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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교회, 세상의 소금과 빛 (욥 6:4-7, 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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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세상의 소금과 빛 (욥 6:4-7, 마 5:13-16)

교회의 사전적 의미는 ‘같은 신앙을 가진 신도들이 모여 이루는 제도화된 조직체 및 집회건물’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그런 정도의 의미를 가진 곳이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교회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의 집’이며,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몸이 상처투성이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받은 상처로도 족한데 심한 상처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허물어져 비가 새고 틈새로 바람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습니다. 마귀와 싸워야 할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마귀와 싸우지 못하고, 싸워도 마귀에게 지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우리 그리스도 때문이 아니라 완전하지 못한 사람 때문에 교회가 상처를 받고, 비난의 화살을 맞아 쓰러지고 있습니다. 필립 얀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같이 형편없는 인간들로 교회를 세우신 것은 거의 도박에 가까운 모험이었다”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도박에서 절대 손해 보지 않습니다. 
  
미국 유학 시절, 교회성장학 강의 시간에 서로 대화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교수님이 질문을 합니다. “당신의 교회에 문제가 있습니까? 그 문제가 어떤 문제입니까”. 저는 그 때 “없습니다. 교회는 문제가 없는데 제가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문제는 내가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교회 문제의 중심에 내가 있는 것을 느낍니다. 
  
세상의 교회는 신비와 혼란이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존 스토트는 교회의 이중성이라 불렀습니다. 교회는 이미 거룩합니다. 그러나 아직 거룩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완전하지만 아직도 불완전합니다. 교회는 하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어떻게 하든 완벽한 교회를 찾아보고, 그런 교회를 발견하면 거기 다니시오. 하지만 기억하시오. 당신이 그 교회에 들어가는 순간 그 교회는 더 이상 완벽하지 않게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교회를 비난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보면 사회의 교회에 대한 비난이 최고조가 되었다고 봅니다. 교회에 대한 비난이 가장 심한 때에 우리가 살고 있고, 우리 교회가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제외하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속담에 “썩은 사과 하나가 광주리 안에 있는 사과 전부를 썩게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썩은 사과를 제거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아 2:15). 이것이 이 시대의 교회, 우리의 과제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자’고 합니다. 왜 이런 말을 합니까? 원래 소금과 빛인데 왜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까? 이 말은 교회가, 우리가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함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은 교회, 빛이 밝음을 잃은 교회에 새바람을 일으키는 올해 한 해가 되고 다시는 맛을 잃은 소금, 빛을 잃은 등대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을 통하여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깁시다. 
  
첫째, 세상의 소금입니다. 

마태복음 5:13에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합니다. 교회는 소금이되 세상의 소금입니다. 우리가 교회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입니다. 나 만의 소금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의 소금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하늘나라의 소금이 될 필요는 아예 없습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이미 세상의 소금입니다. 
  
‘소금’은 헬라어로 ‘할라스’인데 고대 세계에서 소금은 인내와 순결과 부패방지의 상징이었습니다. 소금은 거룩한 제사에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영원불변하는 언약에 연관된 것이 소금입니다. 예수님은 비유적인 의미에서 소금의 역할과 가치를 높이 평가하시고 인정하셨습니다. 
  
플리니라는 분이 “소금과 햇빛보다 유용한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소금의 용도나 가치는 말할 필요도 없이 엄청나게 큽니다. 소금은 가장 기본적인 맛이고, 가장 요긴한 맛입니다. 소금만큼 소중한 것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짜게 할 수 있습니까? 그 답은 ‘없다’입니다. 이 질문은 구체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랍비들은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은 ‘노새의 태(胎)’와 같다고 합니다. 말과 당나귀의 잡종인 노새는 번식력이 없습니다. ‘노새의 태’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소금은 절대 맛을 잃으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가장 비싼 금은 무엇일까요? 황금입니다. 가장 소중한 금은 무엇일까요? 지금입니다. 가장 맛있는 금은 무엇일까요? 소금입니다. 소금은 금입니다. 인간이 먹는 유일한 암석이 소금입니다. 인간의 인체의 혈액 속에는 0.9%의 염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금처럼 귀한 것이 소금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평양감사보다 소금장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금이 얼마나 귀하길래 이런 말이 생겼겠습니까? 소금은 황금과 맞먹는 결제 수단이자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이런 귀하고 좋은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소금(salt)이란 말에서 salary(봉급)란 말이나 soldier(병사)라는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과거 로마에서는 군인들이 금화가 아닌 소금으로 보수를 지급 받았습니다. 로마정부는 소금 값을 올려 그 수입으로 군비를 조성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 고대의 소금이었습니다. 
  
