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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물을 씻겨주시는 하나님 (계 7: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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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씻겨주시는 하나님 (계 7:13-17)
  

< 본향을 사모하십시오 >   

저는 1987년 큰 꿈을 품고 미국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때 뉴욕 근교의 얼라이언스(Alliance) 신학교에 다니면서 주말에는 뉴욕 시내에 있는 한인교회의 전도사로 사역했습니다. 그때 섬기던 교회 인근에 라과디아 공항이 있어서 수시로 비행기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비행기를 보면 너무 한국에 가고 싶어서 자주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저 비행기를 타면 16시간이면 한국에 가는데...”   

그때는 너무 한국이 그리웠습니다. 싱글로 유학했고 돈도 직접 벌어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댔기에 돈이 없어서 한국에 올 생각은 전혀 못했고 부모님도 뉴욕 반대편의 LA로 이민을 떠난 상태였기에 한국에 가도 머물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향수는 더 짙어졌습니다. 현실이 힘들고 외로우면 고향이 그리워집니다. 왜 살면서 외로움이 필요합니까? 그때 하나님을 찾게 되고 기도를 찾게 되고 본향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19세기 런던의 로드차일드 맨션(Rothschild Mansion)을 지나는 사람들은 그 건물 처마 끝에 나온 쇠사슬 장식이 미완성인 것을 보며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왜 대 부호의 집에 저렇게 미완성된 부분이 있을까?”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로드차일드는 정통 유태인이었는데 정통 유태인의 집에는 이런 말이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미완성된 부분을 남겨두라. 그래서 아브라함처럼 당신은 세상에 잠시 들렀다 가는 순례자임을 증거하라.”

성도는 순례자로서 본향인 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 땅은 영원한 처소가 아닙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행장을 가볍게 하고 언제라도 돌아갈 준비를 하십시오.

  

호머의 <오딧세이>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어느 날 오딧세이 일행은 풍랑에 떠밀려 한 곳에 상륙했습니다. 그때 원주민들이 오딧세이의 부하들에게 '로토스'를 주었는데 그 달콤한 로토스를 먹으면 귀향을 잊어버리고 그곳에 머물고 싶어 했습니다. 그때 오딧세이는 부하들을 배로 끌고 가 배 안에 묶고 지체 없이 그곳을 떠났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로토스의 단맛에 취해 본향을 잊고 있습니다. 그런 단맛을 과감히 버리고 약속된 땅을 향해야 더욱 복된 길이 열릴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서 순례자처럼 살려면 외로움을 각오해야 합니다. 고난 중에는 외로움이 더욱 커집니다. 예수님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외로움을 표하셨습니다(마8:20). 그러나 외로우면 자기의 실체를 조금 더 알게 되는 은혜도 있습니다. 결국 외로움은 자신을 자신 되게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외로움도 필요하고 그때 하나님은 그와 더 함께 하십니다. 

밤에 별을 하나씩 보면 외롭게 보입니다. 그러나 별자리 전체로 보면 외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는 외로운 별들이 모인 별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혼자인 것 같아도 혼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세상의 빛이 되고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 주십시오. 샛별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어둔 세상에 빛을 비추면 장래에 ‘영혼의 별자리’인 찬란한 천국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마지막 유언 설교에서 가장 먼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예수님은 지금 우리를 위해 천국에서 처소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나중에 그 처소를 보면 그 찬란함에 깜짝 놀랄 것입니다.  

그처럼 천국은 찬란한 곳이지만 천국이 더욱 좋은 이유는 찬란한 환경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천국에 가고 싶지만 천국에 가는 때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세상에 사는 동안에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우리의 인내와 수고와 헌신, 그리고 선교사역을 지원하기 위해 보여주었던 세심한 마음씀씀이는 결코 헛되지 않고 나중에 찬란한 천국 보상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 천국 찬양대원을 꿈꾸십시오 >  

요한계시록 6장부터는 말세의 비밀이 담긴 일곱 인을 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환난이 시작되는데 여섯째 인을 뗄 때 극심한 재앙 중에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칩니다(계 7:3). 그때 인 맞은 자의 수가 이스라엘의 각 지파별로 12000명씩 총 144000명이었습니다(계 7:4-8). 그 다음에 천국 환상이 보이면서 천국에서 구원받은 수많은 무리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구원의 은총을 찬송하자 모든 천사들도 화답하며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계 7:9-12).   

그 천국 찬송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마치 대입 합격자 발표에서 “야! 내 이름도 있네! 저 사람 이름도 있네!”라고 기뻐하듯이 구원받은 성도들도 천국에서 서로를 보며 “어! 저 사람도 있네! 당신도 여기 왔군요!”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때 천국에서는 나쁜 기억은 다 사라지고 좋은 기억은 극대화되어 한번 만났던 것까지 다 기억될 것입니다. “성도님! 옛날에 분당 샛별교회에서 같이 예배드린 적이 있었지요? 반갑습니다.”  

