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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 (눅 1:4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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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 (눅 1:46-56)


오늘은 온 세상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2천년 전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드리는 성탄절입니다.  오늘 주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모두 위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평화가 그 심령에 이루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염려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됩니다.  임마누엘, 이것 이상으로 좋은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이 시간 옆에 있는 분들에게 이렇게 축복의 말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집사님과 함께 계십니다."

지난 주간에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날 마침 담임목사님께서 교회학교 아동부 예배 시간에 참석하시기로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동부 선생님께서 아이들을 불러모아 놓고 이렇게 당부를 했다고 합니다.  "오늘 담임 목사님께서 우리 반을 방문을 하시는데 오늘 창조에 대해서 공부를 했지?  아마 목사님께서 물어볼 거야.  우리 병철이는 누가 만들었니?  그러면 하나님께서요 라고 대답을 해야 해요.  그러면 우리 목사님께서 병철이를 칭찬할 거예요.  여러분, 다 알았지요?"

모두가 "예"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담임목사님이 막 도착하려는 시간에 병철이가 화장실에 갔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병철이에게 물어야 하는데 앞에 있는 철수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철수는 누가 창조했지?"
"우리 엄마 아빠가요."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창조한 아이는 지금 화장실에 있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과 동물을 구별 짓는 것은 사람은 웃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것은 웃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웃음은 인간의 아름다운 감정의 표현 가운데 하나입니다.  웃음은 인간의 꽃과 같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얼굴은 웃은 얼굴입니다.  가장 복된 얼굴도 웃는 얼굴입니다.

옛 속담에 "웃는 얼굴에 침도 못 뱉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소일소 일노일노(一笑一少一怒一老)라는 말도 있습니다.  "한 번 웃으면 한 번 젊어지고, 한 번 화를 내면 한 번 늙어 진다"는 뜻입니다.  웃는 얼굴에 복이 온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실 화를 내고 찡그린 얼굴보다 웃는 얼굴이 훨씬 더 보기가 좋습니다.  남자도 웃는 것이 좋고, 여자도 웃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어느 전문가 조사에 의하면 사람의 하루 평균 웃는 숫자가 6살의 경우에는 300번을 웃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인은 하루에 17번 웃는다고 합니다.  하루에 한 번도 웃지 않는 사람이 있겠지만 말입니다.  특별히 외국 사람들이 바라본 우리 한국 사람들의 얼굴 표정의 특징은 한 마디로 말해서 무표정한 얼굴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어려운 경제 상황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웃음을 잃어버리고 고달프게 살아갑니다.  매일 매일 공장에서 기계와 더불어 살아갑니다.  공기 오염으로 하늘은 가리워지고 땅은 아스팔트로 덮였고, 도시 공간은 차디찬 벽돌로 바벨탑을 쌓고 단절된 공간에서 대화가 끊인 채 웃음도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너무 웃음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니까 남을 웃기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코미디언들입니다.  삶의 여유를 잃어버리고 웃음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코미디언들이 나와서 한바탕 웃음거리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억지로 웃기고 거기에 맞추어서 웃어주면서 살아가고 잇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 사회는 창조적인 에덴의 웃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 웃음만 있습니다.  그래서 웃는 것도 고생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주신 가장 아름다운 축복은 웃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는 웃을 수 있는 웃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에덴 동산에서 마음껏 웃으면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범하면서 인간은 웃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웃음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웃음을 회복시켜주시는 은총이 아브라함에게서 이루어집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웃음이라는 단어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지만 인류를 웃게 한 조상이기도 합니다.

