유에 계셨습니다.

지금은 주님이 어디에 계실까요? 높은 곳 하늘나라에 계십니다. 그러나 그곳에만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 오셨듯, 스스로 작게 여기는 마음에 오시며 그곳에 머무시기를 즐겨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려면 작아져야 합니다. 낮아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낮고 천한 말구유에 오셨듯, 낮아진 마음에 오셔서 머물러 계시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에는 예수님 탄생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낮고 작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절대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 문 위에“겸손의 문”이라 쓰여 있습니다. 허리를 깊이 숙이고 이 겸손의 문을 통해 들어가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상징하는 별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은 겸손한 사울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왕이 된 후 그만 교만해지고 말았습니다. 교만에 빠진 사울왕은 하나님께 버림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울은 성경 최초의 자살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만한 사울을 대하여 사무엘 선지자가 책망한 내용을 사무엘상 15장 17절에 기록하기를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작게 여긴 사울을 들어 왕을 삼으셨으나, 스스로 크게 생각하며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그를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성경 잠언 18장 12절에 교훈하시기를“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마을 베들레헴의 낮고 천한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낮아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와 함께 머물러 계시기 위함입니다. 

2. 예루살렘 시민들처럼 지키면 안 됩니다. 

동방박사들로부터 메시야가 탄생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주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마태복음 2장 3절에 기록하기를“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고 했습니다. 소동했다는 것은 불안해하고 당황하면서 혼란스러웠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성탄 소식을 듣고 나타낸 반응입니다.

오늘의 경우는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불안하고 당황해서 혼란스러워 하지는 않을 줄 압니다. 다만 성탄의 의미를 깊이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오는 혼란스러움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크리스마스가 하루하루 닥아 올수록 즐거움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미 없이 떠들썩한 분위기에 휩싸인다면 이는 또 다른 소음공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영광을 버리시고 낮고 추한 이 세상에 왜 오셨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다짐하면서 성탄절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지금 다시 오신다면 나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3. 베들레헴 사람들처럼 지켜도 안 됩니다. 

베들레헴은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시리라는 선지자들의 예언으로 잘 알려진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은 아무도 예수님이 탄생하신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기 예수는 뉠 자리 없어 찬바람 부는 겨울 짐승의 구유에 뉘셔야만 했습니다. 아마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산기를 느끼는 아내 마리아를 위해 이집 저집 허겁지겁 뛰어다니며 출산할 방을 구하고자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 요셉의 애타는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누구하나 방을 양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셉은 어쩔 수 없이 바람막이라도 되는 곳을 찾은 것이 마구간이었을 테고, 그 마구간에서도 좀 깨끗한 곳을 찾은 것이 말구유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아기 예수님께 보여준 베들레헴 사람들의 인심이었습니다. 차가운 날씨만큼이나 그들의 마음도 차가웠습니다. 이웃의 어려움에 대한 호소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안일만 생각하는 이기심으로 가득했던 것이 당시 사람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성탄절은 미움과 갈등을 씻고 사랑을 나타내는 절기입니다. 성탄절은 어려운 이웃을 찾아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베푸는 절기입니다. 성탄절은 내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심을 벗어버리고 이웃의 입장을 우선 고려하는 절기입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4. 동방박사들처럼 지켜야 하겠습니다. 

동방박사들이란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인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만 그들은 별을 연구하는 천문학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성탄절을 어떻게 맞이했습니까? 별을 보고 유대나라에 왕이 탄생했음을 알았습니다. 본문 2절에“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했습니다. 