무엇보다 천국의 가장 큰 기쁨은 그리운 얼굴들을 만나는 기쁨입니다. 그때 그리운 얼굴들을 만나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것 이상의 반가운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기쁜 마음으로 흰 가운을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소리 높여 찬양할 것입니다. 그런 천국 찬양대원의 꿈을 가지십시오.   

그렇게 찬양할 때 보좌 옆에 있던 장로 하나가 요한에게 말했습니다. 본문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고 구원의 은혜를 강조하려는 질문으로 생각하고 사도 요한은 말했습니다. “내 주여! 당신이 아실 것입니다.”  

그때 그 장로가 말했습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이 구절에서 ‘어린양’은 예수님을 뜻합니다. 즉 구원받는 천국 백성이 되려면 예수님의 피로 그 죄가 씻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처럼 천국 백성이 되려면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부인하면 어떤 경우에도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예수님을 영접했으니까 빨리 천국에 가고 싶다고 자살합니다. 그러면 천국에 갈까요? 절대로 가지 못합니다. 자살은 예수님을 전면 부인하는 행위입니다. 누군들 일찍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빨리 뵙고 싶지 않겠습니까? 삶이 힘들면 더욱 그 생각이 납니다. 그러나 자살하면 하나님이 모든 생명의 주관자임을 부인하고 자신이 생명의 주관자임을 자살로 단정적으로 나타낸 것이기에 그는 결코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자살은 자신이 생명의 최종 주관자요 결정자란 뜻을 내포한 행동이기에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교만한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들어도 자살이란 극단적인 수단으로 자기 생명을 끝내는 교만은 없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살하면 영원한 불지옥에 간다니까 자살 대신에 서서히 자기를 침몰시킵니다. 그래서 독주를 마시고, 마약을 하고, 줄담배 등을 합니다. 그것도 또 다른 교만입니다. 아무리 천국에 일찍 가고 싶어도 성도는 이 땅에서 최선을 다해 살면서 하나님이 부르시는 때에 천국에 가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천국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3절에서 자신은 이 땅을 떠나 그리스도와 있고 싶은 강한 소망이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명 때문에 죽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의 제일 목적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었고, 둘째 목적은 사랑하는 성도를 위해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열심히 살다가 하나님이 부르실 때 천국에 가서 그때부터 천국의 기쁨을 만끽하며 영원히 사는 소망을 가지십시오. 
  

< 천국에 대한 7가지 정의 >  

천국에 가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요? 본문 15-17절 말씀을 보면 천국이 어떤 곳인지 몇 가지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1. 하나님과 함께 있는 곳  

본문 15절 말씀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란 말씀이 나옵니다. 천국은 달리 천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가 있기 때문에 천국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최고의 낙원을 만들어도 그곳에 하나님의 보좌가 없으면 그곳은 천국이 아닙니다. 반대로 해골 골짜기라도 그곳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면 그곳은 천국입니다. 찬송가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처럼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있다면 그때 천국 삶이 펼쳐집니다.   

2. 밤낮 하나님을 섬기는 곳  

계속해서 본문 15절 말씀을 보면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란 말씀이 나옵니다. 천국은 아무 일도 없이 낮잠만 자는 곳이 아닙니다. 일이 없는 것은 지옥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도 일이 있습니다. 어떤 일일까요?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도 천국의 삶이지만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도 천국의 삶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소리 없이 봉사하는 삶은 이 땅에서 천국 삶을 위한 가장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3. 하나님의 절대보호가 있는 곳  

본문 15절의 마지막 부분 말씀을 보면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란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구원받은 백성들을 온전히 보호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안심이 되는 말씀입니까?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인을 맞은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를 세상 끝 날까지 보호해주실 것입니다. 이제 안심하십시오. 최악의 상황이라도 죽기밖에 더하겠습니까? 그러나 진실한 성도에게는 죽음도 최상의 축복입니다.  

4. 배고픔과 목마름이 없는 곳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천국에서는 더 이상 배고픔과 목마름이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목마르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돈입니다. 물론 돈의 추구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선한 일을 하려고 돈을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돈에 목매달고 살면 그때부터 삶은 지옥이 됩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돈을 벌면서도 하나님의 일과 좋은 일에 과감히 드리십시오. 그때 천국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5. 상처와 아픔이 없는 곳  

계속해서 16절 말씀을 보면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란 말씀이 나옵니다. 이 땅에서 사람을 상하게 하는 해나 뜨거운 기운은 무엇일까요? 이 땅에서 사람을 가장 상하게 하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시기, 질투, 오해, 외로움, 그리고 서러움과 섭섭함 등입니다. 그런 문제들은 인간 사회에서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산다는 것은 결국 상처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더 이상 그런 상처가 없습니다. 

6. 주님의 선한 인도가 있는 곳

본문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주님의 선한 인도를 받으며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살면서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이 일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 하나님은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그처럼 하나님의 선한 인도를 확신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천국 삶을 살 수 있습니다.   