창세기를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네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주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그렇지만 25년의 세월이 흘러도 아브라함에게는 여전히 자식이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나이는 많아졌고 생리적으로 자녀를 낳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8장에 보면, 어느 날 아브라함이 한낮에 장막 문에 앉아서 고독한 노인으로 명상에 잠겨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내년 이맘때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이때 사라가 장막 문 뒤에서 듣고 속으로 웃으면서 혼자서 이런 독백을 합니다.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그전에 창세기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먼저 아브라함을 웃게 하셨습니다.  "네 아내 사래의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며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라.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그런데 17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아브라함도 웃었고, 사라도 웃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때 엎드려 웃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아브라함의 웃음은 하늘이 준 웃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웃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의 웃음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노쇠하였고 생리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아들을 낳는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웃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가정이 정말로 웃게 되는 것이 창세기 21장 6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사라의 고백입니다.  사라는 너무 좋아서 웃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노년에 크게 웃었습니다.  이삭을 얻고 장막에서는 온통 웃음꽃이 피었고 생기가 넘쳐흘렀습니다.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창세기에서의 이 웃음은 한 가정을 향한 웃음이었다고 한다면 온 인류를 웃게 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이 되신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웃음을 잃어버린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죄 짐에 눌려 힘들게 살아가는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빅 이벤트,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성육신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 웃게 하시려고 하시다 보니까 사람들이 이 사건에 대해서 오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니라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 예수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순간 하나님의 아들로 양자가 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요,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이단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에도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태어나시기 이전에도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결코 태어남이 없는 성부 하나님과 같은 분이십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에 인간이셨고, 그래서 그가 하나님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우리의 구원은 불완전한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가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고 신앙생활을 하면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또 다른 예수가 우리들 가운데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이 출현하게 되는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우리들을 웃게 하시고자 우리들 곁에 오셨습니다.  죄 가운데 영원히 버림받은 우리들을 구원하시고 위로하시고자 우리들 곁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임마누엘, 성육신의 사건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웃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웃게 하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믿음으로 웃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을 따라 손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신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얼굴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싶어하십니다.  우리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으시고 근심을 제하시고 웃게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니까 우리는 울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믿지 못하니까 탄식하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의 말처럼 영혼이 기쁠 때 웃음이 나오고, 마음이 즐거울 때 웃음이 나옵니다.  기쁨은 인간 내면 세계의 발로요, 즐거움은 외면 세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소식을 들었던 마리아의 찬송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마리아는 지금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그 영혼이 크게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섭리를 깨닫고 믿음으로 웃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리아에게 있었던 이 기쁨의 웃음이 오늘 이 아침에 저와 여러분에게도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웃고 살아야 할 사람들임에 불구하고 우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즐겁게 살아야 할 가정이 항상 침울하고 온 식구가 한바탕 웃어보지도 못하고 살고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그 마음에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얼굴에 웃음이 없다는 것은 그 마음에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여유가 없다는 말은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삶이 평탄할 때에는 누구나 웃으면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인생이 고속도로처럼 쫙 뚫리고 잘 될 때에는 웃지 말라고 해도 싱글벙글 웃습니다.  애써 웃음을 감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내 인생이 골짜기를 지나는 순간 우리는 웃음을 잃어버리기 시작합니다.  내 인생이 풍랑을 만나고 거친 광야를 지나는 순간 그 얼굴에서는 근심과 걱정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얼굴은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합니다.  심지어는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대하기도 합니다.  그 얼굴에는 세상의 모든 근심과 문제들을 혼자서 다 안고 살아가는 사람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을 때 하나님이 웃게 하시니 참으로 나도 웃는 자가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을 보십시오.  이들 부자는 웃기는 일만 하다가 간 사람들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아들, 웃음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이 아브라함에게 떨어집니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이 집을 떠나 하나님이 준비하신 산 모리아 산 밑에 와서 번제 나무를 이삭에게 지우고 불과 칼을 손에 들었습니다.  이들은 거친 산을 올라가 이삭이 짊어지고 온 장작으로 단을 쌓고 이삭을 결박시키고 칼로 잡으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이삭도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입니다.

그 아버지와 그 아들, 이들은 웃기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들 두 부자가 산을 오르면서 나누는 대화에서 이삭이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때 아브라함이 뭐라고 대답을 합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여기에서 "여호와 이레"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

