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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처럼 (막 10:3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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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처럼 (막 10:35-45)
   
싱가포로의 시티 하베스트 교회의 콩히 목사님이 쓰신 책 중에 “예수로 나를 리노베이션 하라”는 책이 있습니다. 읽어보니 그의 설교집이었습니다. 건축용어로 ‘리노베이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존의 건물을 허물지 않고, 개보수하여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 리모델링과 리폼과 비슷하게 쓰이지만 가장 넓은 의미로 쓰이는 말입니다. 요즈음 리노베이션하는 건물들이 많아졌습니다. 건물의 외모양이야 바꿀 수 없지만, 내부는 완전히 뜯어 고치고 수리하여 편리한 구조를 가지고 쓸모 있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도 나의 속사람을 완전히 개조하여 뜯어 고치고 예수님이 주인으로 사시는 새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과거에 매이고 고집으로 뭉쳐진 나를 걷어내고, 예수님으로 우리를 리노베이션하여야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위대하신 건축가이시고, 실내장식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소유하시는 것으로 양이 차지 않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신령한 건축가이십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9)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예수님처럼 되기 원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를 새롭게 빚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고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과 같이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불평불만’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평생 허구한 날 걱정을 달고 살았다고 하여도 남은 인생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날 때부터 고집불통으로 살았다고 하여도 그렇게 고집쟁이로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걱정은 내 천성이야, 나는 평생 비관만 하고 살 거야. 그게 나야. 나는 성질이 못됐어. 그 행동이 어째서 나도 어쩔 수 없어. 내가 본래 그래. 내 성질 안 바뀌어.”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러진 다리는 내 본연의 모습이야. 그냥 놔두는 수밖에 없어”라고 하실 것입니까? 우리 몸에 고장이 났다면 의사의 도움으로 건강을 찾고 성한 육신으로 살고자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 우리의 정신, 우리의 감정, 우리의 마음이 고장 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상처 난 마음을 바꾸어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을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야 새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이시며 목회자이신 맥스 루카도는 "Just Like Jesus"-“예수님처럼”이란 책을 썼습니다. Just라는 말을 정확하게 번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Just 라는 말은 강조하는 말인데, 틀림없이, 바로, 꼭, 정말로, 그대로, 실제로 라는 뜻입니다. “딱 예수님처럼”이라는 말입니다. “딱 예수님처럼”이라는 말이 좋습니다. 

맥스 루카도박사는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대로 두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이 예수님처럼 되기 원하신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엄청난 보화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우리의 모습은 지금의 모습과는 전혀 달라집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정신과 가치관과 사명이 나를 온전히 지배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을 살 것입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석에 쳐 박아 놓고, 우리 앞에 얼씬거리지 말라고 한다면, 그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 제가 어디를 나가면 따라오지 마세요’라고 하면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죄와 싸워 이기게 하시고, 성실과 정직으로 사람답게 살게 하시고, 영혼을 사랑하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게 하시고, 항상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보배요, 보화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 주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팔아 사야만 하는 보화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목회자이신 척 스윈돌 목사님이 하신 이야기 중에 흥미 있는 예화가 있습니다. 플로리다 웨스트 팜비치에 사는 어떤 할머니가 71세의 나이로 혼자 외롭게 죽어 있었습니다. 검시관의 보고는 비극적인 것이었습니다. “사망 원인 : 영양실조” 그 할머니는 23Kg으로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서 죽었습니다. 그녀를 발견하였던 수사관은 그녀가 살았던 곳은 실제로 돼지 우리였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상상해볼 수 있는 가장 지저분한 곳이었습니다. 어느 경험이 많은 수사관은 그렇게 어지럽고 지저분한 곳은 예전에 본적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 할머니는 이웃집 뒷문에서 음식을 구걸하였고, 구세군에서 주는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할머니는 돈 한 푼 없는 쓸쓸하고 불쌍하고 모든 사람들에 잊혀진 과부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추측은 하나도 맞지 않았습니다. 그 할머니의 더럽고 헝클어진 뒤범벅이 된 살림살이를 꺼내다가 두 개의 열쇠가 발견되었습니다. 수사관들은 그 두 개의 열쇠가 두 개의 다른 은행에 있는 안전금고 열쇠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찾아낸 것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금고에는 700개가 넘는 주식 증권과 20만 달러의 현금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은행의 안전금고에는 여러 가지 중요한 문서들이 있었고, 채권들, 여러 유가증권들이 있었고, 정확히 현금만 60만 달러가 있었습니다. 두 박스를 합치면 그 할머니는 백만 달러의 부자였습니다. 

