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소금을 담아오라 (왕하 2:19-22, 골 4:4-6)

첨부 1


소금을 담아오라 (왕하 2:19-22, 골 4:4-6)  
  
서론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포샤는 세 명의 청혼자에게 그녀의 초상화가 들어있는 상자를 고르게 하였습니다. 세 개의 상자 중 하나는 금상자인데 그 상자 위에는 “누구든지 나를 택하면 남자들이 바라는 것을 얻을 것이다”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상자는 은상자인데 “누구든지 나를 택하면 그 사람은 합당한 대가를 얻을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사니오라는 남자는 무서운 글이 적혀 있는 납 상자를 선택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택하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는 글귀가 있었습니다.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택하는 여기에 가장 큰 도전과 가장 큰 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한 일만큼 대가를 받기를 원합니다. 세상의 일이나 인간관계는 거기에 상응하는 정당한 대가를 얻으려고 하고 또 얻는 것이 정상적인 사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온갖 위험과 고난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얻는 일은 당장 눈에 보이는 대가가 없을지 모릅니다. 
  
좋은 사회는 정당한 사회입니다. 자신이 수고하고 일한만큼 대가를 받는 사회입니다. 일한 결과가 분명히 주어지는 사회가 좋은 사회입니다. 아무리 일해도 결과가 없고, 수고에 대한 대가가 없으면 불의한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는 부당한 사회입니다. 놀고먹는 자가 많은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닙니다. 새치기하는 사람이 빨리 가고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 안 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닙니다. 힘 있는 자가 더 많이 가지고 힘없는 자는 가지지 못하는 사회는 의로운 사회가 아닙니다. 
  
어니 젤린스키는 열심히 일한 대가는 미래에 받게 되지만 게으름의 대가는 지금 당장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일했지만 미래에도 대가가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수고해도 결실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정성을 다해 심어도 거둘 것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마 이런 경우는 저주받은 것일 것입니다. 
  
시편 127:1-2에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면 수고의 대가가 없습니다. 인간이 하는 수고가 다 헛됩니다. 
  
엘리사는 기적을 많이 베푼 선지자입니다. 여리고의 물을 깨끗케 하였습니다. 자신에게 대머리라고 조롱하던 사람 42명을 암곰에게 물려 죽게 하였습니다. 가난하여 아들이 종으로 팔려가게 된 수넴여인의 그릇을 기름으로 채워주었습니다. 엘리사의 제자가 죽어 과부가 된 부인의 죽은 아들을 살렸습니다. 아람왕의 군대장관 나아만 장군의 한센병을 고쳤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로부터 영감을 받고 후계자가 된 다음 사역의 첫 번째 기적은 여리고의 물을 깨끗하게 하여 많은 열매가 맺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읍의 터는 좋으나 물이 좋지 못하여 열매가 익지 못하고 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엘리사는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오게 하여 소금을 물 근원에 뿌렸습니다. 말씀과 함께 소금을 뿌렸을 때에 물이 깨끗하게 되어 토산이 떨어짐이 없이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엘리사의 첫 번째 기적과 같은 기적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올해는 대가가 없는 수고는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땀 흘리고 수고하는 대로 토산이 떨어짐이 없이 많은 열매를 맺기를 바랍니다. 애쓰고 수고한대로 많은 대가를 얻는 풍성한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풍성한 대가가 있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새 그릇이어야 합니다. 

