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 (딤후 2:14-17)

첨부 1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 (딤후 2:14-17)


헨리 벤 다이크( (Henry Van Dyke)의 저서 ‘네 번째 동방박사 (The Fourth Wise Man)’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동방박사 세 사람 외에 알타반(Altaban)이라는 동방박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 세 가지 보물 즉 루비, 사파이어, 진주를 준비했습니다. 알타반이 말을 타고 베들레헴쯤 도착했을 때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앞에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급한 알타반은 망설이다가 그를 돕기로 하고 박사일행을 먼저 보냈습니다. 죽어가는 자를 낙타에 싣고 주막 주인에게 맡기고 세 가지 예물 중 루비를 꺼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약속한 곳에 갔지만 세 박사들은 떠났고 아기 예수도 헤롯의 박해를 피해 애굽으로 가신 후였습니다. 허탈해 하고 있는데 말발굽 소리와 비명 그리고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헤롯왕이 사내아기들을 죽이기 위하여 보낸 군사들이었습니다. 알타반은 아기를 구하기 위해 남은 예물 중 사파이어를 꺼내 병사의 대장에게 주었습니다. 이제 알타반은 예물이 진주만 남았습니다. 그는 아기 예수를 찾아 애굽으로 갔으나 찾지 못하고 33년의 세월이 흐르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갔는데 마침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날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알타반은 놀라며 골고다로 뛰어갔습니다. “33년이나 찾아 헤맨 왕이 돌아가시다니...진주를 주고서라도 구해야지.” 정신없이 달려가는데 노예로 팔려가던 소녀가 알타반의 다리를 끌어안고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불쌍한 마음이 들은 그는 예수께 바치려던 마지막 보물 진주마저 소녀의 몸값으로 주고 말았습니다. 이제 아무런 예물도 없게 되었습니다. “왕을 무슨 면목으로 보나!” 걱정하며 걸음을 옮기는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이 어두워졌고 무너져 내린 기왓장이 알타반을 덮쳤습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그는 죽어가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메시아를 만나 경배하려고 찾아 다녔지만 그분을 만나지 못한 채 죽게 되었습니다. 경배하려 준비한 보석마저 다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기도하던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알타반! 너는 훌륭한 나의 일꾼이다. 이미 너의 경배를 세 번씩이나 기쁘게 받았다. 작은 소자들에게 한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니라. 네가 만난 불쌍한 사람들이 바로 나이었느니라.” 알타반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알타반은 미소를 지으며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 계신 성전과 피 흘려 사신 교회를 사랑한다고 항상 고백합니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가 질문 앞에 망설이게 됩니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은 누구입니까? 자기 행위를 드러내고자 일하는 일군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도 묵묵히 일하는 참된 일꾼입니다. 모쪼록 부끄럽지 않은 일꾼이 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일을 하고도 욕먹는 부끄러운 일꾼이 되지 마십시오. 지나간 자리에 칭찬이 머무른다면 결코 부끄럽지 않은 일꾼인 것입니다. 바른 신앙의 모습은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됨에 있습니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되려면, 

첫째로 진리를 분별하라

작곡가 헨델 (George F. Handel)이 가발을 잃어버렸습니다. 당시에 가발은 중요한 물건이었습니다. 난처해하던 헨델에게 한 아가씨가 가발을 찾아다 주었습니다. 근처 이발소에서 일하던 여인이었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헨델은 그녀를 자주 찾아가게 되었고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헨델은 그녀에게 자신이 작곡한 오라토리오 ‘메시야’ 의 친필 악보를 주었습니다. 내심 그녀와 결혼할 생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헨델이 그 이발소에 들렀습니다. 아가씨는 헨델이 온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손님의 머리를 만지고 있던 그녀는 무심코 동료 이발사에게 “머리를 말게 악보 몇 장만 주세요”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헨델은 조용히 이발소를 빠져 나와 다시는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악보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여인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은 아닙니까? 말씀을 읽고 듣지만 모두가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은 성령께서 조명해야만 그 의미를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성경은 한 권의 책으로 보일 뿐 살아있는 말씀으로 와 닿지 못합니다. 

본문 15절입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여기 ‘옳게 분별하며’에 해당되는 ‘오르도토문타’ 는 ‘곧은’ 이란 뜻을 가진 형용사 ‘오르도스’ 와 ‘절단하다’ 는 뜻을 지닌 동사 ‘템노’ 의 합성어입니다. 석공이 대리석을 바르게 자르듯, 농부가 쟁기로 밭을 곧게 갈 듯, 경주자가 운동장을 규칙대로 달리듯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빗나가지 않고 바르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잘 분별하여 삶에 적용하는 일군이 되어야 합니다. 

