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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드로의 성탄절 (요 1:3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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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11년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 날을 맞는 우리 마음은 마치 한 구석에 구멍이 뚫려 찬바람이 휘몰아쳐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제대로 한 일도 없이, 그리고 아름답게 살지도 못한 채로 벌써 한 해가 지나가고, 2011년이란 시간을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아쉬움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을 통해 이런 불편한 감정들이 모두 사라지길 원합니다. 오늘은 기쁜 날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천사들은 말했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이 기쁜 소식은 한 해를 제대로 살지 못한 채로 끝내야 하는 우리를 위로해 주고, 새 해를 소망으로 맞이하게 해 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신약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한 인물,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의 성탄절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아니 베드로의 성탄절이라는 표현보다는 본래 그의 이름을 따라 <시몬의 성탄절>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시몬의 성탄절은 어떠하였으며,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요? 

시몬의 성탄절은 <뒤늦은 만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갈릴리 바닷가 가버나움에서 어부로 살던 시몬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양부 요셉, 마구간에 와서 경배했던 베들레헴의 목자나 동방의 박사들, 성전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시므온이나 안나에 비해 무려 삼십 년이나 늦게 성탄절을 맞이했습니다. 

그 때까지 시몬은 예수라는 분이 이미 삼십 여 년 전에 세상에 탄생하셨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가 사는 가버나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나사렛에 와서 사셨고, 그 후에는 시몬 자신이 사는 가버나움에 이사를 하셨지만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동생 안드레의 소개로 예수님을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의 동생 안드레는 본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는데, 세례 요한의 소개로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알고는 형 시몬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가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시몬이 예수님을 처음 대면하던 그 날, 비로소 시몬은 성탄절을 맞이했다고 하겠습니다. 

누구에게나 성탄절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이루어집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2천여 년 전에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지만, 우리 각자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래서 그 분과 아무 상관도 없다면, 예수님의 탄생은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각자가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는 그 순간에 비로소 성탄절의 축복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성탄절 이야기는 복음서 첫 부분에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복음서 전체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그물을 준비하다가 예수님을 처음 만나 제자가 되었는데, 그 때가 그들의 성탄절이었습니다. 세리 마태는 자신의 사무실을 찾아오신 예수님 앞에 서는 순간 비로소 성탄절을 맞이했습니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은 가버나움의 그 번잡한 길거리에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짐으로 고침을 받던 순간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죽어서 침상에 누워 있다가 예수님을 통해 새 생명으로 일어났을 때, 시각장애인 거지 바디매오는 여리고 성문 입구에서 예수님을 통해 눈을 뜨게 되었을 때 성탄절을 맞이한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서야 성탄절을 맞이했는데, 그는 다름 아닌 예수님 옆에서 죽은 강도였습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예수님의 따스한 말씀이 강도로 죽어가는 그의 귓가를 울릴 때 그는 십자가에서 비로소 성탄절을 맞이했습니다. 

이 순간들은 어떤 순간입니까? 그 순간들은 예수님을 모르고 살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깨닫고 나와 엎드려 눈물로 매달린 순간이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고칠 수 없던 것이 치유되고, 채울 수 없던 마음이 기쁨과 감격으로 채워지고, 도저히 다시 시작할 수 없이 무너진 것들이 다시 세워진 순간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성탄 사건은 만남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혼자 고고하게, 거룩하게, 조용히 계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만나기 위해, 만나서 함께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게 아닙니다. 광신자들이나 예수님을 만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어린 아이가 부모를 만나는 것처럼, 남편이 아내를 만나는 것처럼, 제자가 스승을 만나는 것처럼 당연한 것입니다. 당연히 만나야 하고, 만나지 못하면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필연적 만남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그래서 그 분이 우리 인생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변화시키실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의 성탄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아직 그는 성탄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직 예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게 되길 축복합니다.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길 기원합니다. 예수님과 뗄 수 없는 사랑의 관계로 들어가시길 기원합니다. 

