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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다시 불일듯 하게 하라(1) (딤후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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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불일듯 하게 하라(1) (딤후 1:1-8)  

2012년! 이 한 해에 하나님께서 주시길 원하시는 은혜를 마음껏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이 한 해에 어떤 기록을 남기기를 원하십니까?

인도 델리의 기네스 리쉬(Guinness Rishi 67)는 490g짜리 대형 케첩 한 병을 단 39초 만에 마십니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빨대로 케첩을 가장 빨리 마시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케첩만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19개의 세계 기록을 보유했다고 주장하며 본명인 하 파르카쉬(Har Parkash)란 이름까지 공식적 기록 보유자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기네스 리쉬로 바꿨다고 하네요. 그는 모터스쿠터를 1천1시간 동안 작동시켰다는 기괴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또한 세상에서 가장 나이 많은 양자를 들인 사람이란 기록을 세우기 위해 61세 처남의 법적 후견인이 되었습니다. 64인치 각설탕 탑을 세우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의 이 기괴한 묘기들은 기네스북에 아직 기록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기록을 세우기 위하여 기록을 세웠는데 기록에는 기록되지 않은 진기록을 세웠습니다.  

여러분은 이 한 해에 어떤 것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까? 어떤 기록을 남기시기를 원하십니까? 

혹시 아무 소원도 기대도 없는 분이 계십니까? 그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 아니라 아주 교만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대하시는데 자신은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포기하는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목표나 세우면 곤란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소원을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소원이 우리의 비전이 되어야 합니다.  

2012년 한 해, 우리 영생교회가 달려가야 할 목표를 오늘 본문 말씀에서 정했습니다. 

그것은 6절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라는 말씀에서 ‘다시 불일듯 하게 하다’입니다.

‘다시 불일듯 하게 하다’[ajnazwpurevw/아나조퓌레오]는 말은 말 그대로 ‘다시 불을 붙이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불은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불조심 표어의 불이 아닙니다. ‘다시 기운을 돋우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은혜의 선물을 불일듯 하게 되살아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성령의 능력이 다시 타오르게 하자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서신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로마의 감옥에 두 번째 들어가 다가오는 죽음을 준비하면서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남긴 최후의 편지입니다. 여기에는 디모데를 향한 사도 바울의 간절함이 배어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디모데 개인이 어떠하였었는데 어떤 형편에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격려이자 경고입니다.  

디모데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I. 그랬던 

3절입니다.
: 3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바울에게 있어서 디모데는 매우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의 감옥에 있는 바울이 밤낮으로 기도를 할 때에 끊임없이 생각나는 사람이 바로 디모데였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양심을 걸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기도할 때 마다 생각나고, 생각날 때마다 느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감사였습니다. 바울이 기도할 때마다 디모데가 생각났고, 디모데가 생각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중요한 책임을 맡겼습니다. 그것은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서 목회하는 것입니다. 청년 디모데는 그곳에서 사도 바울을 대리하여 거짓 교사들과 싸우며, 교회의 일꾼을 세우고, 교회의 규칙을 만드는 일을 하였습니다(딤전 4:12). 이런 디모데를 사도 바울은 보고 싶었고 그를 생각만 하는 것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딤후 4:9, 21).

1. 생각하면 감사한 소망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어야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감사한 사람으로 기억되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모쪼록 이 한 해를 통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삶이되기를 소원합니다. 

디모데는 또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4절입니다.
: 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바울이 디모데를 깊이 생각하였던 것은 그의 눈물을 기억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세 번째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에베소에 들을 시간이 없어서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를 불러서 말씀을 전하고 헤어지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행20:37). 그 때 디모데도 그 자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울과 디모데는 작별을 아쉬워하며 특히 다가오는 큰 어려움을 느끼면서 피차를 위하여 뜨거운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 주었습니다.

2. 눈물을 흘리는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따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나는 한 번도 울어 본 적이 없다’는 사람과는 사귀지 않은 것이 좋다고들 합니다. 그런 사람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사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을 수 있는 따스한 마음은 우리 삶의 또 다른 활력소입니다.