열왕기하 2:20에는 “엘리사가 이르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고 합니다. 소금은 변치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금은 언제나 짠 맛을 내는 맛의 기본입니다. 소금은 청결하게 하고 부패를 막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금은 변하지 않지만 소금만 변하지 않고 깨끗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릇입니다. 그릇은 소금을 담는 용기에 불과하지만 용기가 없으면 내용물도 없습니다. 그릇은 형식을 말합니다. 그릇은 또 우리의 오랜 관습을 뜻합니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형식이 그릇되면 내용도 가치도 상실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새 그릇이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그릇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사용했지만 다시 깨끗하게 씻은 그릇을 말합니다. 만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그릇을 말한다면 새 그릇이 얼마 없을 것입니다. 새 그릇을 구하기조차도 힘들 것입니다. 깨끗하게 씻은 그릇을 새 그릇으로 인정해주기에 새 그릇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릇은 내용물을 담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릇은 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릇이 깨끗하지 못하고 내용물에 걸맞지 않으면 내용물도 맛이 없게 됩니다. 커피를 바가지에 담아 마신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맛있는 커피라도 제 맛이 나겠습니까? 커피는 커피를 담을 만한 그릇에 담아야 맛이 납니다. 소금은 소금을 담을 만한 그릇이 있습니다. 그 그릇은 새 그릇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신앙의 좋은 그릇이 필요합니다. 신앙인으로서 반듯한 형식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의 바른 삶의 규범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깊은 신앙이라도 좋은 신앙적 모습이 없으면 그 신앙은 쓸모가 없습니다. 내면의 신앙의 깊이는 행동을 통하여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야고보서 2:26에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영혼과 몸의 관계에서 영혼과 몸은 서로 필요합니다.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온전하지 못합니다. 육체가 없으면 영혼도 우리 속에 존재하지 못합니다. 영혼이 없으면 육체는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육체는 마치 영혼을 담는 그릇과 같습니다. 
  
기독교 역사의 3대 신비주의자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엠마누엘 스베텐보리 그리고 썬다싱이라고 합니다. 스베텐보리의 ‘위대한 유산’이란 책에 보면 “우리가 ‘나’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영체를 말하는 것이다. 육신에는 생명이 없다. 육신은 영체의 그릇이요 도구일 뿐이다”라고 합니다. 그릇 없이 물체을 담을 수 있습니까? 육신 없이 영혼이 존재할 수 있습니까? 우리 영혼의 그릇인 육체를 잘 간수해야 합니다. 육체를 정욕에 버려두지 말아야 합니다. 육체가 성령을 거스르게 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4:7에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비록 질그릇이지만 보배를 담으면 가치 있는 좋은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비싼 금그릇이라도 안의 내용물이 좋은 것이 아니면 가치 없는 그릇입니다. 새 그릇은 예수 그리스도를 담은 그릇입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전입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의 그릇입니다. 우리의 몸은 성부, 성자, 성령의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은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배를 담은 그릇이 되면 마시지 못하는 죽은 물이 살아 있는 물이 되고, 익지 못하는 열매가 풍성하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바리새인 시므온의 집에 예수님께서 들어가셨을 때에 한 죄 많은 여인이 향유 옥합을 깨트리고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이 여인은 귀한 옥합을 깨트리는 순간 완전히 새로운 그릇이 되었습니다. 옥합이 깨어지기 전에는 한낮 창녀의 더러운 손 떼가 묻은 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옥합을 깨뜨리는 순간 주님의 발을 씻기는 향기 나는 깨끗한 그릇이 되었습니다. 옥합을 깨트리는 순간 죄 사함의 그릇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옥합을 깨트린 여인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계시면 우리 육신의 그릇이 깨어집니다. 육신의 그릇이 깨어지면 향기가 나고, 아름다운 소리가 나고, 죄 사함의 은총을 입습니다. 
  
디모데후서 2:21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고 합니다. 귀한 그릇은 비싼 그릇이 아닙니다. 깨끗한 그릇입니다. 
  
우리 모두가 새 그릇이 됩시다. 깨끗한 그릇이 됩시다.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그릇이 됩시다. 선한 일에 준비된 그릇이 됩시다. 세상의 소금인 우리 모두가 깨끗한 그릇이 되어 새 그릇에 담긴 소금을 세상에 뿌려 풍성한 열매를 맺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물 근원이 맑아져야 합니다. 

