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막 2:1-12)

첨부 1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막 2:1-12)


1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복음에는 놀라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12절입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중풍으로 침상에 매어 지내던 인생을 고쳤을 때의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침을 시작하셨을 때 무리들의 반응은 “그의 교훈에 놀랐다”(1:22)는 것이었습니다. 그 가르침이 권세가 있었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셨을 때의 반응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1:27)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 일어날 때 나타나는 반응이 놀라움입니다. 상식은 복음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문둥병자와 중풍병자가 치유되는 기적만이 상식에 어긋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죄인들의 죄가 단번에 용서되었다는 것도 상식이 아닙니다. 미물에 불과한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도 상식과 맞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명령할 때 동일하게 기도가 응답되고 귀신들이 쫓겨난다는 것도 상식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신앙이 전적으로 이성과 과학, 상식과 도덕에 매인 것이었다면 구지 우리들에게 필요치 않았을 것입니다. 신앙은 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놀라움에 있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 우리가 준비하고 올 것은 다른 무엇보다 이 놀라움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어떤 말씀을 주실까? 오늘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실까 하는 기대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입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신기한 일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이, 오늘이 어제와 같을 것이라는 진부한 표정으로 예배에 임하는 것처럼 비신앙적인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입니다. 

사실 우리 앞에 놓인 풀 한 포기나, 날아가는 새 한 마리나, 스쳐지나 가는 사람들이나, 지는 저녁놀이나 다 우리가 놀라워해야 합니다. 아무 것도 그냥 이루어진 것도 없고 모두가 다 사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랜 벗이라도 오늘 만나면 그 또한 놀라운 일입니다. 간밤에 그 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기 때문이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놀라운 선물을 주셨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중에도 그 놀라움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한 중풍병자가 예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네 사람이 그를 침상에 들고 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모두가 다 다급한 사정들이 있기에 도무지 그 자리를 뚫고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돌아서야 하는가? 그들은 그 때 기발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지붕 위로 올라가서 지붕을 뚫고 그 중풍병자를 달아 내리기로 한 것입니다. 팔레스틴의 집들은 지붕을 우리처럼 견고하게 덮지 않습니다. 쉽게 해체할 수가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집 안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위쪽에서 먼지가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더니 하늘이 열리며 빛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더니 침상이 대롱대롱 매달린 채 내려오는데 그 안에는 한 중풍병자가 뉘어 있었습니다. 

이때 가장 당혹스러워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아마 그 집주인이었을 것입니다. 이 집은 아마도 베드로의 집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다고 말씀에 나와 있고 이미 1장에서 베드로의 집에서 사역을 했던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착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자기 집이 무너지는 손해를 감수해야 했으니까요? 하나님의 역사는 이처럼 자신의 것을 희생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시선과 중풍병자의 시선이 마주쳤습니다. 중풍병자는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있습니다. 참으로 희한한 만남입니다. 성경에서는 희한한 만남이 또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과 삭개오의 만남입니다. 삭개오 또한 예수님을 만나러 왔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기도 했지만 그는 세리장이었기에 민족반역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여러모로 사람들을 뚫고 가기에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삭개오가 취한 방법은 뽕나무 위에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칠 예정인 길가의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다 큰 어른이 뽕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습니다. 예수님과 그렇게 삭개오는 만나게 되었고 삭개오는 구원 받은 부자,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중풍병자나 삭개오를 보면서 우리가 배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황을 돌파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 방해거리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막는 핑계거리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는 돌아설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때일수록 더 간절히 매달려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간절함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기도에 응답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정말 그것을 원하는지 테스트해 보시기 위함입니다. 외면하심으로 우리로 애달도록 만드시고 그래서 그 소원이 더 간절해지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해서 주어진 응답만이 진정한 감사요 소중한 선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은 고치고차 하는 소원이 강렬했습니다. 소원이 강렬하면 길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중풍병자와 친구들은 지붕을 뚫고 가는 길이 보였고, 삭개오는 뽕나무가 보였습니다. 우리의 소원이나 꿈이 강렬하다면 반드시 길은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좌절하지 마십시오. 벽이 아닙니다. 부지런히 찾다보면 문이 보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5절에서 “저희의 믿음을 보셨다”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행동화된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묵상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부지런히 행동하고 찾는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 그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받을 교훈이 하나 더 있습니다. 협력의 중요성입니다. 중풍병자는 사지를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는 침상에 매여 꼼짝할 수 없습니다. 그런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데려온 네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이 없었다면 중풍병자는 놀라운 기적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중보기도의 위력을 잘 설명하고 있는 예화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함께 기도하고 누군가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이루어집니다. 바울은 대단한 능력의 사도이지만 그의 서신에서 부지런히 중보기도를 요청했습니다.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6:19)