방송국의 기자가 뉴스를 전하면서 그 돈은 먼 조카의 손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였답니다. 먹을 것도 먹지 못하여 영양실조로 죽었는데, 아끼는 것만이 좋은 일입니까? 자기는 영양실조이면서 그 돈 두었다고 어디에 쓸 것입니까? 돈 좀 꺼내어 좋은 음식도 사 먹고, 좋은 옷도 사 입고, 부티 나게 폼 나게 살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왜 거지 같이 살다가 영양실조로 죽는 것입니까? 참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우리 구주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 딸들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라는 놀라우신 보화를 꺼내어 사용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앞장세우시고 예수님을 따라 우리도 승리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예수님처럼 살기만 하면 가장 아름답게, 보람 있게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요, 목표요, 목적이면서 우리의 삶의 길이요, 방법이요, 모델이 되십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처럼 살기만 하면 이 세상은 놀라운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죽은 척하지 말고, 정말 예수님과 함께 죽기만 하면 이 세상을 달라지는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죽은 척하지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에서 “그리스도를 닮지 않은 그리스도인들만 사라져도 복음의 승리에 방해되는 최대의 장애가 없어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두려운 말로 들어야 합니다. 우리들 모두가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아가겠다고 결심해야 하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야겠습니다. 진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없어서 우리 사회는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꾼, 예수쟁이, 예수통, 예수 골수분자,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한 불교도가 예수를 전도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를 믿기 원합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속에서 예수님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제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을 어떻게 믿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인도에 선교사로 활약한 목사님이 힌두교 학생을 만나서 아주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학생은 말합니다. “저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리스도인을 증오합니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사두 순다르 싱(선다 싱)이 마하트마 간디에게 어떻게 하면 기독교가 인도를 정복할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 때 마하트마 간디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 당신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 둘째, 당신은 기독교를 타락시키거나 손상시키지 말고 그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셋째, 당신은 사랑을 강조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랑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이자 생명이기 때문이다. 

한 힌두교 철학자는 “예수 그리스도는 훌륭하고 이상적인 분이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을 닮지 않았다. 당신이 그리스도처럼 산다면 내일 당장이라고 인도가 당신의 발 앞에 무릎 꿇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들어가 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형제가 함께 제자단에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있고,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있었습니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비장한 각오로, 하나님의 뜻이면 죽는다는 결단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고 있었습니다. 

이미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백성의 장로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으실 것이고, 삼일 만에 살아나실 것을 세 번째로 말씀하신 직후였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막10:33-34)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메시아의 왕국을 일으키시고, 로마를 몰아내고, 유대나라를 재건하실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주님 앞에 나와서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참 세상에,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다 받아달라는 말이요, 무엇을 구하든지 무조건 다 이루어달라고 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두 형제의 어머니와 그들을 위하여 말씀드린 것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아마 어머니의 이름이 살로메라고 하는데, 살로메가 나올 자리에 예수님의 이모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예수님과 야고보와 요한은 이종 형제간이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인척관계를 자세히 말하지 않지만, 미루어 짐작해보는 것입니다. 이들 형제는 가족적인 연대와 가까운 인척관계를 이용하여 무뢰한 부탁을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 형제에게“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들 형제가 구하는 것은 다른 제자들이 들으면 분노할 사안이었습니다. “주의 영광 중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시면 주님은 왕위에 오르실 것이요, 그 다음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두 형제가 앉겠다고 합니다. 욕심도 과하지,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이 가장 높은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하니, 기막힐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요청을 한 마디로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두 제자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겠다고 하는 것을 단칼에 거절하거나 나무라지 않고, 새롭게 결단하고 헌신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기꺼이 받아주시고 있습니다. 

두 제자가 말합니다. "할 수 있나이다" 라고 합니다. 두 형제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잔과 세레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대답하였는지 모르지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잔이나 세례는 다 같이 수난을 말하는 것이요, 고통을 상징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지금 내가 이르는 말을 알아듣고 말하는 것이냐고 나무라지 않고, 두 제자의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주시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자기의 목숨을 바쳐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도 다 우리 주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주님은 두 제자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두 제자를 가장 귀한 일에 사용하실 의지를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제자가 주님이 받으시는 잔과 세례를 받고, 주님을 위하여 많은 고난에 동참한다고 하여도 주님이 앉으신 좌우에 세워주시는 것은 예수님 당신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시며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들 두 제자는 예수님이 받으시는 잔과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야고보는 가장 먼저 순교한 제자요, 요한은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서 교회와 성도들을 돌아보신 사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신령한 의미에서 두 제자의 요구를 들어주셨다고 봅니다. 

