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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의 회복과 열정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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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회복과 열정 (롬 12:1-2)


누구나 새해가 되면 어떤 기대, 어떤 각오를 가지게 마련입니다. 사업을 한다든지, 아니면 직장 생활 속에서도 자신이 가진 기대와 각오를 새롭게 하기 위해 새로운 결단을 합니다. 또 배우는 사람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게으름이나 권태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광진구 기독교 연합회에 조찬 기도회에서 구청장이 당신의 사무실로 몇몇 목사님들을 초대해서 광진구의 미래를 위해 조목조목 이야기를 하면 기도해 줄 것을 부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뭔가 올해 총선과 대선이 있는 소용돌이치는 한해에 남다른 각오를 가지고 구정을 돌아보겠다는 것입니다. 

뭐, 우리 교인들도 마친가지라 생각을 합니다. 좀더 바른 신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로 우리의 자세를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한다는 것 여기 계신 모든 성도들의 바램이 아니겠습니까? 인생의 방황은 예수를 만나면 끝이 나지만,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난다고 했습니다. 뭐, 틀인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좋은 교회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좋은 교회는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 각 사람이 좋은 신자가 되면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교회의 전제 조건은 우리 각 사람입니다. 우리 개개인이 주님이 칭찬하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면 절대 좋은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좋은 교회의 공식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한번 태어나 행복도 맛보고, 고생도 맛보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개인의 행복과 인생의 의미가 어떤 교회를 다니느냐에 의해 상당부분 좌우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정말 은혜를 받았느냐, 교회를 통해서 정말 삶의 의미를 발견했느냐, 교회를 통해서 정말 뒤돌아보아도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왕에 다닐 바에야 좋은 교회에 다녀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살았다는 이름은 있지만 죽은 송장과 같은 사데교회를 다니고 싶어하겠습니까? 누가 여러분 스스로 자만에 빠져서 아주 식어버린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그런 교회에 몸담고 싶어하겠어요? 평생 고생하면서, 그런 교회 누가 다니겠습니까? 이왕 다닐려면 빌라델비아나 서머나 교회처럼 주님이 칭찬하는 교회를 다니고 싶고 그런 교회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최선을 다해서 한번 헌신해보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요 심정이어야 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얼마나 좋은 교회냐는 우리가 몰라요, 주님이 평가하시겠지만 우리교회에 몸담고 있는 이상 우리 교회를 좋은 교회 만들어야 내가 삽니다. 이와 같은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교회에 다녀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는 좋은 교회를 만들어 드리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내가 주님이 원하는 좋은 교회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 교회는 회복과 열정으로 세상을 섬기는 공동체로 2012년도를 출발을 했습니다. 여러분도 늘 상 고백을 하지만, ‘복음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무엇보다 그 복음을 먼저 받은 나의 신앙의 모습이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가를 점검을 해야 합니다. 그 점검이 없이 한해를 살아가노라 하면 우리의 ?을 세상 앞에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고 맛을 잃어버린 소금처럼 아무런 영향력을 드러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그 무엇보다 가장 먼저 회복이 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예배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의 감격에 빠져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내 온 몸의 세포 마디 마디가 하나님의 말씀을 갈구하는 목마름에 빠져 보신 일이 있으신지요? 마침내 그 말씀으로 내 존재가 불꽃처럼 타오르는 전율을 경험해 본 일이 있으십니까? 마이크 메이슨(Mike Mason)은 ‘예배의 감격이 그런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예배를 드린 사람들은 예배의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못할 일이 없는 순종의 각오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다른 어떤 일의 성공보다 예배에 성공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우리의 자녀들에게 다른 어떤 유산을 남기기 보다 더 예배의 영광을 물려주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을 보십시오. 

지금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을 하면서 12장 1절을 통해서 예수 믿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배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향해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 여기 ‘몸’은 단지 육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 전체, 존재 전부를 말합니다. 