함께 웃을 뿐만 아니라 함께 울 수 있는 따스한 마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또 디모데는 어떤 사람입니까?
5절입니다.

: 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디모데의 아버지는 헬라인이고, 모친은 유니게라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경건한 유대인이었습니다. 신앙심이 좋은 외할머니 로이스도 함께 살았기에 디모데는 돈독한 신앙의 모습을 보면서 자랐습니다(행16:1, 20:4, 딤후 1:5).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할머니와 어머니의 신앙적인 감화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는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졌는데 이 말은 ‘가식이 없는’, 겉치레가 없는 솔직 담백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3. 거짓이 없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여자의 화장은 무죄라고 하지만, 신앙인의 가식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최소한 하나님 앞에서는 꾸밈이 없는 정직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 사이에는 적당히 가리는 것이 예의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정직하게 서는 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겨진 자신의 영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한 해에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고, 함께 아파하여 눈물을 흘리고, 순수하고 정직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상처 받기 쉽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현재 디모데의 상황이 그렇습니다.
그랬던 디모데가 지금 이렇게 변했습니다.  
  

II. 이렇게 

디모데는 지금 어떤 형편에 있습니까?
6절입니다.

: 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바울은 디모데가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고, 함께 눈물을 흘리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것을 다시 일깨워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처음 사역을 맡았을 때 가졌던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일어나게 하려고 합니다. 뜨거운 마음을 회복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디모데의 형편은 어떠하다는 말입니까?

1. 은사의 불이 꺼져가는 형편입니다.

완전히 불씨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불꽃이 멈추고 점점 줄어들어 사그라져 가기 직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랬던 디모데가 이렇게 변할 수 있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 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처럼 왕년에 어디 은혜 한번 안 받아 본 사람 있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을 향하여 불타오르던 열정이 ‘아 옛날이여!’가 된 것은 아닙니까?

지금은 영적으로 엘리의 시대와 같습니다. 한나의 어린 아들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습니다(삼상3:1). 성경은 이때를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삼상3:2)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작 문제는 엘리의 시력이 아니었습니다. 영적으로 아무것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20세기의 선지자라고 불리는 에이든 토저는 종교가 부패해 가는 과정을 1단계 기계적인 상태, 2단계 습관적인 상태, 3단계 부패한 상태로 규정하였습니다. 기계적인 상태는 아무런 느낌도 없이, 의미도 없이, 감동도 없이, 행복함도 없이 종교적인 활동을 반복하는 상태입니다. 다음의 습관적인 상태는 자신이 기계적인 상태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상태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패한 상태가 되면 신앙은 허울뿐이고 명예나 권력이나 이익을 따라 종교 생활을 하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이 부패한 상태에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기계적인 상태나 습관적인 상태에 있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기계적인 상태와 습관적인 상태의 차이는 아픔을 느끼느냐 느끼지 못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은 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는 초기 단계입니다. 그러나 아픔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를 깨우치려는 말씀을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서 배척한다면 심각한 단계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의를 자랑하고 교만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려는 부패한 그리스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깨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희망이 있습니다.

배성현이 가사를 쓴 ‘죄악의 사슬’이라는 복음송 2절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첫사랑의 뜨거움이 식어져서 눈물 흘릴 때
십자가를 지고 가신 주님 평안을 약속했네
주님의 사랑 사모하는 곳에 주의 응답 임하니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 주여 내게 승리 주소서

우리는 첫 사랑의 뜨거움이 식어진 것을 느끼고 눈물을 흐리고 있습니까? “광야의 세상에서 외로움에 눈물 흘릴 때”라고 찬양할 수 있습니까? 너무 세상을 사는 재미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다시 불을 지펴야 합니다.

또, 디모데는 어떤 형편에 까지 갔습니까?
7절입니다.