아버지도 하나님을 믿었고, 아들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기에 죽이려고 하고, 하나님을 믿었기에 죽으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낳게 하신 것은 아브라함과 그 가정을 웃기게 하신 사건이라고 한다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은 하나님을 웃기게 하신 사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번제로 쓰실 숫양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무슨 일로든지 웃을 수가 있습니다.  아골골짝 빈들을 지나가도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웃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곳이 궁궐이든 초막이든, 우리가 걸어가는 것이 높은 산이든 거친 들이든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웃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거운 죄 짐을 지고 피곤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웃게 하시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영원히 웃게 하시고자 우리 모두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내 인생이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믿으신다면 그 마음에 기쁨과 웃음을 회복하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웃기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믿음 좋은 여집사님이 길을 가다가 넘어져서 팔이 부러졌습니다.  이때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옆에 있던 친구가 "그토록 감사할 것이 있느냐?"라고 하니까 이 집사님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다리가 부러지지 않고 팔이 부러진 것이 감사하고,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말을 듣고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는 정말 웃기는구나.  나는 멀쩡한데 너는 넘어져도 감사하니 알 수가 없구나."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우리들 때문에 웃습니다.  무능하고 약하고 천한 것들이 세상을 놀라게 하니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웃기는 일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사라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웃었겠습니까?  마리아 때문에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웃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에게 인상을 쓰기보다 더 많이 웃기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온통 웃기는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모세가 겨우 지팡이 하나를 들고 바로 왕국에 돌아오니 바로가 얼마나 그를 비웃었겠습니까?  젊은 청춘을 다 보내고 늙은 할아버지가 되어 "민족을 해방하라"고 하니 이게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그런데 결국 모세는 영원히 웃기는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나올 때 모세는 누구를 보고 웃었을까요?  아마 그는 하나님을 보고 웃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웃게 하시니 그 웃음을 드렸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세상을 보고 웃다가 울었습니다.  사람을 보고 웃다가 얼마나 실망했으며 저주스러운 낯으로 변해 갔던가요?  친구가 나를 웃게 하니까 웃다가 그 웃음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울음으로 변한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아브라함이 웃을 수 있었던 원천은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기뻐할 수 있었던 비밀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웃을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지러운 세상 가운데서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우리에게 믿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웃고 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웃음을 주면서 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써 온 인류에게 영원한 웃음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믿는 자는 모두가 영원히 웃으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웃게 하십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은 웃고 살 수가 있습니다.  가정에 사랑이 있을 때 웃음이 있습니다.  반면에 사랑이 없을 때 웃음도 없습니다.  가정이 웃음을 잃을 때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미소가 없는 가정이나 미소가 없는 사회는 사막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만나는 사람끼리 그 입술에 미소를 머금고 만나는 사회는 명랑하고 밝은 사회입니다.

남편의 미소를 받는 아내의 삶은 즐거울 것입니다.  아버지의 웃음을 받는 자녀들의 마음은 한없이 행복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가정 생활에서 가족들은 모두가 웃음을 주는 대상입니다.  코미디언처럼 쇼를 잘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보니까 모두 웃을 일입니다.  웃고 사는 사람들은 마음 속에 사랑을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웃게 하십니다.  무엇보다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먼저 웃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목동들에게 먼저 나타나셔서 이 웃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에 소외되고 불쌍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셔서 그들에게 웃음을 주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우리를 웃게 하십니다.  우리가 웃지 못하는 것은 그 마음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말년에 평양에서 50리 떨어진 대보산에서 조그만 산장을 짓고 살았는데 이것이 송태산장이라고 합니다.  그는 송태산장 입구에 문을 세우고 '빙그레' 또는 '벙그레'라는 간판을 써 붙이게 했습니다.  이 집으로 들어설 때에는 누구든지 빙그레, 또는 벙그레 웃으라는 뜻입니다.  안창호 선생님은 스마일이라는 말을 좋아했습니다.  웃음을 영어로 스마일(smiles)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스마일은 세상에서 가장 긴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s와 s 사이가 무려 1마일(mile)이나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번 웃으면 1마일을 거뜬히 걸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웃음을 나누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조지 맥도널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웃기를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쁨의 반대는 슬픔이 아니라 불신앙입니다.  서로에게 짜증과 원망과 불평을 쏟아 놓는 불신앙을 다 던져버리고 웃으시기 바랍니다.  돼지도 잘 웃어야 값이 잘 나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찡그린 돼지는 취급도 하지 않습니다.  '갓난아이의 빙그레', '늙은이의 빙그레', '젊은이의 빙그레'  모두가 아름다운 표정입니다.  이 시간 옆에 있는 분을 가만히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눈과 눈을 마주 대하면서 서로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따라서 하십니다.
"벙그레~~"

