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삿 16:23-31)

첨부 1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삿 16:23-31)


몇십 년 전 소위 '7080 시대'에 유행되었던 애창가요 중에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난 낙엽 지는 소리에 갑자기 텅 빈 내 마음을 보았죠 / 그냥 덧없이 흘러버린 그런 세월을 느낀 거죠 /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늦어 버린 것이 아닐까 / 흘러 버린 세월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좋을까 /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가사의 노래였습니다.
  
비록 대중가요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공감할 인생철학을 담고 있는 것이어서 저도 지금까지 즐겨 부르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아마 우리 모두가 다 인생을 살다가 문득문득 바로 그처럼 '어쩌면 나의 지난날들은 그냥 덧없이 흘러 버린, 정말 아쉬운 세월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흘러가 버린 과거에 대한 이와 같은 후회는 특히 지난날의 시간이 헛되이 낭비되었을 때에 더욱 클 수밖에 없습니다.
좀 더 값있게, 좀 더 의미있게, 좀 더 충실하게 살지 못한 자기의 지나간 나날들을 돌이켜 보면서 '나는 정말 바보처럼 살았구나'하는 허탈감에 빠지게 될 때보다 더 '마음이 텅 빈 느낌'은 없을 것입니다.

그 옛날 블레셋 사람의 성 가사에 있던 다곤 신전의 두 기둥을 의지하고 그 사이에 서 있던, 몸은 묶여 있고 두 눈은 뽑힘을 당해 있던 저 유명한 사사 삼손이 바로 그처럼 자신의 지나간 인생에 대한 후회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삼손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신성한 '나실인의 서약'과 함께 출생했고 또한 이스라엘의 사사로 20년을 지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성장기는 결코 모범적인 청년 시절이라 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인생 낭비의 표본이라 불릴 만큼 허랑방탕한 세월로 그의 인생 황금기를 탕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삼손의 저 유명한 최후의 외침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라는 말은, 바로 그처럼 어리석게 살았던 자신의 과거를 가슴속 깊이 후회하면서 하나님께 외쳤던 절규의 기도였던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과연 우리가 어떻게 살 때에 바보 같은 실패의 인생이 될 수밖에 없으며 반면에 어떻게 살 때 후회 없는 충실한 인생을 살게 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무엇이 사람을 실패의 인생으로 전락시킵니까?

우리는 삼손의 실례를 통해 사람을 '실패의 인생'으로 이끄는 세 가지 대표적 요인들을 찾을 수 있는데, 그 첫째는 '부모 공경을 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삼손이 그의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기 시작한 첫 걸음이 되었습니다.
사사기 14장 1절부터 3절에 "1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딸 중 한 여자를 보고 2도로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 중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취하여 내 아내를 삼게 하소서 3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취하려 하느냐 삼손이 아비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를 데려 오소서 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사건은 삼손이 부모의 조언을 전혀 듣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행동하는 불효자였음을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그는 블레셋의 딤나라는 동네에 살고 있던 "블레셋 딸 중 한 여자"를 보고 마음에 들어 아내로 삼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것은 율법의 말씀에 명백히 금지된 일이었고 더욱이 삼손 같은 사사로서는 결코 행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성경에 그 여자를 가리켜 "처녀"라는 단어 대신에 "여자"라고 한 것은 그녀의 배경이 그리 깨끗하지는 못했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는 것입니다.