열왕기하 2:21에는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이르되”라고 합니다. 소금은 물 근원에 던져야 합니다. 근원이 깨끗해져야 아래도 깨끗해집니다. 근원이 맑지 못하면 아랫물은 흐리게 마련입니다. 가끔은 서울에 비가 많이 오지 않았지만 한강에 흙탕물이 내려올 때가 있습니다. 한강의 원류에서 비가 많이 와서 흙탕물이 되면 한강도 흙탕물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물의 근원이 문제입니다. 나무의 뿌리가 문제입니다.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 문제입니다. 최근의 중학교의 폭행과 학생 자살 사건을 보세요. 초등학교까지 성추행과 성폭행이 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아니라 부모가 문제이고 선생이 문제입니다. 열매가 풍성키 위해서는 물 근원을 고쳐야 합니다. 세태의 풍습을 바꾸려면 인간 심성의 근본이 변해야 합니다. 근본 심성이 변하지 않고는 결코 변화나 결실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완벽한 땅이었던 에덴동산이 사람의 범죄로 땅이 파괴되었습니다. 창세기 4:12에는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고 하십니다. 땅이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심성이 문제입니다. 인간의 범죄로 땅이 망가지고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노아시대에 와서는 땅이 더 더러워졌습니다. 창세기 6:11에는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12절에는 해답을 줍니다.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땅이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물이 왜 나빠졌겠습니까? 인간의 부패로 땅이 열매를 내지 못하고, 물이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근본이 부패하게 되고, 인간의 원죄가 똑같은 죄를 또 범하게 하고,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인류의 죄성은 살인, 간음, 우상숭배, 절도, 거짓말 등 온갖 죄를 저지르게 하는 것입니다. 원죄라고 하는 죄의 뿌리를 뽑지 않으면 아무리 작은 먼지를 털어내도 또 죄를 짓게 되고 재범, 삼범이 되는 것입니다. 한 때 ‘대도’라고 불리던 조세형씨를 보세요. 그가 개과천선하여 전도사가 되어 간증하러 다녔는데 일본에 갔다가 아주 작은 것을 훔쳐서 다시 감옥에 갔습니다. 대도가 좀도둑으로 전락했습니다. 죄의 근본을 해결하지 못하면 인간의 옛날 죄의 습관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51:5에서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고 합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를 취하여 간음죄를 짓고 우리야를 전쟁터 전방에 보내어 죽데 한 다음 회개하는 시입니다. 그는 절절히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데 ‘간음죄를 지었습니다’, ‘우리야를 죽게 했습니다’라는 겉으로 드러나는 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뿌리 깊은 죄의 본성을 회개합니다. 이것이 참 회개입니다. 
  
옛말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하지 않습니까? 물의 근원이 맑으면 아랫물은 절로 맑게 되어 있습니다. 어른들이 잘해야 아이들이 좋은 것을 따라합니다. 전통이 좋아야 문화가 건강합니다. 기본이 잘되어 있어야 잔기술이 뛰어납니다. 
  
물은 흘러가는 것입니다. 물은 유행을 뜻하고, 전통을 비유합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갈수록 물이 흐려져 갑니다. 물이 맑지 못하고 흙탕물이 흘러내려옵니다. 이 시대의 유행을 보세요. 소돔과 고모라의 유행과 흡사합니다. 노아 시대의 유행을 닮아갑니다. 가정이 파괴되고, 극단적 자기사랑에 빠지고,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예사이고 심지어 폭행과 존속살인도 서슴치 않습니다. 무정하고, 배신하고, 조급하고,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보다 더 합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현실입니다. 
  
물은 생명입니다. 지구는 물입니다. 지구의 70%가 물입니다. 그러므로 물 근원이 맑아야 지구도 깨끗합니다. 사람도 물입니다. 사람의 70%가 물입니다. 사람도 물의 근원이 맑아야 깨끗합니다. 물이 좋지 못하면 결실하지 못하고 깨끗하게 하는 기능이 사라지므로 물이 좋지 못하면 지저분합니다. 
  