제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에 대해서 잠깐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대학교 1학년 때 한 선배의 권유를 받고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 선배의 권유가 결정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렇지 않아도 성경 말씀을 읽고 싶었습니다. 산상수훈 말씀을 참 좋아했는데 교회 가자고 하니 말씀 읽으러 따라나섰던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제 발로 가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를 위해 군대 3년 동안 중보기도 했던 분이 있었습니다. 이분이 군대에 가면서 저를 위해 기도하기로 작정하고 들어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중보기도하고, 다른 사람은 우리를 위해서 중보 기도하며 서로 협력하여 응답받는 놀라운 은혜를 받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위해서 중보기도 하고 있습니까? 기도라는 것이 자기만을 위해서 기도하면 힘도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응답도 더딥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주십니다. 이것이 중보기도의 위력입니다. 새해는 중보기도를 많이 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송구영신 예배 때 말씀 뽑기를 하였습니다. 저와 집사람이 말씀 뽑기에 필요한 성경 구절들을 선택했는데 의견이 맞지 않았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역대하 7장 4절 말씀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이 말씀이 고민되었던 이유는 “그 악한 길에서 떠나”라는 구절 때문이었습니다. 행여 이 말씀을 뽑은 사람이 자기 죄를 책망하는 것으로 마음이 불편해할까 봐서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말씀, 축복의 말씀만 좋아하지 이런 말씀들은 싫어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저는 집사람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 말씀을 꼭 집어넣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이유는 개인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을 위한 중보기도의 사람이 되라는 뜻에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우리 집사람이 뽑았습니다. 집사람이 “거봐 싫다고 했잖아!” 하며 처음에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요즘은 그 말씀을 좋아하며 더욱 더 중보기도에 열심 합니다. 교회는 민족을 위한 중보기도의 사명이 있습니다. 올해는 선거도 있고, 남북관계도 어떻게 될지 아슬아슬합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정의나 사랑이나 평화가 없이 내부 갈등이 심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탐욕과 이기심이라는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한국교회 또한 도덕성이 엉망이고 영적으로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올해는 무엇보다 민족을 위한 중보기도가 더욱 간절한 시점입니다.

또 이런 협력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감사를 배웁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나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누가 우리를 도왔고 보이지 않는 시스템과, 또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를 알고 갚으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가장 부족한 게 이런 감사의식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 힘으로 된 줄 압니다. 그래서 인색합니다.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희생과 도움으로 우리는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것을 내어 놓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부자가 세금을 더 내고, 또 많이 배운 사람이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를 희생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배운 자들이 더 이기적일 때 그러면 그 사회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교회도 민족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면 그 은혜를 사회에 환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중풍병자가 나음을 입고 난 뒤 네 명의 친구들의 은혜도 모르고 하나님의 은혜도 모르고 베드로의 집이 부서지는 희생이 있었던 것도 모르고 내 힘으로 일어섰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가라

주님은 중풍병자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11절입니다.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는 즉시 중풍병자가 벌떡 일어나 자기 침상을 들고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갑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조금도 꼼짝 못하여 늘 침상에 매여 지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좀 이상합니다. 왜 그냥 일어나 걸어가라 하면 될 것을 네 상을 가지고 가라 하셨을까요? 요한복음에 보면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있던 38년 된 중풍병자를 향하여서도 주님은 동일한 명령을 내린 바 있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5:8). 여기 자리나 상은 같은 단어인 ‘크라바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크라바톤은 접고 펴고 할 수 있는 지푸라기 담요 같은 상입니다.