: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에서 디모데에게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행여 디모데가 두려워하여 비겁하게 뒤로 물러서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여기에서 두려움[deiliva/데일리아]이란 ‘의기소침해 있거나 비겁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나이가 어린 목회자로써 디모데는 목회 현장에서 많이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아무도, 그대가 젊다고 해서, 그대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십시오.”(딤전4:12/표준)라고 권면하여야 했습니다. 더욱이 그는 육체적으로 병약했습니다. 그에게는 위장병, 흔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생긴다는 위장병과 함께 또 다른 여러 질병이 있었습니다(딤전5:23). 우리는 여기에서 디모데의 형편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는 복음을 증거하기는커녕 오히려 두려워하는 마음에 지배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2. 복음 증거를 두려워하는 형편입니다.

오늘, 과거에 열심히 일하던 많은 사역자들이 세상을 향하여 도전하던 용기를 잃어버리고 오히려 세상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역자들이 자신이 받은 상처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두려움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오래전, 제가 감리사로 일하면서 보았던 안타까웠던 것은 많은 교역자들이 세상을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보인 것입니다. 그 분들도 교회를 개척을 해서 열심히 노력했으나 안 된다는 절망의 벽 앞에 놓여 있는 듯했습니다. 신앙적으로 탁월한 분들이었고 그래서 목회자가 되었음에도 현장의 싸늘함에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요단강을 멈추어 서게 하셨던 살아계신 하나님이 저 멀리 계시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전도는 예수 믿는 사람도 두려워하고 예수 믿지 않은 사람도 두려워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믿는 사람은 전도하라고 할까봐 두려워하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전도 받을까봐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사실이 아니겠지요? 피차 두려워한다면 먼저 두려움을 떨치고 나아가는 사람이 승리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원하면서도 얻을 수 없게 하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하여 우리는 다시 불을 붙여야 합니다. 다시 불일듯 하게 하여야 합니다.  

또, 디모데는 어떤 형편에 까지 이르렀습니까?
8절입니다.

: 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을 위하여 갇힌 몸이 된 바울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렇다면 디모데는 어떤 형편에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까? 디모데가 바울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처음에,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복음전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로마의 감옥에 처음 갇혔을 때 그를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석방되었을 때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디모데의 마음에 부담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믿으면 된다고, 기도하면 이루어진다고 설교하였는데 다시 재차 바울이 투옥된 것이 실망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교인들이 바울 사도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안부를 물을 때 하나님이 이렇게 도우셨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형편이 못된다고 여기고 얼버무려 버리고 있었습니다. 재차 감옥에 갇힌 바울을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3. 다른 성도를 부끄러워는 형편입니다.

정작 감옥에 갇힌 바울 자신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를 지켜보는 디모데는 부끄러워하였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태연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가는데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이 쑥스러워하고 겸연쩍어하고 몸 둘 바를 몰라 하다가 시험에 들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없어서 바울을 감옥에 넣으시고 감옥에서 죽게 하시는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우리가 그런 일을 함께 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자랑스러워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다시 하나님께서 붙여 주시는 불을 우리의 가슴에서 타오르게 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이든 토저는 ‘우리의 가장 큰 적은 틀에 박힌 종교 활동이다’고 하였습니다. 신앙이 습관의 지배를 받게 되면 감동을 잃고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습관적인 신앙에 빠져서 입술로는 찬양을 하지만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습관적으로 계명을 지키고 있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사29:13).

우리는 어느 정도 평안하다고 느끼는 습관적인 신앙을 깨뜨려야 합니다. 오히려 영적인 불안함을 느껴야 합니다. 어떻게 하여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지를 고민하여야 합니다.

당근과 달걀 그리고 커피가 있습니다. 이를 끓이면 어떻게 변하겠습니까? 딱딱했던 당근은 끓이면 물컹물컹해집니다. 부드러운 계란은 끊이면 단단해집니다. 그러나 커피는 끓이면 어디론가 사라지지만 대신 물에서 좋은 향기가 납니다.

인생은 언제나 쉽지만은 않습니다. 인생에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을 겪으면서 우리는 당근처럼 물컹하게 변할 수 있습니다. 또 계란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커피처럼 끓는 물속에서 자신은 녹아졌지만 물을 커피 맛으로 물들일 수 있습니다. 시련이 문제가 아니라 시련을 통과한 후 어떤 모습으로 변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려움이 있을 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은사로 불이 타올라야 할 사람들입니다.

다시 불일듯 하게 하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기를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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