여기서, 자기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했는데 이 ‘산제사’라는 말과 ‘영적예배’라는 말은 같은 뜻입니다. 헬라어로 “예배”는 “라트레이아(latreia)”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단어의 뜻은 “~에 자기 생을 드리다.”, “~에 자기의 모든 것을 드린다.”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란 “하나님께 자기의 생을 드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드립니까? “산제사로” 영어로는 ‘living sacrifice’, 즉 자기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것이 예배입니다. 따라서 해보겠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자기의 생을 희생하는 마음으로 온전히 드리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세와 함께 했던 광야 40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한 게 아닙니다. 그들은 광야를 행군 하라 때 제일 중앙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셔둡니다. 그리고 동서남북 네 군데에 각각 세 지파씩 포진을 하고 전진을 합니다. 무엇을 상징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예배가 삶의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방향에서나 항상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고 항상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그러한 곳이 이스라엘 진영이었습니다. 언약궤가 출발하면 이스라엘도 출발합니다. 언약궤가 서면 이스라엘도 섭니다. 그리고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언약궤를 중심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생활의 중심도 예배였고, 가시적인 위치상의 중심도 하나님의 임재와 예배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떼에 예배가 우리의 삶과 모든 발걸음을 지켜 줍니다. 성도의 모든 삶은 예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행을 하다가도 주일이면 반드시 돌아와야 하고 모든 계획 중에서도 예배가 중심이 되어야합니다. 전직 미국 대통령인 지미 카터와 관련된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주일만 되면 워싱턴에서 죠지아주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서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반사 역할을 합니다. 그는 예배를 중심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지미 카터만 아니라 모든 성도의 모습니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배가 중심이 되지 못한 사람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휘청거리는 삶입니다. 누가 와서 등산가자고 하면 가고 놀러 가자고 하면 놀러갑나다, 작은 어려움이 있더라도 쉽게 예배를 포기합니다. 예배가 삶의 중심이 아니라 엑세서리입니다. 이러한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립니다. 

영적으로 살아있는 예배,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날마다 영혼이 시들어 갑니다. 다 죽어가는 화분의 꽃처럼 시들시들 거리며 옆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짜증날 정도의 모습이 됩니다. 살아있는 예배가 없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예배가 없는 교회에 가면, 도대체 예배를 드리는 것인지 장례식에 온건지... 구분 할 수 없을 지경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정말 이 예배가 회복이 되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무엇을 위해 최고의 준비를 해야 합니까? 예배입니다. 우리의 모든 힘. 모든 자원을 다 투입해서 가장 영광스러운 예배를 드릴 때 우리 영혼이 살아납니다. 얼굴에 생명감이 충만하고 비온 후에 싱싱한 화초같이 얼굴에 빛이 나기 시작합니다.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충만함이 있습니다. 그 속에 넘치는 기쁨이 있기 때문에 감출 수가 없어서 밖으로 감격이 흘러나옵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니라”는 말씀이 현실로 나타납니다. 말씀이 지퍼로 채워놓은 것처럼 닫혀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는 축제입니다. 예배한번 잘 드리고 나면 내 영혼 가운데 있던, 어두움의 그림자, 패배감이 사라지고 승리감이 충만하여 내 속에 있던 죽음의 세력들이 다 사라져 버리고 생명이 충만하게 부어집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 '권하노니' 란 이 말은 어떤 슬랭 영어에서는 '팔을 비틀어서라도' 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하기 게을러 하고 예배로부터 멀어져 있을 때에 팔을 붙들어서라도 다리를 묶어서라도 다리를 꺾어서라도 예배하는 자리에서 은혜 받는 자녀로 살아가기를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의 마음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만큼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우리와의 만남, 우리와의 관계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여기 '드린다' 라고 되어 있는데 ‘드린다’라는 말은 제사장이 제물을 드릴 때 사용하던 바로 그 단어였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는 꼭 제물을 가지고 나와 바쳐야만 했습니다. 제사 드릴 사람은 제사장에게 제물이 될 양이나 염소를 가지고 나옵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 제물을 죽여서 각을 뜨고 피를 뿌리며 제사를 드립니다. 이처럼 몸을 산제사로 드린다는 말은 진정한 예배는 희생이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 모든 것을 죽여서, 내 팔을 자르고 사지를 쪼개고 내장을 다 드러내놓고, 오직 이 몸뚱이마을 깨끗하게 정돈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제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자아의 죽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뜻, 내 의지, 내 자아, 내 욕망, 내 고집이 죽는 것입니다. 이게 예배입니다. 