별과 인간의 생애를 결부시키는 것은 유대인을 위시하여 이방 세계의 공통된 관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예언으로, 민수기 24장 17절에“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이 예언의 말씀을 확인하고 예루살렘까지 왔는지 아니면 갑자기 나타난 이상한 별이 유대나라 위에 나타났으므로 예루살렘까지 왔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별을 보고 왕에게 경배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의 모습에서 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동방박사들은 깨달은 것을 실천했습니다. 
별을 보고 유대에 존귀한 왕이 태어났음을 깨닫고 그곳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즉시 예물을 준비하여 국경을 넘어 예루살렘까지 달려 왔습니다. 이 동방이란 나라를 여러 나라로 추측을 합니다. 메대, 파사, 아라비아, 바벨론, 팔티아, 그리스, 인도, 애굽 등의 나라로 추축을 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먼 곳이었습니다. 요즘처럼 교통이 발달된 시대가 아닙니다. 낙타를 타고 가야하는 먼 여행이었습니다. 사막을 지날 때면 물이 없어 갈증의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골짜기를 지날 때면 맹수와 도둑의 위험을 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메시아를 만나고자 머나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오늘날 이 땅위에는 악인 줄 알면서 그 악을 끊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고, 선인 줄 알면서 선을 행치 않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악인 줄 아는 시간이 그 악을 끊는 시간이 되어야 하며, 선한 것임을 아는 시간이 선을 행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잘못됨을 아는 시간이 그 잘못을 고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워 알고 있는 지식이 뇌리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교만이란 역작용을 일으킵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에“지식은 교만하게 하며...”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지식으로 교만해진 사람을 향해 고린도전서 8장 2절에 교훈하시기를“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지식을 쌓아야 하는 궁극적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행하기 위함입니다.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사십일을 더 세상에 계시다가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8장 19절~20절에 이에 대해 기록하기를“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내용을 살펴보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 가서 복음을 전하여 제자 삼으라. 둘째, 세례를 주라. 셋째,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가서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게 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 믿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세례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배움의 목적이 실천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많이 읽고 들어 알지만 행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아직 성경을 안다거나 배웠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배웠다면 그것은 잘못배운 것입니다. 잘못 배운 것은 배우지 않은 것보다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동방박사들의 아는 것에 대해 실천하는 모습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동방박사들은 경배하며 예물을 드렸습니다. 
본문 11절 말씀에“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들입니다. 결코 돈 많은 부자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정성을 다해 아기 예수님께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 예물을 드릴 때 보아주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체면을 위한 예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갓난아기였으므로 예수님께 어떤 도움을 받고자 드린 뇌물성의 예물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누구에 의해 강요당한 예물은 더욱 아니었을 것입니다. 순수한 정성으로, 왕의 왕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황금은 보물의 상징이며, 변함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신하가 왕께 존귀와 변함없는 충성을 맹세하며 드리는 상징물입니다. 

유향은 값비싼 향료로서 아라비아 지방의 관목 껍질에 자국을 내어 얻는 향으로 색깔이 흰색이라 유향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향은 성전제사의 분향에 사용되었습니다. 이 유향의 향기는 2km까지 퍼지며, 그 향기는 100일 동안 지속되는 고귀한 향이라고 합니다. 이 유향은 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예물인 것입니다.

그리고 몰약 역시 아라비아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에서 추출된 액체로서 상당한 고가품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몰약은 시체를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나 마취제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 몰약도 매우 귀한 사람의 시체에만 사용할 정도로 고가품으로 알겨지고 있습니다. 이 몰약은 예수님께서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예견하고 드린 예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탄절을 맞는 우리들은 무슨 예물을 드려야 하겠습니까? 우리들에게는 비록 황금은 없을지라도 금보다 귀한 믿음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유향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복음증거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재자로 오신 그리스도의 남은 사역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에겐 몰약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 세상에 오셨고,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며 헌신하며, 기쁨으로 봉사하려는 다짐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즐거운 성탄절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처럼 말로만 지켜서는 아니 됩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준비 없이 혼란에 빠져도 아니 됩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처럼 몰인정한 마음으로 지켜도 아니 됩니다.

우리들이 본받을 모습은 동방에 온 박사들의 모습입니다. 깨닫는 대로 실천하며, 내 모든 정성을 다해 경배하는 아름다운 심령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