아전인수(我田引水)라는 한자어가 있습니다. ‘제 논에 물대기’ 라는 뜻인데 자기에게 이롭게 되도록 멋대로 언행을 일삼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뜻에 맞도록 할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맞도록 나의 뜻을 고쳐야 합니다. 혹 말씀에 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듣기 좋은 말씀과 먹기 좋은 말씀만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진리의 말씀에 언제나 자신을 비추어 보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헌신에 힘쓰라

프러시아의 황제 프레드릭 윌리엄 3세 (Frederick William III)가 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심히 어려워 졌습니다. 고심을 하던 그는 여인들에게 국가를 위해 가지고 있는 보석을 바칠 것을 명령했습니다. 보석을 바치는 자에게는 감사의 표시로 훈장을 만들어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훈장 뒤에는 “나는 1812년 금을 주고 철을 얻었다‘ 라는 내용을 새긴 후 황제가 직접 사인을 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여인들에게 호응이 대단했습니다. 여인들은 보석보다도 이 훈장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당시에 훈장을 가슴에 달고 다니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액세서리 일만큼 유행이 되었습니다. 사치하던 여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반지와 귀걸이,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바치고 나라를 위해 충성했다는 철로 만든 훈장을 달고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 훈장이 필요합니다. 다이아몬드가 박힌 장식용 십자가를 달고 있는 일군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한 흔적이 있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15절입니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일군의 기준은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앞이라는 개념을 가져야 합니다. 헌신이 무엇입니까? 주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에 힘쓰지 않는 사람이 일군이 된다면 바리새인처럼 되고 맙니다. 말은 많이 하고 손끝하나 까닥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더 중한 의와 인과 신은 버리는 자들이라고 성경은 지적합니다. 신행일치가 안되는 일군의 모습입니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는 자의 삶은 실로 아름답습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려지는 거룩한 산제물이 되도록 헌신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6절을 통해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관제는 포도주를 붓는 제사를 뜻합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끊임없이 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산제사가 되기 위해 힘을 다해야 합니다. 세상 풍조나 유행에 휩쓸리지 말고 최고의 삶을 드리기 위해 힘써 노력하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경건에 나아가라

윌리엄 텔 (William Tell)에 대한 일화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총독 게슬러가 스위스를 통치할 때 시내 한 가운데에 장대를 세우고 모자를 그 위에 걸어 두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절하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윌리엄 텔이 아들과 함께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게슬러의 부하들은 윌리엄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윌리엄은 모자에 절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게슬러의 부하들은 그를 체포했습니다. 게슬러는 윌리엄에게 아들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놓고 활로 쏘라고 명령합니다. 윌리엄 텔은 화살 통에서 두 개의 화살을 뽑아 하나는 품에 넣고, 하나는 활시위에 얹고 아들 머리 위에 사과를 향하여 당겼습니다. 화살은 정확하게 사과에 꽂혔습니다. 

게슬러가 윌리엄에게 “왜 그대는 두 개의 화살을 뽑았는가?” 라고 묻자, 윌리엄 텔은 “만약 내가 실수로 사과를 맞추지 못하여 아들이 다치게 되면 나머지 화살로 당신을 죽이려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놀란 게슬러가 “당신은 내가 무섭지 않은가?” 물었습니다. 그때 윌리엄은 말합니다. “나는 이 땅에 태어난 후 지금까지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두려워해 본 적이 없다.” 경건이란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움으로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환경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하나님만 경외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본질적인 것을 놓치고 비본질적인 것으로 논쟁하거나 고민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교회 다닌 햇수입니까? 직분이 기준입니까? 학력입니까? 출신입니까? 외모입니까? 재력입니까? 그러나 이것들은 비본질적인 것들입니다. 결코 이런 것들로 평가되어서는 안됩니다. 경건은 본질적인 것입니다. 즉 신앙의 자세가 어떠한지, 생활 속에서의 신앙의 모습은 어떠한지의 문제입니다. 순종과 헌신, 말과 행동까지 포함한 경건이 신앙의 모습으로 반드시 나타나야 합니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에게 요구되는 모습은 바로 경건입니다. 

본문 16절입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경건에 이르는 연습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대단히 소중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8절입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경건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으로부터 귀하게 쓰임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삶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기도로, 말씀으로, 연습으로 경건에 이르러야 합니다. 경건에 나아가기를 힘쓸 때 비로소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이 될 것입니다.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이 선교 활동을 하고 있을 때 고국 선교 단체가 그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신을 도울 선교사를 보낼 예정입니다.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가는 쉬운 길이 있으면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리빙스턴이 회신을 보냈습니다. “쉬운 길로 오려는 선교사를 파송하려면 나는 원하지 않습니다. 전혀 길이 없어도 오려는 사람들을 원합니다. 

그리고 길이 없어도 오려는 사람이 나에게 필요합니다.” 쉬운 길을 찾아 알려 주면 쉽게 오고 쉽게 갈려고 하니 그런 일군은 선교에 필요 없다는 강한 의미입니다. 혹 신앙의 쉬운 방법만 찾는 일꾼이 아닙니까? 쉽게 직분을 감당하려는 모습은 아닙니까? 과연 누가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입니까? 진리를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헌신에 힘써야 합니다. 경건에 이르러야 합니다. 부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