옛날 중국 당나라에서는 세금의 절반이 소금세였다고 합니다. 만리장성을 짓는데 필요한 돈도 소금을 팔아서 충당했다고 합니다.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전쟁을 앞두고 소금을 공짜로 배급하여 민심을 얻었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소금의 소중함은 이 정도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한 것이 소금이었습니다. 
  
‘많이 먹으면 독이 되고, 적당히 섭취하면 약이 되는’ 소금은 인간의 몸에 가장 필요로 하는 식품입니다. 소금을 크게 말하면 4종류가 있습니다. 정제염, 재제염, 암염 그리고 천일염입니다. 요즘에는 금 같은 소금을 금같이 먹으려고 구운 소금, 맛소금, 죽염, 함초 소금, 토판염 등으로 만들어 먹습니다. 몸에 좋은 소금을 만들고, 몸에 좋은 소금을 먹으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과 노력의 결과라고 봅니다. 우리가 소금이되 가장 소중한 맛을 내는 소금이 되기를 바랍니다. 가장 값비싼 가치가 있는 소금이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소금같은 그리스도인이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는 장치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삶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은유는 고독이며, 왜소이며, 조용한 이미지입니다. 소금이나 누룩이나 씨는 요란하거나 거창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도, 교회도 요란하지 않지만 자신을 녹이고 죽여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맛있게 하는 소금 같은 유익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욥기 6:6에는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라고 합니다. 소금은 가장 싼 것 같지만 가장 값진 것이고 가장 맛있게 하는 맛입니다. 우리가 맛없고 싱거운 세상에 맛을 내고 멋을 내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마저 부패하고 썩어버리면 세상은 희망이 없습니다. 다시는 맛을 내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프랑수아 드 살르는 “큰 덕행은 설탕과 같고 작은 성실은 소금과 같다. 설탕은 탁월한 맛을 가지고 있지만 사용 빈도는 적다. 그러나 소금은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큰 덕행은 드물게 발생하는 것이지만 작은 섬김은 날마다 있어야 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소금같이 많이 필요치 않지만, 뿌려져도 자신이 녹아버리고 보이지도 않지만 세상에 맛을 내는데 꼭 필요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세상의 빛입니다. 
  
마태복음 5:14-15에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너희’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받는 제자들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빛이지만 진정한 빛은 고난의 종이신 한 분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사야 42:6에는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9에는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이사야의 말씀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창조 이전에는 세상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가득했습니다. 빛이 창조 되자 이런 것들이 다 물러갔습니다. 세상의 혼돈, 공허, 흑암은 빛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빛이 있으면 질서가 있고, 공허하지 않고 충만하고, 어둠이 물러가고 밝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빛이 되면 세상은 질서가 있게 되고, 공허한 것이 충만하게 되고, 어두운 것들이 다 물러가고 밝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첫 피조물은 빛입니다. 사람보다 먼저 만드신 것이 빛입니다. 빛은 1초에 8억 미터를 갑니다. 빛은 침투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빛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곳을 다 비춰야 하고, 모든 어두운 심령에 침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빛이 되면 모든 곳에 다 침투할 수 있습니다. 
  