시몬에게도 성탄절은 새로운 삶의 출발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를 통째로 바꾸고자 하셨습니다. 본문 42절을 보십시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처음 만나자마자 그의 이름이 시몬에서 게바, 즉 베드로로 바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존재의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몬은 <저 분이 누군데, 만나자마자 내 이름이 바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인가?>하는 의아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너 스스로 바뀌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네 인생을 바꾸어 주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물고기를 잡던 어부 시몬>은 <사람을 낚는 어부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동족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로마에 바치면서 손가락질을 받고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던 마태는 예수님의 제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이런 변화는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납니다. 예수님 안에서 죄인이 의인이 됩니다. 사단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던 사람이 하나님 중심으로, 이웃을 생각하면서 살게 됩니다. 절망하던 사람이 절망을 이기고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일어서게 됩니다. 그러기에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목사인 저도 예수님 안에서 새로워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엊그제 새벽에 엎드려 기도하면서 2011년도의 삶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이런 저런 일을 했습니다. 노회 일, 총회 일도 했습니다. 사람들도 만났고, 말도 많이 했습니다.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것들에 결정적인 것 하나가 빠져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 모든 일들이 백 퍼센트 주님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많은 부분은 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를 위한 것이다 보니, 어떤 때는 우쭐했고, 어떤 때는 낙심했습니다. 삶이 주님이라는 절대적 기준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상대적 기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을 위해 일하고, 주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성도들을 대해야 하는데, 많은 순간에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말의 실수, 판단의 실수, 의식했든 못했든 상관없이 다른 이들에게 성실하지 못했던 것, 많은 오해와 편견, 그리고 너무 좁았던 마음, 복음을 위해 더 열정적으로 매진하지 못하고 타성에 사로잡혔던 부분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소홀했던 일들이 생각났습니다. 목사라고 하면서 아직도 성결하지 못한 부분이 너무도 많고, 어떤 일의 결과에 대해 잘된 것은 저 자신의 공이라 여기고, 잘못된 것은 남을 탓하는 마음이 여전했습니다. 주님을 위해 일할 시간도 부족하건만 쓸 데 없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저도 정말 예수님 안에서 새로워지길 원합니다. 더 깊고 넓은 영성을 가지고 싶습니다. 좀 더 충만하게 되길 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자리에 오셨으니, 예수님을 믿는 마음을 가지고 계시겠지요? 그러나 혹시 니고데모처럼 지식으로는 알고 있지만, 중생의 비밀을 체험하지는 못한 어중간한 상황에 있다면 거기서 벗어나서 참 주님의 사람으로 살게 되길 원합니다. 그렇게 될 때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며, 그 때 비로소 예수님의 탄생이 우리에게 복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다고 하더라도, 그 일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이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길 기원합니다. 2012년도에 우리의 생각과 삶이, 우리 인생의 내용과 방향이, 신앙생활의 깊이가, 가정의 모습이, 우리 교회가 더 성숙되고, 더 아름답게 변화되길 기원합니다. <주여, 저희를 새롭게 하시고, 변화시켜 주옵소서. 저희도 시몬에서 베드로로 바뀌는 역사를 체험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2012년도에 우리가 더 변화되고 새로워져야 한다고 말한다면, 지난 삶, 2011년도는 실패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2011년도는 완전히 잘못되었습니까? 그래서 우리 인생에서 지워버려야 할 형편없는 시간입니까? 

우리는 최근 역사를 거치면서 <과거 청산>이란 말에 익숙해졌습니다. 새로운 정부가 등장할 때마다 과거 청산을 내세워 왔습니다. 과거 청산을 강도 있게 외칠수록 깨끗하고 의식 있는 정치인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난 정부가 했던 정책을 폐기하고, 지우개가 있다면 역사에서 완전히 삭제해야 할 시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과거는 전적으로 무가치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도 중요하고 익숙한 도식이기는 합니다만, 과거는 결코 부정될 수 없습니다. 지난 세월을 부정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과거를 버리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가자고 강력하게 외친 것들은 대개 이단들이었습니다. 이단들은 과거를 지우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과거의 삶을 구성하고 있던 가족과 직장을 떠나라고 말합니다. 가족과 함께 지냈던 시간을 마치 죄악의 시간인 것처럼 말합니다. 일터에서 열심히 일했던 과거를 인생에서 지워야 할 시간인 것처럼 취급합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아예 속세를 떠나라고 말합니다. 과거 청산이 극단적으로 나타나면 사람들을 죽이고, 과거의 모든 정책을 철폐하고, 모든 것을 바꾸기에 이릅니다.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을 때, 많은 나라에서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변화시키시는 분이지만, 우리의 과거를 무조건 부정하고 지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을 불러 베드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할리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가 어부로 살았던 과거는 부끄러운 시간이었다. 그러니 이제 아예 어부라는 말 따위는 집어치워라. 넌 이제부터 어부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과거에 어부였다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활용하기도 하셨습니다. 가버나움에서 세금 받는 사람들을 만나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로 하여금 고기를 잡아 그 입에서 돈을 꺼내 세금을 내게 하셨습니다. 그가 고기를 잘 잡는다는 것을 활용하셨습니다. 