어찌 그뿐이겠습니까? 구약시대 제사를 보면 예배자는 빈손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부자든 가난한 자든 예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예물이 적당한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제물을 드려야만 했습니다. 말라기에 보면 당시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아까우니까 눈가리고 아옹하는 식으로 적당히 제물을 들고 나오는데 자기도 쓰지 않는 것들, 눈먼 것, 병든 것, 저는 것들을 제물로 가지고 오는 이들이 있었는데 호된 질책을 들었습니다. (말1:8-9)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이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교회에 나와서 온전히 드리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말씀을 듣긴 들어도 자기 고집으로, 자기 색안경을 끼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말은 받을 만해. 이 말은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 말은 따를 수 있어. 이 말은 못 따르겠어.” 하면서 자신이 따를 수 있는 말씀과 따를 수 없는 말씀을 다 결정해버리는 사람은 예배자가 아니라 심판자입니다. 

2. 예배는 삶입니다. 본문 2절에 보십시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씀도 예배에 관한 말씀입니다.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라고 했습니다. 예배에서 받은 은혜대로 세상에서 열심히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 살아야 합니다. 정말 주일 날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면, 그 말씀을 붙잡고 나에게 주어진 세상을 향하여 예배자의 삶으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고, 누가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서 말씀을 되새겨가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초대 교회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그들이 했던 가장 큰 변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예배관이 새로워 진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120명의 성도는 한마디로 실패자들입니다. 예수를 따르던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의지하던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허무하게 죽자 얼마나 낙심을 했습니까? 그런 소망이 없던 그들에게 성령의 임재를 통해 엄청난 변화를 경험을 합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옛사람에 매여 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권력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에 대해 통회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자신들을 내려 놓으며 말씀 앞에 철저하게 순종하기를 갈망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적대시하고 괄시하는 삶의 현장에서 얼마나 멋있게 살았던지 나중에는 불신자들이 저들이 믿는 예수 나도 믿겠다고 주 앞으로 달려 나옵니다. 여러분, 기독교를 그렇게 핍박하던 로마가 AD313년에 기독교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자그만치 300여년 동안 교회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거의 씨가 말랐는줄 알았는데 거대한 로마가 복음 앞에 무너진 것입니다. 당시 놀라운 사실은 로마 안에 기독교 인구가 불과 2.7%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당시에 무서운 핍박과 고난 앞에서도 얼마나 아름답게 살았든지 콘스탄틴 황제마져 십자가 앞에 자신의 왕관을 내려놓고 예수를 영접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 초라한 사람들 밖에 없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세상의 거대한 세력을 주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드셨습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배자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핍박이 있고, 불이익을 당하고 심지어 생명을 빼앗기는 아픔과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대를 본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난은 그들의 마음에 그들의 영혼에 끼인 잡초 같은 세상의 안락, 세상의 소욕을 정화하는 또 하나의 축복이었습니다. 행2장을 보시면, 그들이 세상 앞에 흔들림 없이 살았던 이유를 잘 보여줍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보면 참 예배하는 공동체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42절을 보면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나옵니다. 요즘 말로 말하면 설교도 듣고, 훈련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었습니다. 떡을 뗀다는 말은 성만찬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습니다. 이 모두가 다 예배입니다. 이어서 46절을 보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좋아했습니다. 곧 성전에서 예배 드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성전에서 흩어졌을 때에도 가정으로 돌아가서 떡을 떼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따라서 그 공동체를 보면,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은 열정이 모든 성도들의 가슴에 불타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 밤낮으로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 거룩하신 보좌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싶은 마음이 순간순간 끓어올랐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도들의 모습은 예배하는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만큼 예배가 중요합니다. 위대한 영적 거인이라 할 수 있는 요한 웨슬레는 이런 찬송을 작사했습니다.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 입이 만 개라면 만 개의 입을 다 벌려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주님의 은총을 찬송하고 싶다고 노래합니다. 얼마나 그 마음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싶어 열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는 지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예배의 심정이 있는지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예배는 항상 할 수가 있습니다. 길을 가면서도, 자동차를 몰고 가면서도, 혼자 있을 때도 예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예배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일정한 시간을 정하여 일정한 내용과 틀을 가지고 예배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 중 하나로 주일 예배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일을 지키고, 주일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지난 2000년 동안 이 주일 예배를 통해서 기독교가 이어져왔고, 이 세상을 바꾸어 왔습니다. 예배에 오면 찬양과, 말씀, 기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성도의 교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예배 시간 동안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인해 실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얼마나 큰 은혜를 누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영혼이 기뻐 춤을 춥니다. 우리 영혼의 세포가 기뻐 춤을 춥니다. 우리가 제대로만 예배를 드리며 이러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해 계시는데 어떻게 은혜를 받지 못하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있는데, 그 영광 앞에 어떻게 춤을 추지 않겠습니까? 이런 놀라운 은혜가 분명히 이 자리에 있음을 우리 모두가 믿어야 됩니다. 

