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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랑 (요일 3: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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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랑 (요일 3:13-24)

 
1. 사람들이, 이 세상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

성도 여러분, 우리는 事件과 事故가 날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지난 주간 저도 모르게 아주 오래 전에 불렀던 복음송을 혼자서 흥얼거렸습니다.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 이 모든 인간 고통 두려움뿐 그 지겨움 끝없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개인적인 안정과 가정의 평안과 사회의 평화를 원하지만, 정작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아픔과 상처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가까이에도 사는 것이 벅차서 숨을 헐떡이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학교 폭력과 왕따를 못이겨 자살한 학생의 부모와 뜻하지 않게 加害者가 되어버린 가해자 학생들의 부모, 대학을 졸업하고도 직장을 구하지 못한 청년들과 취직이 안 돼서 어쩔 수 없이 대학을 휴학한 학생들, 예상치 못한 失職에 괴로워하는 이들과 그 가족들, 사고를 당한 이들, 질병에 걸린 이들과 그 가족들 …. 어디 그 뿐입니까? 굳이 ‘내가 힘들다, 내가 아프다, 내가 가난하다’ 등 이름표를 달거나 표시를 내지 않아도 저마다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 또한 얼마나 많습니까? 올해는 이런 사람들을 보듬어 주는 사람, 아픔과 상처로 고통하는 세상의 위로자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며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주변 사람과 이 세상을 보듬고 살아가기 위하여,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산소와 같은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경이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결같이 말하는 바,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어떤 것일까요?

2. 성도가 세상을 대하는 방법

1) 사랑은 하나님의 것

적어도 성도라면 사랑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받았고, 또 지금도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랑을 몰라요, 나는 사랑할 줄 몰라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사랑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랑의 원소유주는 하나님이시죠. 오늘 본문 3장 16절,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 놓으신 것이 진정한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을 논하고, 사랑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우리의 삶을 사랑이라고 표현한다면, 적어도 사랑의 원소유주인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가 내 사랑을 행하고 있다고 인정할 수 없다’고 하시면, 우리의 사랑은 가짜가 되고 말 것이고, 우리는 할 말을 잃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우선입니다. 사랑을 알고 싶습니까? 먼저 하나님을 아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2) 신자의 표시인 사랑

하나님께서 구약 성도들에게 주신 계명은 십계명을 포함하여 아주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두 365개의 계명을 주셔서 매일 하나씩 지키도록 했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365개의 계명을 구체적으로 해석한 더 많은 계명들이 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계명”이라는 이름으로 요구하신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사랑의 계명이지요.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주신 계명인 이 사랑에 대해 프란시스 쉐퍼 목사는 “사랑은 신자의 標識”, 즉 ‘마크’ 혹 ‘이름표’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는 여러분의 삶에서 나타나는 사랑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은 기독인의 표시인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정말 사랑을 實踐 實行하면서 살아오셨습니까? 혹시 여러분 주위에, 그리고 여러분이 지나온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여러분에게서 사랑 아닌 다른 것을 보지는 않았을까요? 

