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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들보를 빼어라 (마 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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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보를 빼어라 (마 7:1-6)

옛날 궁중에서 세자를 가르치라는 명을 받은 젊은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세자는 애송이 선생님을 무시하며 공부를 거부합니다. 젊은 선생님이 세자에게 제안합니다. 내가 수수께끼 하나를 내겠습니다. 세자가 맞추시면 내가 선생 노릇하지 않겠습니다. 세자가 맞추지 못하시면 나를 선생으로 인정하고 공부를 하시지요. 하니 그러기로 했습니다.  
  
“닫으면 세상이 깜깜하고, 열면 세상이 환하게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세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정치”라고 대답했습니다. 젊은 선생님은 “아닙니다. 눈꺼풀입니다.”
  
눈꺼풀이 닫히면 온 세상이 깜깜합니다. 눈꺼풀이 열리면 밝은 세상이 보입니다. 세자는 그렇게 쉬운 수수께끼를 맞추지 못해 그 시로부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세자이든 평민이든 눈꺼풀을 열어야 세상이 보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마6:22,23)라고 하셨습니다. 

가까운데 있는 것은 보이는데 먼데 있는 것은 안 보이면 근시입니다. 먼데 있는 것은 보이고 가까이 있는 것은 안 보이면 원시입니다. 자기 잘못은 안보이고, 남의 잘못만 보이면 “들보가 박힌 눈”입니다. 

  
󰊱 들보가 가리면 남의 티만 보인다

“비판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1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3절)     

먼지를 부는 사람은 자기 눈에 먼지가 들어갈 위험이 있습니다. 티는 작고 들보는 큽니다. 들보는 집을 지을 때 칸과 칸 사이 두 기둥머리를 건너지르는 통나무입니다. 티는 먼지나 작은 티끌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는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 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분명 죄인일 것입니다. 
  
탈무드에 자기가 이웃 입장에 서지 않는 한 이웃을 비판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을 비판하는 것은 비판하지 말라하신 말씀을 어긴 죄요, 다른 사람을 죽이는 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2절) 비판은 곧 심판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헤아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럴꺼라 미루어 생각하거나 짐작으로 따지고 살피는 것입니다. 
  
남을 비판하는 것은 자기를 의롭고 상대를 잘못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비판하는 것이 위험한 것은 사실 무근한 것을 그런 줄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확실한 증거도 없으면서 비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에게 특수한 사정이 있습니다. 그 사람 하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의 부모나 조상에까지 알아야 그 사람의 사정을 압니다. 그런 일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함부로 그의 행위를 비판한다면 얼마나 어리석고 오만한 일인지 모릅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여보 오늘 저녁 메뉴가 뭐요?”라고 물었습니다.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두 번째로 거실 문에서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역시 대답이 없습니다. 세 번 해도 아무 대답을 안 합니다. 이번에는 아내의 귀에 대고 “여보 오늘 저녁 메뉴가 뭐요?” 그때서야 대답하는데 무어라고 한 줄 아세요.
  
“이봐요, 김치찌개라고~ 김치찌개라고 대답한 것이 벌써 네 번째예요!” 귀가 안 들리는 사람은 아내가 아니고 남편이었습니다. 자기 귀에 들보가 있으면서 아내의 귀만 탓한 것입니다. 
  
성한 귀는 멀리서 하는 소리도 들립니다. 성한 눈은 멀리 봅니다. 미래를 내다봅니다. 시야가 넓습니다. 전체를 볼 줄 압니다.   

  
󰊲 들보는 무엇인가?

밤에 못 보는 눈을 야맹이라고 합니다. 자기를 못 보는 눈은 들보가 박힌 눈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자기를 못 보게 하는 시력장애입니다. 가장 중요한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바울이라는 사울의 눈에는 “비늘 같은 것”이 덮여 있었습니다. 눈을 덮는데는 두꺼울 필요가 없습니다. 얇을찌라도 시력을 가로막는데는 충분합니다. 구름이 가리면 해도 안보입니다. 눈앞에 있는 것도 눈이 가려지면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아니니아가 사흘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목하고 있던 사울을 찾아가 안수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행9:17-18).
  