물론 삼손의 부모로서는 펄쩍 뛸 일인지라 그를 극구 만류했지만 삼손은 "나는 꼭 그 여자라야만 됩니다."하면서 끝내 부모의 충고를 거역하고 자기 고집대로 하려 했습니다.
비록 14장 4절 말씀에 "이 일이 여호와께로 나왔다"라고 설명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삼손의 행위를 인정해 주셨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이 말은, 결과적으로 볼 때, 삼손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도록 섭리하셨다는 뜻이지, 하나님께서 나실인이면서 사사인 삼손이 '불신 결혼'하는 것을 기뻐하셨을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그처럼 삼손 인생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까?
왜냐하면 그것은 곧바로 그의 하나님에 대한 경외의 신앙이 약화되는 것과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모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삼손은 또한 하나님의 율법도 어기게 되었고 그 이후 점점 더 하나님을 제멋대로 거역하는 모습을 보여 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사람이 이 세상의 인간관계에서 제일 처음으로 가지게 되는, 그리고 마지막까지 꼭 지켜야 할 '제일의 수직관계'입니다.
만일 이 눈에 보이는 수직관계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받들고 경외하는 자세란 결코 배우려 해야 배울 길이 없기 마련입니다.
그런 까닭에 레위기 19장 32절 말씀은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여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른 앞에 일어서고 부모를 공경할 줄 아는 것이 곧 여호와를 제대로 경외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과 직결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인간관계가 다 동동한 수평관계가 된다 하더라도, 사람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수직관계는 부모 공경과 그것을 통해 배우게 되는 하나님 경외이며 이것들만큼은 끝까지 지켜야 할 마지노선과 같은 것입니다.
실로 부모 공경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그 인생의 출발점에서부터 흔들리는 것이고 결국 실패의 길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실패하는 인생으로 이끌어 가는 두 번째 요인은 '육체를 따라 연락하는 생활'입니다.
사사기 14장 10절 이하 20절에 기록된 내용은 정욕이 이끄는 데로 노는 것을 좋아했던 삼손의 성격을 잘 반영해줍니다.
그 중에서 10절부터 12절에 보면 "10삼손의 아비가 여자에게로 내려가매 삼손이 거기서 잔치를 배설 하였으니 소년은 이렇게 행하는 풍속이 있음이더라 11무리가 삼손을 보고 삼십 명을 데려다가 동무를 삼아 그와 함께 하게 한지라 12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수수께끼를 하리니 잔치하는 칠일 동안에 너희가 능히 그것을 풀어서 내게 고하면 내가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너희에게 주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삼손은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딤나의 그 블레셋 여자와 끝내 결혼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혼 잔치라는 것은 '신랑을 위해서 행하는 풍속을 따라' "삼십 명을 데려다가 동무를 삼아" 즐기는 것으로서 오늘날의 소위 '총각 잔치'(bachelor party)와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미국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문란하고 퇴폐적인 잔치였습니다.

그런 잔치를 하면서 삼손은 또한 엄청난 액수의 판돈까지 걸고 수수께끼를 내기도 했습니다.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은 대충 따져도 '천만 원에서 천오백 만원'가량 되는 거액의 내기였습니다.
삼손은 그처럼 블레셋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면서 제멋대로 노는 파티에 이미 숙달된 사람이었으며, 그의 첫 여자였던 딤나 여인과의 관계는 그 내기가 계기가 되어서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삼손은 그 후에도 계속 블레셋의 큰 도시들에 놀러 다니면서 여자들과 사귀었습니다.
사사기 16장 1절에 보면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손은 분명히 사사였으며 더구나 '나실인의 성별 서약'까지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삼손이 블레셋의 대도시인 가사에 놀러가서 거기서 유흥가를 찾아 갔고 한 기생과 잠자리를 같이 했던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를 알고 매복하고 있었지만 삼손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유유하게 그 기생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밤중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를 가두려고 블레셋 사람들이 잠가 두었던 성문짝들과 문설주와 빗장을 빼내어 어깨에 짊어지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까지 가볍게 새벽 산책을 하듯이 나아갔던 것이었습니다.

매복해 있던 블레셋 사람들은 이런 삼손의 여유 있는 모습을 보고 완전히 기가 죽어 그를 공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여자와 노는 재미에 빠진 삼손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초인간적인 힘을 믿고 이처럼 자기를 잡아 죽이려는 블레셋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적지에서도 마음 놓고 기방을 출입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대사사였던 삼손의 청년 시절은 이처럼 먹고 마시고 노름하고 불신 이방 여인과 즐기는 생활로 탕진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서구 사회 전체를 타락시키고 퇴보시키는 대표적인 사고방식 중에 하나가 바로 "놀기 위해서 일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육체를 따라 연락하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재미와 목표가 되어 버릴 때, 그 사람은 필연적으로 실패의 길, 나중에 이를 갈고 후회할 수밖에 없는 길로 흘러가게 마련인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사람은 일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지 놀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결코 아님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즉 우리는 더 잘 일하기 위해서 때때로 노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3장 4절과 5절은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놀기 위해서 사는' 사람은 자연히 '육체의 정욕'에 빠지게 되고 결국은 경건생활을 부인하는 인생의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실패하는 인생으로 이끄는 세 번째 결정적인 요인은 곧 '하나님의 은혜의 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삼손이 또한 그러했습니다.
나실인으로 거룩히 서약한 가운데 성장하던 삼손은 날이 지남에 따라 그 서약을 통해 묶여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줄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는 일찍부터 나실인의 서약을 하나씩 둘씩 깨뜨리고 있었는데, 사사기 14장 5절부터 9절의 말씀이 그 한 가지 예입니다.
  