또 그를 <사람 낚는 어부>라고 부르신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넌 날 만나기 전에 어부였지. 그래 잘 되었다. 그 장기를 발휘해라! 단지 달라져야 한다면 전에는 고기를 잡았지만, 이제는 사람을 낚아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이 베드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부라고 부르시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우선 <잡는다>는 사명이 앞으로도 여전할 것을 말씀합니다. 그는 반드시 고기를 잡아야 했습니다. 그래야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고기를 잡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도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을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 어부의 방식에 대해 깨닫게 해 줍니다. 고기는 맨 손으로는 잡을 수 없습니다. 고기는 반드시 배와 그물이 있어야 잡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낚아 천국의 사람을 만드는 것도 맨 손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도구가 있어야 하는데, 그 도구는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또 그를 어부라고 부르심으로써 어부의 기쁨을 떠올리게 하셨습니다. 고생 끝에 만선이 되었을 때의 기쁨은 어부가 아니면 모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얻었을 때의 기쁨은 천국의 어부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어부는 자신의 한계도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배와 그물을 잘 준비해도 고기를 잡지 못하는 날도 있었을 것이고, 그 때마다 시몬은 자신의 한계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의 어부로 살 때도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늘 배와 그물을 손보았던 것처럼, 앞으로도 베드로는 늘 엎드려 기도하고, 복음으로 무장해야 할 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과거를 인정하신 것은 이것 뿐만이 아닙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이미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제부터 내 사람이 되었으니, 과거는 버려야 한다. 그러니 아내와 헤어져라. 이제부터 너에겐 아내가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후에 베드로는 전도여행을 다닐 때 아내와 함께 동행했음을 고린도전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래, 아내가 있다니, 잘 되었다. 그 아내와 함께 한다면 더 효과적으로 전도할 수 있을 것이다. 둘이 더 사랑하면서 잘 해라>,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 만난 남편과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 13절을 보면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과거의 의미를 그대로 인정하시는 모습은 구약 성경과 그 시대에 대한 태도에서도 나타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구약 성경이 폐기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으로 인해 구약이 완성되었습니다. 그 예가 신약성경에서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예수님은 <임마누엘>이란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22-23절을 보면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어디에서 인용된 것입니까? 그것은 이사야서 7장 14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에서 예언된 대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토대 위에서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이란 과거 시대를 부정하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구약을 신약과 이어주신 분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구약 시대가 의미를 가지게 되고, 신약 시대는 축복의 시대가 됩니다. 예수님은 그 이전의 역사도 복되게 하시고, 그 이후의 역사도 복되게 하십니다. 

여러분, 과거를 부정하지 않으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2011년을 제대로 살지 못했다고 후회하고 있는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2011년도에 제대로 살지 못했다고 너무 풀죽지 말아라. 2011년은 결코 부끄러워 너희 생애에서 지워버려야 할 시간이라고 여기면 안 된다. 이 한 해 동안에도 난 너희와 함께 있었다. 내가 너희를 인도했다. 2011년은 나와 함께 한 시간이다. 그러니 얼마나 복된 시간이었느냐?>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2011년 한 해의 삶에 대해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워버려야 할 시간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오히려 주님 안에서 여기까지 살아온 것을 기뻐하십시오. 그 동안 인도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십시오. <한 해 동안 부끄럽게 살았다>는 생각 때문에 지난 시간을 저주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감사하면서, 그 바탕 위에서 2012년도를 출발해야 합니다. 

최근에 예수님을 믿은 분들이 계시지요? 예수님을 믿기 전의 여러분의 인생이 전부 다 청산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때도 열심히 살았습니다. 자식을 사랑했습니다. 애쓰면서 살았습니다. 그 시간이 다 나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기 전의 모든 삶이 다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 시간 동안에도 우리가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한 것입니다. 

이제 달라지면 됩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그 안에 스며들도록 하면 됩니다. 전처럼 여전히 남편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단지 이젠 그 남편과 아내를 믿음 안에서, 예수님의 방식으로 사랑하면 됩니다. 지금까지 한 것처럼 열심히 공부하십시오. 그러나 이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면서 그 공부하는 목적을 믿음 안에서 발견하면 됩니다. 지금까지처럼 열심히 사업을 하십시오. 단지 이젠 그 기업의 사장님의 자리를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기업으로 생각하면서 청직이로 사업을 하십시오. 열심히 자녀를 사랑하고 키우십시오. 단지 이젠 이기적 욕망으로 키우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인 줄 알고 키우시기 바랍니다. 

오늘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 해를 앞둔 이 시간, 우리 모두 2011년도의 삶에 대해 감사하길 원합니다. 기뻐하길 원합니다. 우리 잘 했습니다. 교회적으로도 홀리조이센터를 건축했고, 리모델링도 했습니다. 여러 가지 교회 창립 기념 행사도 있었습니다. 이름도 땅끝교회로 바꾸었습니다. 비록 100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0점인 것도 아닙니다. 너무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새해를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탄생하신 예수님께서 시몬의 인생이라는 과거와 베드로로서의 인생이란 미래를 이어주신 것처럼, 2011년도와 2012년도를 이어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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