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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사 6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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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사 60:1-9)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삶의 전환기가 찾아옵니다. 이 전환기는 대개 고난과 시련을 수반합니다. 이 때 고난과 시련을 잘 극복하면 새로운 삶을 출발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하면 그대로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미국에 한창 금광 경기가 좋을 때 광부들을 위한 텐트와 여러 가지 야외 시설을 위한 천막이 많이 소요되었습니다. 한 천막업자가 금광 붐을 타고 텐트에 재미를 보면서 천막 원단을 엄청나게 많이 쌓아두었는데 갑자기 금광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천막 수요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사업이 망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고, 야적장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텐트 원자재를 쳐다볼 때마다 처분할 방법이 없어 절망의 한숨만 나왔습니다. 이 업자는 그래도 길이 있으리라 믿으며 천막 원단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을 찾았습니다. 

마침 한 광부의 작업복을 쳐다볼 때 섬광처럼 스치는 아이디어가 있었습니다. 험한 일을 하는 광부에게 튼튼한 천막 원단으로 바지를 만들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 처음으로 청바지를 만들어 광부에게 입혔을 때 상상외로 반응은 좋았고, 이후 청바지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의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삶에 지친 우리의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에 힘을 주셔서 일으켜 세우시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열등의식과 좌절감과 패배감의 상처를 씻기시고 치료하셔서, 우리가 이 모든 어려움을 능히 헤치고 나가 풍성한 복을 누리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앉은뱅이 걸인이 새 인생을 찾은 것처럼 지금 여러분의 지친 손을 붙잡고 “일어나 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결코 나는 일어설 수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제 앉은뱅이 삶의 모습에서 단호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십시오. 
2012년도 우리는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라는 표어아래 한 해를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어나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눈을 들어 사방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사60:4~5)
우리가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빛은 결코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그마한 틈만 있어도 그 틈으로 빛은 새나갑니다. 
본문 1절은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이미 우리 가운데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앉은뱅이의 신앙이었다고 해도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 성전 미문 앞에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처럼 이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 우리 마음에 비쳐진 하나님의 빛이,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우리로 하여금 일어나 빛을 발하게 하는 큰 능력이 되심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 능력 내 의지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의 능력이 나를 하나님의 역사의 산 증인이 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눈을 들어 사방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우리는 부족하고, 우리는 지극히 작아서 아무 힘도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아브라함은 달랐습니다. 물론 저가 처음부터 남달랐다고 해도 여전히 연약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 가나안까지 들어옵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은 너무도 메마른 땅입니다. 지중해 해변길이나 요단 강가를 빼놓고 본다면 유대 광야 유대 산지 사마리아 산지로 이어지는 아주 척박한 땅입니다. 하나님이 비를 내려주시지 않으면 살 길이 없습니다. 그래 우기에 내리는 비를 바위산에 굴을 파서 그곳에다 담아둡니다. 그 물을 가지고 건기 동안 버팁니다. 그나마 건기 막바지에 무르익는 포도가 있기에 포도즙으로 물을 대신하여 우기가 오기까지 견뎌내는 것입니다. 그런 땅에 비마져 오지 않는다면 아주 절망입니다. 

그건 아브라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땅까지는 하나님의 지시하심대로 따라오기는 했지만 막상 약속의 땅에 도착했을 때 그가 처음 경험하는 가뭄은 그의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래 가뭄 걱정이 없다는 애굽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될 때 귀가 솔깃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한데 막상 애굽에 내려가고 보니 이제는 자칫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내가 아주 잘 생겼어요. 

그러다 보니 애굽의 권력자가 아내를 탐내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아 갈지도 모른다는 염려로 가득했습니다. 그래 기껏 생각해 낸다고 하는 것이 아내와 짜고 오빠 동생하기로 한 겁니다. 사실 그들이 이종 사촌 간이기도 했으니 백 프로 거짓말은 아니지만 정확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부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내를 빼앗기지 않습니까? 다행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 까닭에 바로가 깜짝 놀라서 다시 보냈기에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자칫 아내를 빼앗기는 어리석은 남자가 되고 말 뻔했습니다. 

결국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는데 그 동안 늘어난 가축 때문에 조카 롯과 함께 머물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래 조카에게 네 마음대로 좋은 곳을 고르라고 합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보니까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합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겨갑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택할 수밖에 없는 그 반대쪽은 어떤가 하면 유대 광야입니다. 메마른 땅입니다. 풀 한 포기 찾아보기 힘든 땅입니다. 한데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사방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바라보는 땅을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사방을 바라보라는 것은 바라보는 대로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사방을 볼 때 어떤 마음으로 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내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을 주신다고 하는 믿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보세요. 아브라함에게 네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실 때 그 사방에 보이는 것은 절망스런 모습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절망의 눈으로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절망처럼 보이는 그 안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역사, 그 안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그 안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채우심, 그 안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브라함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실패를 통해 얻게 된 교훈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도 바로 그것입니다.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의 눈이 우리들에게 열려야 합니다. 광야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더니 무리가 다 모여 내게로 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이 바로 이 사방을 보는 믿음입니다. 한데 결코 무리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이방 나라들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와 재물도 우리에게 돌아오도록 만드시겠다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부족하다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여건도 점점 힘들게만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힘든 때를 지나가고 계신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바다의 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이방 나라들의 재물에 네게로 온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겠다고 하나님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귀한 약속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아멘 하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그대로 신뢰하십시오. 내가 재물을 좇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우리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부와 재물로 우리들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믿음이 연약해서 지금까지는 헤아렸다고 해도 이제는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주님 앞에 드리는 삶을 사십시오. 사실 향남 교회 성도들만큼 풍성하게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는 분들도 많지 않습니다.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넘치도록 풍성한 예물을 드렸던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처럼 우리도 풍성하게 드리며 나누는 삶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0%가 부족했습니다. 10%의 부족 그것이 우리들의 한계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할 것입니다. 보십시오. 