삼손은 길에서 만난 사자를 맨손으로 찢어 죽인 후에 나중에 그 사자의 죽은 몸에서 "벌떼와 꿀"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삼손은 그 꿀을 취하여 부모에게 갖다 드렸지만 그 꿀을 어디서 얻었는지는 부모에게 "고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왜 삼손은 그 사실을 부모에게 숨겼던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그가 '죽은 사자의 시체에 가까이 가서 손을 댄' 것이 곧 나실인의 서약을 어긴 행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민수기 6장 1절 이하 21절의 말씀에 보면 나실인 서약을 한 사람은 세 가지 금기 사항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첫째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인데, 이는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머리털을 자르지 않는 것인데, 이것은 고린도전서 11장 10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 복종'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이 곧 죽은 시체에 접근하지 않는 것인데, 이것은 '죄악의 결과인 죽음을 멀리하는 정결생활'의 표식이었습니다.
이런 서약들을 지킴으로써 나실인은 문자 그대로 '성별된 자', '하나님께 바쳐진 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것을 모를 리 없는 삼손이었지만 이상의 사건들을 볼 때에 그는 이미 첫 번째 서약과 세 번째 서약을 어기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처럼 삼손이 부모를 거역하고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며 나실인의 서약을 깨뜨리기까지 하는 가운데서 그래도 딱 하나 남아 있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자신의 머리털을 자르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사실상 삼손의 머리털 자체가 그의 큰 힘에 대한 무슨 신비스러운 근원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14장부터 16장까지의 여러 사건들을 통하여 계속 반복되듯이 삼손의 큰 힘은 오로지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여" 즉 '성령의 감동'으로 나타난 것일 따름이었습니다.
  
삼손은 그처럼 어긋난 길로 자주 빠지던 와중에도 그 나실인의 서약 중에 마지막 남은 하나 즉 '삭발 금지 서약' 하나만은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것만 가지고서 그래도 삼손이 '하나님의 권세에 복종하고 있다는 표'로 인정해 주시고 필요할 때마다 그에게 큰 힘을 내려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삼손이 그 마지막 은혜의 줄마저 끊어버리는 최후, 최악의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삼손이 들릴라에게 빠져 버렸을 때였습니다.
사사기 16장 17절 이하 19절에 "17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18들릴라가 삼손의 진정을 다 토함을 보고 보내어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을 불러 가로되 삼손이 내게 진정을 토하였으니 이제 한번만 올라오라 블레셋 방백들이 손에 은을 가지고 여인에게로 올라 오니라 19들릴라가 삼손으로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본즉 그 힘이 없어졌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으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삿 16:6)고 들릴라가 삼손에게는 실로 치명적인 질문을 해 왔을 때에 그는 그 질문 배후에 있는 뻔한 내막을 짐작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세 차례는 적당히 거짓말로 넘겼지만 들릴라가 "당신이 날 사랑한다면서 왜 내게 거짓말하느냐?"고 졸라왔을 때 삼손은 결국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비밀을 실토해 버린 순간, 삼손은 그래도 그가 지금까지 지켜왔던 마지막 '하나님의 은혜의 줄'을 스스로 끊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저지른 일의 결과를 가리켜 이어지는 16장 20절 하반절은 "삼손에게서 힘이 빠져 버렸다"라고 하는 대신에 "여호와께서 이미 삼손을 떠나셨다"라고 문제의 정곡을 찔러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마지막 은혜의 줄이 무엇입니까?
다른 것은 못하지만 그래도 '주일 성수'하는 이 하나 때문에 최소한의 신앙생활이라도 유지되고 있습니까?
그것만이라도 결코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서리집사나 주일학교교사나 찬양대원이라는 직분 하나를 가지고 있는 까닭에 그것에 매여서라도 교회를 봉사하고 있습니까?
제발 그 줄만이라도 꼭 계속 붙잡고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 마지막 남은 '은혜의 줄', 비록 약한 것이고 그리 내세울 만큼 대단한 줄은 못 된다 할지라도, 그 줄 하나만이라도 지키고 있으면, 그것이 나중에 가서는 여러분 자신을 주님께 더욱 단단하게 매어 주는 '은혜의 사슬'로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필연적으로 사람을 실패하는 인생으로 이끌어 갑니까?
부모 공경을 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 경외 또한 할 줄 모를 때, 육체를 따라 연락하는 재미에 살다가 경건의 능력을 잃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시켜 주는 마지막 은혜의 줄마저 놓침으로써 여호와께서 그를 떠나시게 될 때에 그 인생은 오직 후회와 아쉬움으로만 가득 찬 실패의 길로 갈 수밖에 없음을 꼭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무엇이 사람을 성공의 인생으로 완성시켜 줍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처음에 읽었던 본문의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인데, 곧 '자기 인생에 주어진 사명을 깨닫고 이를 완수하는 것'입니다.
삼손은 바로 이 인생의 진리를 그가 죽기 직전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16장 28절에 "28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라고 기록된 사실입니다.