어떤 분이 예배의 감격을 대해 다음과 같은 예화를 들었습니다. 저처럼 어릴 때 바닷가에서 자란 사람은 바닷가가 주는 아름다움과 신비로운 추억들이 많습니다. 썰물 때가 되면 물이 다 빠집니다. 옛날만해도 바다 밑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물이 다 빠지면 물 밑에 있던 바닥이 다 드러납니다. 거기에는 별의별 것이 다 있습니다. 바다 조개, 고동, 해파리, 성게, 미역 등등. 그런데 요즘 바닷가는 너무나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썰물이 되어 물이 다 빠져나가면 고무신 짝이 돌아다니고, 나무 조각이 사방에 널려 있고, 죽은 성게, 중독되어 이상하게 죽은 물고기 등 지저분합니다. 그러다가 밀물이 들어옵니다. 처음에는 발목을 적시고, 점점 물이 많아지면서 무릎까지 차오릅니다. 나중에는 물이 해안가를 가득 채웁니다. 그러면 썰물 때 보았던 바다 밑에 있던 온통 더러운 것들이 싹없어집니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 바다는 풍요로운 물결과 파도소리로 우리에게 아름다운 멜로디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배라는 의식을 행함으로 밀물과도 같은 은혜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처음 예배에 나올 때만 해도 세상에서 고생하며 사느라고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마음 이곳 저곳에 구멍이 나 있을 정도로 상처도 많이 입고, 여러 가지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뒤집어쓰기도 하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 범한 죄로 영혼이 고약한 냄새를 피우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이런 저런 잡동사니를 마음에 안고 그대로 예배에 나옵니다. 대부분 예배드리러 나오면 "주님, 지난 한 주간 잘 살지 못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하고 회개하면서 가만히 앉아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썰물 때 물이 빠져 나간 후의 더러운 바닷가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를 시작하고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서 두 손을 들기 시작하면, 하늘로부터 밀물이 밀려옵니다. 그리고 은혜의 밀물이 우리 마음을 덮고는 그 안에 있는 잡동사니를 쓸어내 버립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상처를 싸매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을 열어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근심걱정이 조용히 물러갑니다. 우리는 주님을 찬양하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은혜가 예배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배자의 삶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예배의 성공은 인생의 성공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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