물의 기능 가운데 하나는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빨래할 때도 목욕할 때도 물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깨끗하게 해야 할 물이 깨끗하지 못하면 그런 물로는 다른 것을 깨끗하게할 수가 없습니다. 나무는 물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무에 나쁜 물을 주면 열매는 커녕 나무까지 죽습니다. 좋은 물이 좋은 열매를 맺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급하여 물이 없어 목말라 할 때에 그들이 만난 물은 마라의 쓴 물이었습니다. 물은 있었지만 마시지 못하는 물이었습니다. 그 샘에서 나오는 물은 쓴 물이었습니다. 물 근원이 깨끗하지 못하고 달지 못하면 달고 좋은 물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근원이 깨끗해야 마실 물을 공급합니다. 좋은 물을 마실 수 있게 합니다. 모세는 말씀에 따라 나뭇가지를 마라의 샘에 던지니 물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나무가 무엇을 상징합니까? 나무는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마시지 못하는 물의 근원이 소금으로 맑아집니다. 마시지 못하는 쓴 물이 십자가로 단물이 됩니다. 몹쓸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됩니다. 정결하게 하는 샘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물의 근원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고 열매도 많이맺습니다. 
  
십자가에서 흐르는 피인 예수님의 보혈이 모든 사람의 근본을 바꾸어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보혈은 말랐던 고목에 꽃이 피게 하고, 메마른 가지에 열매가 맺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합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주님의 피로다 보혈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예수님의 보혈은 모든 것을 정하게 합니다. 
  
모세의 첫 번째 기적은 물이 피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나일강에 닿자 강물뿐만 아니라 모든 물이 피가 되었습니다. 물이 피가 되면 죽음입니다. 물이 죽으면 아무도 마시지 못합니다. 물이 피가 되면 처절하고 참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은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포도주가 된 물은 맛을 주고, 향기를 주고, 멋을 줍니다. 우리의 물 근원이 피입니까? 포도주입니까? 사망입니까? 생명입니까? 우리의 근원이 생명으로 많은 결실하는 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적조’라는 현상이 있습니다. 바닷물에 플랑크톤이 폭발적으로 발생하여 붉은 빛을 띠는 현상입니다. 강력한 일사로 표층수의 수온이 상승하여 생기는 것입니다. 적조가 생기면 바다의 물고기가 다 죽습니다. 물에서 고기가 죽으면 사람도 죽습니다. 고기가 살지 못하는 물은 사람도 살지 못합니다. 물의 근원이 맑지 못하면 파괴, 파멸, 죽음, 공포밖에 없습니다. 
  
미래의 세계는 물 전쟁이 가장 심각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미 물과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성범죄와의 전쟁, 폭력과의 전쟁, 조폭과의 전쟁, 미신과의 전쟁, 이 모두가 물이 나빠서 벌어지는 전쟁입니다. 이 전쟁이 물과의 전쟁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의 결론은 “그 물이 엘리사가 한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에 이르렀더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고침 받는 2012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침받기를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고침 받기를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말씀으로 다 고쳐지기를 바랍니다. 많은 열매를 맺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깨끗하게 숙정하셨습니다. 채찍을 만들어 치셔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어떤 이는 자신이 채찍을 드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채찍을 들 자격이 없습니다. 내가 채찍을 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 손에 들려진 채찍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채찍이 되어 내가 먼저 아파해야 이 땅이 고쳐집니다. 
  
내가 소금을 뿌리는 자가 아니라 뿌려진 소금이 되어야 이 땅이 고쳐지고 이 땅이 많은 열매를 거둡니다. 세상의 물의 근원은 내가 고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고치십니다.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시편 107:20에는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합니다. 2012년은 이전 어느 해보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더 어려울 것이라고 합니다. 고치시는 하나님께서 위험한 지경에 있는 우리나라, 우리 교회, 우리 가정을 친히 고쳐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그릇이 새 그릇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형식과 관습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삶과 교회의 삶의 모습이 확실히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므리바에 던진 나뭇가지로 물이 단물이 된 것처럼 십자가의 피로 우리 마음과 관습이 깨끗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리고의 샘에 던진 소금으로 물이 맑아진 것처럼 소금인 우리로 하여금 물이 깨끗하게 되고 부패가 방지되고 많은 열매를 맺어 풍성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