삼손은 양 눈을 뽑힌 처참한 몰골로 손발이 놋줄에 묶여 자그마한 소년에게 끌려 다니며 블레셋 군중들 앞에서 재주를 부리는 웃음거리로 전락했었습니다.
그런 후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그 이층짜리 건물 신전을 버티고 있던 두 개의 기둥들 사이에 세웠습니다.
그러자 자기를 인도하고 있던 블레셋 소년에게 부탁해서 그 두 개의 기둥들을 의지하고 서게 된 삼손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지나간 인생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회한만 가득한 과거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는 나실인이라는 지극히 거룩한 서약을 입고 태어난, 그야말로 장래가 촉망된 아이로 성장했었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이스라엘의 사사라고 20년 동안 그 명함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그의 생은 허점투성이, 실패투성이, 죄악투성이의 만신창이로 채워졌습니다.
부모를 속이기도 하고 거역까지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기적적인 힘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선용하여 블레셋 사람을 완전히 무찌르는 사사가 되기는커녕 자기 고집대로 블레셋 여인을 취하고 블레셋 남자들과 퇴폐적인 잔치에 어울리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 블레셋 여인들 중 하나에게 속아서 자신의 가장 귀중한 비밀까지 털어놓아 버리고 스스로 원수에게 포로가 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나는 정말 바보같이 살았구나.' - 삼손이야말로 이런 후회로만 가득한 가운데 자기 인생의 끝을 맞이하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바로 그때 삼손은 하나님께 마지막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 나를 생각하옵소서.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의 원수를 갚게 하옵소서."라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되겠습니다. 블레셋을 무찌르기 위한 사명을 입고 사사가 되었던 내가 이 모양 이 꼴로 인생을 마감해서야 되겠습니까? 제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못난 인생을 살았지만 이 마지막 순간만이라도 이전처럼 나를 성령으로 강하게 해 주시어서,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나도 같이 죽게 해 주옵소서."라고 삼손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기 인생에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절실히 통감하며 부르짖어 기도했던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옥에 갇혔을 때부터 삼손의 힘의 상징이었던 그의 머리털은 다시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삼손을 아직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시고 그가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셨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손이 자기의 인생 전체를 두고 통회 자복하면서 하나님을 다시 찾았던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즉시 그에게 큰 힘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 결과 삼손은 자기 평생을 두고 죽였던 블레셋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바로 그 다곤 신전에서 몰살시킴으로써 진정 이스라엘의 사사다운 사사로서의 영광스러운 유종지미를 남기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성경의 다른 대사사들도 그렇지만 삼손 역시 아무 흠 없고 완전무결한 인생을 산 사람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영적 육적으로 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로만 점철된 인생을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선지자나 사도들의 그런 실족과 범죄를 일부러 감추거나 포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쓰시고자 하시는 인물은 반드시 회복시켜서 끝내는 당신의 일을 하게 만드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삼손역시 바로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나중에 히브리서 11장에 가서는 위대한 신앙의 힘을 발휘했던 대 사사의 명단에 나란히 올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삼손은 그 수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회계하면서 자기 인생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 그것을 마지막 순간에서나마 완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모든 기독신자들의 인생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열쇠가 있습니다.
얼마나 모나지 않는 인생을 사느냐 하는 데에, 그저 법을 잘 지키고 예의 바르고 누구에게나 사람 좋게 보이면서 사는 데에 우리의 인생 성공 여부가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부분적으로는 단점투성이의 성격을 가지고 또 실수도 자주 저지르고 때로는 신앙생활에서 큰 실족에 빠질 때가 있을지라도 결국에 가서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모든 지난날의 과거를 진심으로 회개하면서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주신 사명 그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깨닫고 그것을 제대로 성취하고야 마는 이것 하나를 통하여 자신의 인생을 성공적인 유종지미로 완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계시록 14장 13절에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니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바로 그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끝날 때까지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한 일'이 끝나면 이제 저와 여러분은 곧바로 하나님 앞에 서는 순서밖에 다른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수고했다고 위로하시며 우리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며 그 영원한 안식에 불러 주시는 그 날까지,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바로 내게 맡기신 사명, 그것 하나만 붙잡고 남은 인생을 선한 싸움을 싸우며 달려갈 길을 다 마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나간 과거는 혹 실패와 죄로만 점철된 낭비 인생이 아니었습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낙심치 말고 이제 남은 인생만이라도 '다시는 죄를 범치 말고' 우리에게 다시 허락하신 이 새해의 기회를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라고 간절한 기도를 올리시면서 소중하게 선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거룩하고 의로운 사명' 이것 하나를 바로 깨닫고 꼭 그것을 성취함으로써 진정 하나님 앞에서 성공하는 인생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