유명한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의 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어느 귀부인이 아주 추운 겨울날 자기 마부를 데리고 극장에 갔습니다. 극장에서 상연되는 연극은 아주 불쌍한 사람을 외면하는 인물의 이야기였습니다. 연극을 보던 그 귀부인은 아주 흥분해서 극중의 인물을 비난하고 욕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러는 동안 자기 마부는 극장 밖 추운 곳에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제 친구 중에 부모님과 가족들이 어릴 때는 교회 잘 다니다가 어떤 일로 인해 교회 안 나가실 뿐 더러 자녀들도 교회에 발을 못 대게 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부모님께서 그렇게 돌변하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신 아버님은 결혼을 해서도 큰 형님과 형수 밑에서 10년을 살다가 分家했습니다. 그렇게 살면서, 分家하면서 형님 내외분에게 받은 상처가 너무나 컸습니다. 그런데 바로 형님과 형수님이 교회의 중직에 계신 분들이었습니다. 그렇게 分家한 후 제 친구의 부모님은 ‘형님 내외분이 믿는 예수는 절대로 믿지 말자’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 친구도 아주 어릴 때 교회 다니다가 대학에 들어와서야 겨우 교회에 다시 다니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자주 듣는 이야기 가운데는 교회에서 아주 열심인 어느 집사님이 자기 부하 직원들에게서는 원성을 듣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이 실망하는 몇 가지 이유 중 주된 것은 ‘아니, 저 사람도 교회 다니는가!’라는 사실 때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하는 사랑이라는 것이 혹시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사랑은 아닙니까? 사랑에 대해 감동하고, 사랑이 아닌 것에 대해 흥분하면서 정작 자신은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모순이 여러분의 경우는 아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이 사랑과 관련하여 아셔야 하는 또 다른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수많은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영화와 드라마와 소설과 시를 창작해낸다고 해도 그들은 근본적으로 사랑을 모릅니다. 왜요?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사랑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과 이 세상은 우리의 진정한 사랑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보입니다. 3장 13, 14절,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즉 진정한 사랑을 모르는 이 세상은 성도가 주님이 보여주신 진정한 사랑을 행할 때 도리어 미워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과 함께 오늘 본문은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더 말해 줍니다. 첫째는 성도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자신을 미워하는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43절부터 4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즉 예수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해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된다’고도 하십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불의한 죄인들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형제에게 문안하는 것 역시 이방인들도 잘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그들보다 한 차원 높은 윤리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자신을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원수에게도 문안할 수 있는 넓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요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루마니아의 살아있는 순교자로 알려진 리챠드 범브랜드 목사님과 약 30여명의 크리스천들이 아주 잔인한 비밀경찰에 의해서 체포당했습니다. 그는 목사님과 성도들을 잔인하게 고문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열 두 살 난 소년이 그 경찰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꽃 한 다발을 안고 경찰을 찾은 그 소년이 경찰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우리 엄마와 아빠를 체포해 가신 분이에요. 오늘은 엄마의 생일인데요. 나는 엄마의 생일이면 언제나 꽃다발을 사 드렸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당신이 부모님을 체포해가서 드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엄마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나에게 언제나 원수를 사랑해야 하고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엄마가 안 계시니까 이 꽃으로 대위님의 아이들의 엄마를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어서 가지고 왔습니다.” 대위는 그 꽃다발을 받으면서 머리에 숯불을 얹은 것처럼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솟구치는 눈물을 걷잡을 수 없어서 그 소년을 안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고귀한 삶을 사는 기독교인들처럼 자신도 남은 생애 예수님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고, 결국 나중에 그도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한 어린 아이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서 한 인간을 변화시켰고, 믿음이 흔들리던 옥중 성도들이 그 소식을 들음으로 어떤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본문 3장 16절은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을 받은 사람은 누구든 받은 사랑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가 그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며, 또한 우리는 지금까지 주님의 사랑을 먹으며 자랐습니다. 보고 느끼고 듣고 먹은 것이 오직 사랑이니 우리는 사랑 밖에 모르는 사람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4장 11절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 본문은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의 수준을 말씀합니다. 형제의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 동정과 관심을 베푸는 것이나, 재물로 도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성도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 이익을 포기하고, 시간과 돈을 포함해서 사랑을 위해 자신이 손해를 보는 것, 나아가 실제 생활에서 형제를 위하여 죽으려고 하는 것,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오직 한 가지의 계명만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무엇이며, 또 사랑이 아닌 것은 무엇인지를 알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제까지 여러분은 사랑을 잘 아는 사람이었는지는 몰라도 사랑을 행하는 전문가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사랑 실천 전문가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생활에 시기와 미움이 있다면, 물어 볼 필요도 없이 여러분은 세상에 속한 자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아파하는 이웃, 외로운 이웃, 병든 이웃, 고통하는 이웃이 그대로 있다면 여러분은 참 성도가 아닐 것입니다. 사랑, 포기, 나눔, 자기희생 만이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시입니다. 사랑을 행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여러분이 신자이냐 아니냐를 알게 해주는 유일한 표시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을 보여주는 사랑(요일4:7~21)

사랑의 첫 번째 측면은 지금 말씀드린 대로“사랑은 성도인 표시”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 7절 이하에서는 사랑의 두 번째 측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일과 관련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여러분에게 지금 당장 어느 한 사람을 만날 기회가 주어진다면, 누구를 만나시겠습니까? 저는 하나님을 뵙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만약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사랑할 때, 그때 우리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드러나실 것이고, 그때 우리는 그 하나님을 뵐 수 있을 것이며,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정말 놀라운 말씀 아닙니까?