사울이 교회를 핍박한 것은 그의 종교적인 편견이었습니다. 편견이라는 들보가 예수를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편견은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편견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비뚤어진 눈에는 모든 것이 뒤틀려 보입니다. 편견은 무지의 자식입니다. 편견은 썩은 이처럼 빨리 뽑아내야 합니다. 
  
사울은 사도행전 13장 9절의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라는 표현이 있고 부터 그의 이름은 사울에서 바울로 바뀌어 나타납니다. 그는 순수 유대혈통에서 태어났습니다. 자기는 바리새인이요 바리새인의 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행23:6). 
  
그는 13세쯤부터 당시 유명한 학자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했습니다. 자기는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다고 할 만큼 열성분자였습니다. 기독교를 극렬하게 반대하여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도 가해자로 참가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던 사람입니다. 기독교는 이단이라고 생각했고 이단은 박멸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다메섹에 숨어 있는 기독교인을 체포할 목적으로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의 그 음성을 듣고 거꾸러졌습니다.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의 눈에서 편견의 비늘이 벗겨진 것입니다. 눈에서 비늘이 벗겨진 후 예수 믿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눈과 마음은 직결되어 있습니다. 눈이 고쳐진 것은 관점이 고쳐진 것이고 마음이 달라진 것입니다. 
  
눈에서 들보를 빼는 것은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육체의 할례는 할례가 아니라,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롬2:28)라고 했습니다.   
  
미움은 마음의 들보입니다. 누구를 미워하면 그 사람의 실상을 볼 수 없습니다. 그의 나쁜 점 만 보입니다. 이것은 자기도 해치고 남도 해칩니다.  
  
시기가 들보입니다. 시기는 질투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욕되게 합니다. 시기심은 남이 잘되는 것을 못 봅니다. 남의 화를 기뻐하는 것이 자기 복보다도 훨씬 좋아합니다. 시기라는 들보 때문입니다.

  
󰊳 들보를 빼고 진주를 보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6절)
  
눈이 성해야 갈 길을 찾아갑니다. 눈은 은유적으로 마음을 지칭합니다. 눈이 보는 것은 마음이 보는 것과 거의 일치합니다. 들보를 빼낸 눈이란 분별력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물의 이치를 가려서 압니다.
  
무엇이 거룩한 것인지, 무엇이 진주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영들 분별함을 주셨습니다(고전12:10). 섹스피어는 자신의 분별력을 자신의 스승으로 삼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못 하였느니라”(마13:17)
  
선지자들도 의인들도 예수님을 보고 싶었지만 보지 못했으나 너희는 나를 직접보고 들으면서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진주를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눈에 들보가 박혀서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그가 누구신지를 몰랐습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것을 보는 눈은 복 있다”(눅10:13)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보는 눈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13:45,46)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는 사람은 자기 소유보다 더 큰 진주의 가치를 아는 자입니다. 
  
들보는 마음의 눈을 가로막는 장애를 말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이적과 큰 기사를 보면서도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없느냐고 탄식했습니다.(신29:3-4)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막8:18)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고하셨습니다. 그는 가서 씻고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 마음이 밝은 뒤에야 군자와 소인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3:18)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비판력 보다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비판적인 판단은 피하고 분별은 필요합니다. 들보를 빼어낸 눈으로 바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지방에 있는 가이사랴에 가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어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나 에언자 중 하나라고 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시니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3-17)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하셨습니다(마1613-18). 
  
예수를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변화산에 올라가 변형된 예수님을 봅니다. 얼굴이 해같이 빛난 모습으로 모세와 엘리야와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영안이 열린 것입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시니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보게 해 주셨습니다. 보게 하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눈이 열릴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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