빛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빛을 만드셨다는 말의 히브리어의 뜻은 어두움에서 빛을 분리하셨다는 말입니다. 빛과 어두움을 분리하셨기 때문에 빛과 어두움은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빛이 있는 곳에는 더 이상 어두움이 없습니다. 어둠이 있는 곳에는 아직 빛이 없는 곳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두 말을 합하면 “나는 세상의 빛이고, 너희도 나와 같이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 아니시라면 우리가 빛일 수도 없고, 빛으로 살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나니”라고 합니다. 빛은 온 세상을 비춰야 하므로 등경 위에 둡니다. 그래서 교회는 높이 들려져야 하고, 높이 들려져 있기 때문에 드러나고, 드러나기 때문에 조금만 빛을 잃으면 세상이 금방 알아차리고 아우성입니다. 그래서 항상 교회는 조심스럽고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세상을 밝게 하는 유일한 방편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야 합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세상은 빛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으면 세상은 밝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나면서 시각장애로 태어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이 시각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냐고 물었습니다. “자기의 죄입니까 혹은 부모의 죄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아직 낮이매 우리가 보내신 이의 일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에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결론은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9:5)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세상의 빛이십니다. 예수님이 지금 계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히 빛만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세상의 빛이라는 말은 우리가 세상에 있는 동안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이 있는 동안 세상의 빛 역할을 잘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빛의 역할을 잘 한다는 것은 세상을 어둡게 만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에베소서 5:8에는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빛”입니다. 주 안에 있으면 빛으로 살 수 있습니다. 빛으로 살려면 주 안에 있으라는 말입니다. 주님 밖에서는 빛을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을 떠나서 빛으로 산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입니다. 
  
사울은 다메섹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늘에서 밝은 빛이 사울을 비춰 사울은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밝은 빛이 사울에게 비취는 순간 사울은 이전의 자신의 삶에서 떨어졌습니다. 밝은 빛이 비취는 순간 사울은 바울이 되었습니다. 빛이 비취면 누구나 사울이 바울이 됩니다. 핍박자가 전도자 됩니다. 우리 모두가 빛으로 삶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빛으로 우리의 인격과 소명이 새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42:9에는 “너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빛이 되면 시각장애를 가진 자가 빛을 가지게 됩니다. 갇힌 자가 자유를 얻게 됩니다. 흑암에 처한 자가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의 빛인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 빛이 있어야 합니다.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성인들의 그림에 보면 머리 위에 둥글게 빛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후광이라고 합니다. 흔히 우리가 ‘아무개가 아무개의 후광을 업고 산다’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어떤 사람의 특별한 권위나 권력의 도움을 받는 경우를 뜻합니다. 우리에게 후광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말미암는 우리 머리 위의 빛 때문에 세상이 밝아져야 합니다. 우리의 빛 때문에 다른 사람이 덕을 봐야 합니다. 

  
결론 

이탈리아 아동문학가 까를로 꼴로디의 ‘피노키오 모험’(1882)은 동화가 영화화되어 전 세계에 알려진 세계의 동화입니다. ‘피노키오의 모험’에는 나무 인형 피노키오가 등장합니다. 어느 날 피노키오가 벽난로 옆에 다리를 뻗고 불길에 바짝 다가앉아 있었을 때, 고통에 대한 무감각은 그의 가장 큰 취약점이 되어 불타 없어지게 할 뻔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피노키오처럼 세상의 악과 오염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세상 죄악에 무감각해 져버린 그리스도인은 거짓이 많아져서 점점 코가 길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악을 봐도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똑같이 악을 저질러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가 맛을 잃은 소금의 변질되었고, 밝음을 잃은 빛으로 전락했습니다. 이런 때에 교회는 다시 세상의 소금이라고,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크게 열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16에는 “이 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합니다. “빛이 있으라”고 하신 하나님은 이제 우리에게 “빛이 되어라”고 하십니다. 한 마디 명령으로 빛이 있게 하신 하나님은 빛이 되어라고 명령하셔서 빛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는 다시 어둠이 없도록 빛이 됩시다. 세상을 어두움을 몰아내고 세상이 밝아지게 만듭시다. 
  
우리 모두가 소금이 되어 세상의 부패를 방지합시다. 빛이 되어 세상의 어두움 몰아냅시다. 그리하여 세상이 칭찬하는 교회, 세상이 높이 들린 등불처럼 바라볼 수 있는 교회, 우리 서로가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그리스도인이 되어 세상에 참 소망을 전하는 2012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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