이 침상이나 자리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38년 된 중풍병자는 38년 동안 그 자리에 매여 살았습니다. 그 자리를 벗어나서는 한 치의 땅도 밟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옮겨갈 때는 그 자리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 상에는 이 중풍병자의 눈물과 한숨이 배어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빌어먹다 흘린 음식 자국들도 남아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상을 들고 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네가 지금껏 상에 매여 살았지만 이제는 그 상을 들고 부리는 존재로 살아가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다른 식으로 한다면 지금껏 우리 인생이 운명에 매여 사는 수동적 존재였다면 이제는 그 운명을 짊어지고 사는 능동적인 존재가 되라는 뜻입니다.

복음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를 꼼짝달싹 못하게 했던 침상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운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성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진저리나게 떨쳐 버리고 싶은 것들입니다. 복음은 바로 그 운명의 침상을 들고 가게 만듭니다. 복음은 우리 운명을 바꿉니다. 운명을 바라보는 우리 태도가 바뀌는 순간은 곧 운명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전에는 눈물 흘리게 만들었던 곳이 기쁨으로 바뀝니다. 불안의 현장이 찬양의 현장으로, 불평의 현장이 감사의 현장으로, 근심의 현장이 기도의 현장으로 바뀝니다. 무기력과 패배의 현장이 능력과 승리의 현장으로 바뀝니다.

죄사함의 권세

중풍병자는 자신의 병에서 치유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또 다른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죄 사함의 은혜입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에서 앞에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 5절입니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원래는 9절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로 끝냈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 것을 알게 하십니다. 

첫째 주님은 우리가 단순히 육신의 병만 고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육신의 병은 언젠가는 다른 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는 죽음에도 이르겠지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바로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하신 이유입니다. 이는 단순히 중풍의 원인이 죄이기 때문에 그 병의 근원을 치료하신 사건이 아닙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파괴된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주님은 이 죄를 사하심으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죄 사함이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 양심의 짐을 가볍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관계의 회복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죄의 문제 해결입니다. 주님께서 육신의 병을 고치신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것의 가시적 증거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때로 우리가 육신의 병을 얻거나 고난을 당하여 그를 계기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병이 아니라 축복이라 할 것입니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죄 사함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둘째는 10절의 말씀대로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주님 편에서는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이 더 쉽고 편합니다. 왜냐하면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벌써 수많은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서기관들이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2:7)며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새로운 교훈을 주시길 원했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단순히 병만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할 때 이미 천사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예수님이 땅에 오신 이유는 어떤 좋은 교훈이나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병을 고치시시 위해서 오신 기적의 신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오셨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골고다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값없이 죄 사함의 은총이 주어집니다. 진짜 예수님은 갈릴리나 예루살렘에 있지 않습니다. 골고다에 있습니다. 선한 도덕에서 예수를 구하지 마십시오. 기적이나 축복에서 예수를 구하지 마십시오. 진짜 예수님은 피 흘리는 십자가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주님은 이 죄 사함의 권세를 이제 사람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10절에서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그렇지만 이 용어는 다른 식으로도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곧 죄 사함의 권세가 이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도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죄 사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선포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믿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8장 18절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땅에서 매고 푼다는 것은 땅에서 믿는 자들이 행하는 결정을 말합니다. 그 중요한 결정 중에 죄에 대한 용서나 심판이 들어갑니다. 이는 요한복음 20장 23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 사함의 권세는 이제 교회 위에 주어졌습니다. 개혁교회는 만인사제설을 주장합니다. 사제들만이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모든 자들이 사제가 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개인주의를 의미하는 바는 아닙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언급한 천국의 열쇠는 베드로 개인이 아니라 제자들의 대표격인 베드로라는 인격과 그 신앙고백 위에 주어졌습니다. 18장의 “땅에서 매고 푸는 것”과 관련된 말씀 다음에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18:19)는 말씀이 있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요한복음 20장에서는 죄 사함의 권세가 개인이 아니라 “너희”라는 복수에게 주어진 것에 주의하십시오.

죄 사함의 문제는 단순히 한 개인이 골방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개신교가 약한 부분이 바로 여기입니다. 너무 하나님과 일대일만 강해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가톨릭처럼 특정한 사제에게 이런 일을 맡겨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라는 공동체에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서로 위하여 기도하며 용서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모든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지만 주님은 그것이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하여 이루어지도록 권위를 주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영광스럽고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이런 놀라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배 시간에 우리가 참회의 기도를 드리고 용서의 선언을 합니다. 이것은 요식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사죄의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받은 여러분 자유함과 기쁨 가운데 거하시길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