7. 하나님이 눈물을 씻어 주는 곳  

계속해서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천국에도 눈물이 있습니다. 그러데 그 눈물은 슬픔의 눈물은 아니라 기쁨의 눈물이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흘리는 감격의 눈물입니다. 그런 기쁨과 감격의 눈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탈무드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천국 문이 기도에 대해서는 닫혀 있을 수 있어도 눈물에 대해서는 열려 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인간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을 찾아오라고 분부했습니다. 얼마 후 첫째 천사가 다이아몬드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이 시큰둥하게 반응하셨습니다. 곧 이어서 둘째 천사가 여성의 미(美)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성의 미에도 별로 흥미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셋째 천사가 죄인이 참회할 때 흘린 눈물을 담은 그릇을 가져왔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네가 정말 귀한 것을 가져왔도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이 땅에 있을 때 죄도 많고 잘못한 일도 많은 우리 같은 죄인이 천국에 간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격적인 사실입니까? 그런 감격이 천국에 들어설 때는 더욱 생생하게 피부로 느껴지면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니까 하나님이 친히 그 눈물을 씻어주실 것입니다. 그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무엇과 비기겠습니까? 그 천국의 때를 소망하며 이 땅에서 열심히 사명을 따라 사십시오.
  

< 천국 소망으로 사십시오 >  

살다 보면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합니다. 그때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은 상태에서 죽었다면 슬픔 중에서도 슬픔을 이겨내게 하는 신비한 평안이 마음속에서 생겨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곧 다시 만난다는 희망 때문입니다. 그처럼 천국 소망이 확실하면 극한 슬픔과 죽음도 비교적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 소망이 없으면 극한 슬픔을 당하고 죽는 날을 당할 때 얼마나 비참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1980년 3월, 프랑스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 한 세기를 풍미한 한 지성인이 폐수종으로 입원했습니다. 그는 한 달 동안 문병 온 사람들에게 고통스런 표정을 하며 미친 듯이 고함을 쳤습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 자기 병명이 무엇인지 곁에 선 아내에게도 묻지 못했습니다. 그가 바로 ‘자유’란 주제로 수많은 글을 쓰고 “죽는 문제에서도 자유를 찾으라!”고 외친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입니다.  

결국 그는 1980년 4월 16일 입원한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프랑스 신문들이 썼습니다. “왜 사르트르가 그렇게 수치스럽게 죽었는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 외쳤던 그의 말로가 왜 이렇게 비참했을까?” 그리고 신문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임종 때 이렇게 탄식했다고 합니다. “내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구나!”  

성도에게 가장 큰 위로의 말은 무엇입니까?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길은 나그네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가끔 소외되는 일을 당해도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성도는 천국에서 발행된 여권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사는 것이기에 이 땅에서는 소외될 수 있고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본향에 가면 눈물을 씻겨주시는 예수님의 손길을 대하면서 누구보다 큰 기쁨과 위로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옛날에 미국 LA에 갔을 때 아버님이 신학교 졸업 선물로 사준 카메라로 열심히 근처의 좋은 장면과 신기한 장면을 찍었습니다. 한번은 밤에 인적이 드문 주유소에서 여자가 남자들에게 호객행위를 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동차 창문을 열고 눈치도 없이 그 장면을 찍는데 밤에 찍으니까 플래시가 팍 터졌습니다. 

바로 이어서 2명의 흑인 남자가 다가와 제 차를 막았습니다. 그리고 차 문을 열고 카메라 필름 전체를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때 말리부 해변에서 찍은 환상적인 석양 노을 장면을 비롯해서 여러 좋은 장면들을 많이 찍어서 못 내놓겠다고 했습니다. 또한 옛날에 권투를 한 가락이 있어서 전혀 겁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한 흑인이 슬쩍 권총을 꺼냈습니다. 그 순간 즉시 “오케이!”라고 하면서 필름을 넘겨주었습니다. 그때 “아직도 총기가 없는 내 모국이 천국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외국에 가면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천국 시민권자에게는 이 땅이 외국이나 마찬가지이기에 살면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도 “오케이!” 하고 가진 것을 넉넉한 마음으로 양보해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더욱 소중한 것으로 반드시 보상해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왜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까? 본향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의 것을 과감히 양보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오늘날의 재벌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는 본향을 바라보며 양보하며 살았지만 그럴수록 하나님은 신기하게 더 채워주셨습니다. 성경은 재벌이 되는 것을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재벌이 되어도 아브라함처럼 되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메시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줄 알고 재물을 쌓고 욕망을 따라 살다가 허무하게 죽지만 아브라함은 재벌이면서도 본향을 사모하며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죽었습니다(히 11:11-16). 그처럼 그에게는 항상 더 나은 본향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있었기에 결국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삶은 타향살이입니다. 성도는 과거에 살던 정든 고향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과거는 이미 배설물처럼 버렸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고향은 미래에 있습니다. 그 본향을 소망하면서 이 땅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처럼 홀가분하게 사십시오. 그처럼 타향살이를 하기에 때로는 세상으로부터 소외를 당하고 고난을 겪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처럼 더 나은 천국 본향을 사모하며 씩씩하고 당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그래서 천국에 갔을 때 눈물을 씻겨주시는 하나님을 기쁨으로 만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십시오.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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