어느 추운 겨울날, 미국의 한 빈민가를 굶주린 소년이 터벅 터벅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갈 집도 의지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 만치 문이 열려있고 불이 환하게 밝혀진 집이 보였습니다. 마치 자기를 환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집 대문에는 “요3:16”이라고 적혀 있었는데요. 소년은 그것을 보면서 그리로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그 집사람들이 그 소년을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그 소년은 ‘아, 요3:16이라는 것은 나 같이 오갈 데 없는 아이를 반갑게 맞아 주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요3:16이라고 적힌 식탁에 따뜻한 국과 음식이 놓여 있었습니다. ‘아, 요3:16은 이렇게 따뜻한 음식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에 그 소년에게는 아주 안락하고 평안한 침대가 주어 졌습니다. 침대 역시 요3:16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아, 요3:16은 이렇게 평안한 것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다시 그 소년에게는 풍성한 아침 식탁이 주어졌습니다. 역시 요3:16이었습니다. 드디어 아침 식사를 한 후에 그 집 식구들과 이 소년은 식탁에 함께 앉아 요3:16을 찾아 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를 읽은 후, 그 집의 부인은 그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지금까지 네가 이 집에서 받은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사랑 때문에 가능했단다.” 그제서야 그 소년은 요3:16의 비밀을 알았습니다. 자신을 반갑게 환영해준 것, 따뜻한 음식을 준 것, 평안한 잠자리를 준 것, 풍성한 아침식사를 준 것 등을 통해 요3:16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라고 말하기보다 그 사랑을 따뜻한 영접으로, 음식으로, 섬김과 수고로 나타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이 보여질 것이고 말씀의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이야기”가 바로 이것을 말해주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사랑을 실천할 때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 여러분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보게 되면 바로 그 곳에서 하나님을 볼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볼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사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게 될 때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본적이 없는 사람이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때까지 사랑을 실천 실행하시기 바랍니다.

3. 사랑의 힘

말씀을 맺겠습니다.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의 한 초등학교 복도에는 독특한 게시판이 있다고 합니다. 그 게시판에는 하트 모양의 종이가 빼곡히 꽂혔는데, 거기에는 학생들이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학교에 이 특별한 게시판이 만들어진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 때문에 벽장에 숨어 지내던 ‘라이언’은 친구들과도 거리를 둔 탓에 늘 외로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은 반 학생 네드가 점심시간에 혼자 밥을 먹는 라이언을 보았습니다. 네드는 그에게 다가가 같이 먹어도 되느냐고 물었고, 라이언은 깜작 놀라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라이언은 그날 온종일 네드의 친절에 어떻게 감사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복도에 있는 게시판을 발견했습니다. 라이언은 하트 모양으로 오린 종이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글을 썼습니다. “네드, 오늘 함께 점심 먹어 줘서 고마워. 정말 즐거웠어, from 라이언.” 다음 날, 라이언의 쪽지를 읽은 한 학생이 용기를 얻어 사이가 멀어진 친구에게 “미안해”라고 쓴 하트 모양 종이를 붙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학생도 말로 전하지 못한 사연을 종이에 담았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수백 개의 하트가 게시판을 가득 메웠고, 학생들은 게시판을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의 사랑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월간 『좋은생각』‘사랑의 게시판’ 중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고 상대방에 입장에 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고난 받으시고 죽으신 것이 바로 이러합니다. 사랑하는 대상의 위치까지 낮아져서 그를 뒷받침하고 이끌어주고 위로하고 격려하셨지요. 여러분이 상처 입고 아파하는 이웃과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도 그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그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 사랑, 사람”은 원래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사랑을 행하고 사랑을 받을 때 비로소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말이지요. 사랑이 없는 교육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사랑이 없는 기술은 허무할 뿐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고 인생의 소중한 열매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이웃을,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이 모든 사람을 오직 사랑으로만 대할 때, 주변 사람들이 변화될 것이고, 이 세상도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이 올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삶입니다.

이 시간 결단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2012년에는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사랑을 실천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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