“허다한 낙타, 미디안과 에바의 어린 낙타가 네 가운데에 가득할 것이며 스바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일 것이요 느바욧의 숫양은 네게 공급되고 내 제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눈을 들어 사방을 바라보는 성도요 하나님이 기꺼이 받으시도록 하나님 앞에 드리는 성도요, 하나님의 영광의 집을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시는 귀한 삶이 우리 안에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작은 자로 천명을 이루게 해야 합니다.(사60:22)
하나님이 작은 자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십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작은 자라는 말은 키가 작은 자라는 말이 아닙니다. 작은 자란 보잘 것 없는 사람입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누가 관심이나 줍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도 못하는 사람이 작은 자입니다. 어찌 보면 관심을 못받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무시를 당하기 십상입니다. 아니 무시당하고 무시당하다 못해 아주 그것이 당연시 여겨지는 그런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죽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았으면 명품을 들고 다녀야 할 정도까지 됐겠습니까? 몇 백 만 원짜리 명품 가방을 들어야 하고 명품 코트를 걸쳐야 하고 수십 수백만 원짜리 화장품으로 화장을 하면 더 알아줄까요? 물론 알아주기는 하겠죠. “야 좋아 보인다.” 그런데 뭐가 좋아 보인다는 겁니까? 결국 물건이 좋아 보인다는 것 아닌가요? 그것 가지고 있으니 사람이 좋아 보인다는 말은 그런 물건이 없이는 결코 좋아 보일 수조차 없는 그런 사람이라는 뜻도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처럼 처량한 일도 없습니다. “야 그런 것도 다 가지고 있고 너 참 대단하다”고 할는지 몰라도 속으로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물건이 아깝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다시 우리 자신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아주 보잘 것 없는 존재였습니다. 무가치한 존재였습니다. 아무리 가꾸고 꾸며 봐야 썩는 냄새만 풀풀 나는 그런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사형수에게 아무리 좋은 옷을 입혀놓은들 그 사형수 부러워할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감옥에 갇혀서 아무리 호강한다고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우리가 남들처럼 가진 것이 없을망정, 우리가 남들처럼 부귀영화는 누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이 갖고 있지 못한 진짜 귀한 보배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나를 특별한 소유로 삼으셨다, 보배로 여겨주신다는 것은 우리가 계속해서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실 정도로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만큼 귀한 존재인데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한들 그게 무슨 대수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시고 하나님이 나를 귀하게 여겨주시는데 어찌해서 스스로를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사람이라고, 나는 안 된다, 나는 못한다고 하면서 주저앉아 버립니까? 
보세요, 오늘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원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빛이 되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을 밝게 빛나게 만들어주십니다. 우리 슬픔의 날을 끝내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루도록 하나님이 만드시겠다고 하십니다. 