이쯤 이야기가 오고 가는 것을 들으면 다른 10명의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낼만도 합니다. 12제자들은 며칠 전에도 가버나움으로 가는 길에서 심히 다툰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의 한 집에 들어가셨을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고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을 제자들의 눈만 보아도 다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직설적으로 나무라면서 책망하지 않고, 우회적으로 돌려서 이곳으로 오는 길에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고 간접적으로 물으셨습니다. 12제자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는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다시 섬김의 자세를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짐 콜린스라는 사람이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Good to Great)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미국에서 100만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입니다. 그가 모교인 스탠퍼드 대학에서 강의할 때는 전체 학생의 절반정도가 수강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첫 장에서 “좋은 것은 위대한 것의 적”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 말은 파격적인 말입니다. 좋은 것은 큰 것, 거대하고 위대한 것의 적이다. 그리고 거대하고 위대해지는 것이 그토록 드문 이유는 대개는 바로 그 때문이다. 거대하고 위대한 학교는 없다. 대개의 경우 좋은 학교들이 있기 때문이다. 거대하고 위대한 정부는 없다. 대개의 경우 좋은 정부가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삶을 사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대개의 경우 좋은 삶을 사는 것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회사들은 위대해지지 않는다. 바로 대부분의 회사들이 제법 좋기 때문이다. 저자 짐 콜린스는 이것이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비즈니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문제입니다. 좋은 학교가 위대한 학교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신문이 위대한 신문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좋은 교회이지만, 위대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조직을 위대한 조직으로 바꿔야 합니다. 좋은 사람을 위대한 사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저자는 제5 단계의 경영자가 되어야 좋은 기업에서 위대한 기업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합니다. 1단계는 능력이 뛰어난 개인, 2단계는 합심하는 팀원, 3단계는 역량있는 관리자 4단계는 유능한 리더 5단계로 피라미드의 정상에 서는 사람은 “개인적인 겸양과 직업적 의지를 융합하여 지속적으로 큰 성과를 일구어 내는 지도자”라고 합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강열한 의지의 사람입니다. 겸양+의지의 지도자를 5단계 정상의 지도자라고 합니다. 

한 사람을 예로 드는데, 형편없는 제지회사의 CEO가 된 다윈 스미스라는 사람입니다. 20년 동안 주식시장에서 바닥을 치던 제지회사를 일약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운 사람인데, 그는 주간에 일하면서 야간대학을 공부하였고, 작업하다가 손가락이 잘렸는데, 그 날 밤에도 학교에 갔고, 다음 날 회사에 나왔고, 그는 풀타임 근무를 하면서 하버드 로스쿨을 나왔고, 비강암과 후두암을 앓아 1년밖에 살지 못한다고 판정을 내렸는데도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25년을 더 살았고, 항상 겸양의 미덕을 보이면서 불굴의 의지를 가진 지도자였습니다. 

짐 콜린스는 ‘창문과 거울’이라는 비유를 말했습니다. 정상에 서 있는 5단계의 지도자는 일이 잘 풀릴 때에는 창문 밖을 내다보면서 자기 자신 이외의 요인들을 가지고 찬사를 돌립니다. 창문을 통하여 밖을 내다보면서 수고한 사람들, 사회적인 요인 같은 것으로 성공하기까지 수고한 사람들을 칭찬합니다. “저 대단한 사람들을 보십시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에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고 결코 운이 나쁜 것을 탓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설교하는 시간이고 경영학을 강의하는 시간이 아니기에 자세한 말씀을 다 드릴 수 없지만, 교회와 성도들은 우리의 목표가 되시고, 우리의 모델이신 예수님의 정신, 예수님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겸양과 희생,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룩하시는 의지가 역설적으로 결합되었습니다. 

45절 말씀에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섬기신 모습 그대로 본받아 우리도 섬김의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우리는 2011년을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였습니다. 나를 섬겨주시고, 나를 받아주시고, 불쌍히 보신 우리 주님, 나를 구원하여 주신 예수님이 온전히 내 안에 나를 살아가실 수 있도록 나를 내어놓고 주님만이 역사하시는 복된 사람들, 예수님처럼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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