우리는 늘 웃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웃는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라고 했습니다.  웃는 집에는 많은 복이 찾아온다는 말입니다.  제임스 월쉬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웃는 사람은 실제적으로 웃지 않는 사람보다 더 오래 산다.  건강은 실제로 웃음의 양에 달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독일 속담에는 "웃음은 울음보다 더 멀리 들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울음은 지난날을 돌아보게 하지만, 웃음은 앞날을 바라보게 합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사람은 하루에 적어도 두 시간은 웃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먹은 것이 소화가 잘되고, 건강에도 좋고, 일에도 좋고, 인간관계도 좋아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항상 얼굴을 찌푸린 사람, 웃음과 밝은 표정이 사라진 사람은 무슨 일을 해도 제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웃음과 미소를 연습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은 간이 굳어지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쁜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웃게 하시고자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어떤 고난과 답답한 현실 속에서도 웃으며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소망으로 웃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죽으면서도 웃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에게 주신 최후의 웃음이요, 불멸의 미소입니다.  이 미소는 하늘나라의 문이 열리는 것을 바라보는 소망의 미소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의 순교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돌을 들고 이를 갈면서 달려드는 원수들을 보기 전에 하늘의 열린 문을 보았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돌아갈 찬란한 천국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스데반 집사는 자기를 돌로 치는 원수들을 보면서 웃었습니다.  자기를 때리고 욕하고 증오하며 돌을 던지는 원수들에게 미소를 주는 것은 그 마음속에 하늘이 준 소망이 없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스데반은 웃으면서 살다가 웃으면서 죽었습니다.  스데반의 사랑의 웃음 때문에 그 향기를 호흡한 핍박자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사람들이 냉혈 동물처럼 되어 가는 오늘 이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웃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 이웃에게 그 웃음을 나누어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늘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답답한 현실에서도 웃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 위대한 순교자의 웃음 속에서 기독교의 찬란한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은 우리들에게 저 영원한 천국 본향을 향한 소망으로 웃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3백년,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의 핍박 속에서도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자기들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을 용서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옥중에서 노래하고 사형장에 끌려가면서 찬송했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 웃으면서 죽었습니다.

로마의 원형극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할 때 한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사자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 이 어린아이가 무서워하며 울기 시작합니다.  이때 어머니는 아이를 달래면서 "아가야, 잠깐만 참아라.  잠시 후면 예수님 품에 안길 것이다"라고 하면서 죽음 뒤에 있는 영광의 세계를 보면서 자기 아이를 위로하고 웃으면서 죽었습니다.  네로는 이 웃음을 띤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비밀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도 미친 듯이 한바탕 웃고는 미쳐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웃게 하시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천국의 소망을 품고 웃으면서 승리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웃으면서 사십시오.  최후에 웃는 자가 되기를 힘쓰십시오.  최후에 웃는 자가 참으로 웃는 자입니다.  죽으면서 최후에 웃는 그 웃음이 진실이요, 하늘이 준 웃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웃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웃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가 새 역사의 창조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웃게 하셨다면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웃게 해 드려야 합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낮은 자의 자리에로 내려오셔서 우리를 웃게 하셨듯이 우리도 낮은 자의 자리에로 내려가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내려놓고 더 낮은 자리에로 내려갈 때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흐뭇하게 웃으실 것입니다.

오늘 이 땅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접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높은 자의 자리에 오르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따뜻한 자리만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는 웃음이 사라지고 찌푸리고 굳어진 얼굴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주님이 언제 그렇게 사셨나요?  우리는 모름지기 내려놓는 훈련, 내려가는 훈련을 잘 하셔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를 웃게 하신 것처럼 낮은 자리에로 내려가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웃고 하나님이 웃으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의 소망을 품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제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인터넷에 보니까 "웃는 얼굴에 가난 없다"는 글이 있었습니다.  내용이 괜찮아서 그대로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거리를 거닐 때마다 놀라는 일 중의 하나는
지금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표정에 웃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살기가 험악한 세상이라고 하지만
이 세상에서 인간 외에 웃을 수 있는 동물은 없습니다.
사실 아무리 어려웠고 괴롭던 일들도
몇 년이 지난 후에 돌이켜 보면 얼마나 어리석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 맙니다.

고통도 환난도 좌절도 실패도 적대감도 분노도 노여움도 불만도 가난도.....
웃으면서 세상을 보면 다 우습게 보입니다.
그래서 웃고 사는 한 결코 가난해지지 않습니다.
백 번의 신음 소리보다는 한 번의 웃음소리가 갖는 비밀을
빨리 터득한 사람이 그 인생을 복되게 삽니다.
연약한 사람에겐 언제나 슬픔만 있고
위대한 사람에겐 언제나 소망의 웃음만 있습니다.

더 잘 웃는 것이 더 잘 사는 길입니다.
더 잘 웃는 것이 더 잘 믿는 것입니다.
더 잘 웃는 것이 더 큰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을 때 부유해 집니다.
오늘도 웃음으로 시작하여 웃음으로 감사하는 날이 됩시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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