사실 아브라함 그는 작은 자였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그는 어디까지나 이주민일 뿐입니다. 우리가 우리 곁에 온 이주민들을 흔히들 보잘 것 없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래서 무시해도 좋은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브라함이 바로 그런 신세였습니다. 어디까지나 타향입니다. 그렇다고 변변한 일거리가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천막 하나 쳐 놓고 잠시 머물다 옮겨 가며 양들을 치는 보잘것없는 떠돌이일 뿐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갔더니 오늘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의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이건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는 정도가 아닙니다. 작은 자가 온 세계를 좌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작은 자라고 해서, 보잘 것 없다고 해서 기죽을 일 하나도 없습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비록 작은 교회일망정 큰 교회에 버금가는 일들을 하고 있지를 않습니까? 한 생명이 얼마나 귀한가를 우리는 압니다. 사랑으로 교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알고 그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누구보다도 힘든 그런 몸과 처지에서도 더 힘을 내서 수고하는 모습들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때로는 아쉬울 때도 있을 것입니다.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조금만 더 배웠더라면 조금만 더 건강했더라면... 하지만 주님은 먼저 자족할 줄 알라고 하십니다. 비록 내가 작은 자일지라도 그런 나를 하나님이 사랑하여 주시는 그것으로 인해서 감사하고 작지만 하나님의 큰일에 동참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과부의 두 렙돈과 같이 내 정성을 다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그래서 약속을 따라 작은 자로 천 명을 이루고 약한 자로 강국을 이루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가시는 귀한 역사가 우리 가운데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여호와로 쉬지 못하시게 해야 합니다.(사62:7)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고 사 62:6~7은 말씀합니다.
“작은 자로 천 명을 이루고 약한 자로 강국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이 언제 누구에게 이루어집니까? 바로 여호와로 쉬지 못하시게 하는 자에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파수꾼으로 세우고 우리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쉬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쉬지 못하시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루살렘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성전으로 온전히 세워 가시도록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 파수꾼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 너희는 쉬지 말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으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고 하신 것은 그렇게 해도 좋고 힘들면 안 해도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무엘이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겠다”고 한 것처럼 우리 역시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 기도하기를 쉬는 것이 죄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왜 기도하기를 쉬는 것이 죄인고 하니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도하기를 쉬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기를 쉬면 하나님도 쉬십니다. 하나님이 쉬시면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살았다고는 하나 죽은 자일뿐입니다. 무늬만 그리스도인 일 뿐이지 교회는 다닌다고 하는데 예수를 아는 냄새는 하나도 나지 않는 그저 교인이요 신자에 불과한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기도하기를 쉬기 때문입니다. 왜 낙심하고 좌절합니까? 기도하기를 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팔짱을 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역사가 없는데 무슨 변화가 있겠고 하나님이 쉬시는데 무슨 복을 누릴 수가 있겠고 무슨 표적이나 이적이나 치료하시는 역사가 나타나겠습니까? 그러니까 진짜 믿음은 무엇이냐 하면 기도하기를 쉬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하기를 쉰다는 것은 하나님이 쉬신다는 것인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시지 않으면 하나님이 어찌 나를 기억하시겠으며 하나님이 기억지 않으시는데 하나님이 무슨 일로 나를 돕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이길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것은 또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기도가 없이는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무슨 일이 있을 때만 반짝 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 사도들처럼 기도하는 일에 온 힘을 다 쏟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정말 굳게 결단하고 아주 작정하고 목숨을 걸고 기도해야 할 줄로 압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가 그렇게 많은지 모릅니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 역시 어떤 것 하나 틀린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는 좀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말이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쉬지 말라. 그래서 하나님으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이건 하나님을 괴롭게 만들어드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으로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말은 잘 한다”고 합니다. 그 잘 하는 말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말은 잘 하는데 왜 기도는 못합니까? 기도하기를 쉬는 것은 곧 하나님이 나를 돕지 않으셔도 상관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쉬면 하나님도 쉬시는데 뭐가 어떻게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핑계할 수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핑계 거리를 찾지 말고 그냥 기도하십시오. 그냥 깨어 기도하십시오. 다시 말씀드립니다. 다른 말 할 것 없습니다. 그냥 기도하시면 됩니다. 
아울러 또 한 가지 우리가 쉬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아가기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결코 믿음 안에서 벗어나지 마십시오. 그 어떤 경우라도 믿음 안에서 벗어나지 마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쉬지 않고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귀한 역사가 우리들의 모든 삶에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두움을 몰아내는 데 과연 얼마만큼의 빛이 필요할까요? 아주 작은 빛입니다. 그것은 예전 민방위 훈련을 하면서 밤에 등화관제를 할 때 보면 여실히 들어납니다. 모든 등을 다 끕니다. 그래 온 동네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습니다. 하지만 훈련 진행 상황이 궁금해서 어느 집에서 TV를 켰다고 합시다. 커튼을 치고 빛이 새나가지 않도록 조심을 했는데도 그 빛은 어김없이 밖으로 새어나와 민방위 대원들이 와서 창문을 두드리면서 TV도 끄라고 아우성을 치던 것 기억하십니까? 

또한 칠흑 같이 어두운 밤이라 해도 조그만 손전등 하나가 아주 훌륭한 길 안내자가 되어주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영적인 암흑이 존재하는 곳은 없습니까? 어두움은 아주 작은 빛으로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눈이 달빛 아래서도 그 빛을 받아 빛을 발하듯이, 예수님의 빛을 반사해서 내는 그 빛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그러기에 그저 우리들은 조용히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그 빛의 역할을 해내실 수 있습니다.

“저 구름 같이, 비둘기들이 그 보금자리로 날아가는 것 같이 날아오는 자들이 누구냐 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 먼 곳에서 네 자손과 그들의 은금을 아울러 싣고 와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에 드리려 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드리려 하는 자들이라 이는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누가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입니까? 하나님으로 쉬지 못하시게 하는 자입니다. 누가 은금을 하나님의 이름에 드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드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도 모여들게 하고 재물도 우리에게로 모이게 하는 이유도 우리가 하나님을 쉬지 못하시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어나십시오. 깨어 일어나십시오. 빛을 발하십시오. 기도하기를 쉬지 마십시오. 다시 말씀드립니다. 쉬지 마십시오. 기도하기를 쉬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기를 쉬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나를 온전히 드리고 내게 주신 것들을 하나님께 그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쉬지 않고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며 약속을 따라 온전히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영광이 되도록 이끌어 가시는 복된 하나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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