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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과부의 믿음 (눅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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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의 믿음 (눅 18:1-8)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눅18; 1-8)   

오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누가 18;1-8절 말씀으로 ‘과부의 믿음’ 이러한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겠습니다. 이 말씀이 선포될 때 우리가 우리의 믿음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전에 제가 시장을 지나다가 쌀집 평상에 묶여 있는 고양이를 본적이 있습니다. 그 고양이가 쥐를 잡아 가지고 놀고 있었습니다. 마치 공을 가지고 놀 듯이 쥐를 허공에 던졌다 받았다 하다가 땅에 던져놓았다가 쥐가 꼼지락거리면 또 허공에 던지며 가지고 놉니다. 그때 쥐를 보니  눈도 제대로 못뜨고 온몸이 땀에 절어있습니다. 완전히 정신적으로 제압을 당해 꼼짝도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 이래서 천적(天敵)이라고 하는구나’하고 느꼈습니다. 고양이 앞에 쥐가 이런데 하물며 호랑이 앞에서는 어떻겠습니까? 모든 짐승이 혼이 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예외가 있습니다. 사냥개들입니다. 사냥개들이라고 해도 개인데.. 개가 호랑이를 보면 기가 죽기는 커녕 자신만만하게 호랑이에게 달려든다고 합니다. 그때 오히려 호랑이가 겁을 먹고 나무위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본래 호랑이는 나무를 탈줄 모르는데 하도 급하니까 나무까지 탄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사냥개가 겁도 없이 호랑이에게 덤비는 이유를 ‘사냥개의 머리에 새겨진 자아상(自我像)’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냥개의 머릿속에는 과거에도 자기보다 훨씬 더 강한 맹수에게 달려들었는데 주인이 총으로 쏴 죽이는 것을 계속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호랑이가 앞에 있어도 주인이 자신을 책임진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달려든다는 것입니다.  주인에 대한 절대 신뢰가 사냥개들에게 호랑이에게 덤벼드는 그런 강력한 힘을 준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도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확신하고 신뢰한다면 세상이 무서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담대하게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살지 않겠습니까? 우울증이니 스트레스니 하는 것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할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도시의 길거리에 나가면 볼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은 길에서 자동차만을 봅니다. 그 사람의 눈에는 자동차만 보입니다. 자기 차도 아닌데 감탄을 하면서 기뻐합니다. 옷을 좋아하는 사람의 눈에는 옷만 보이고, 신발을 사러 나온 사람의 눈에는 신발만 보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보면서 기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보시길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좋아하시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을 찾아다니십니다.  믿음 있는 사람을 보시고 예수님은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며 감탄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8절). 라고 하십니다. 믿음을 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찾으시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지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믿음을 보여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찾으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본문의 비유를 통해 당신이 찾으시는 믿음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해 주신 이야기는 ‘한 과부’ 즉 홀로 된 여인에 대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 홀로 된 여인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심하고, 지독한 경우를 당했길래 ‘원한(怨恨)’ 맺혔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이 여인에게 원수(怨讐)라고 합니다.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이 말속에 담긴 여인의 깊은 한(恨)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법치국가이고, 또 인터넷이나 여러 가지 사회고발 프로그램도 있어서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래도 억울한 일이 아주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홀로 된 여인은 원한을 풀 방법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억울한 일을 당한 이 여인은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거나 낙망에 빠져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의 재판관에게 찾아가 억울한 사정을 말하고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라고 간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이 보여주는 행동을 ‘믿음’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 여인이 재판관에게 찾아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라고 간청했는데,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인가? 라는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재판장을 끝까지 찾아가는 마음을 보라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첫째로, 우리 가슴에 간절한 소원을 품는 것입니다.  그리고 ① 가슴에 간절한 소원을 품고 이루어주실 때까지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여인은 간절한 소원을 가슴에 품고 재판관에게 나아갔습니다. 그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그런 아주 거만하고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부패하고 나쁜 사람이 재판관의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이 여인을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여인은 그런 부패하고 나쁜 재판관에게 끝까지, 들어 줄때까지 찾아갑니다. 이렇게 끝까지 찾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가슴에 절실한 소원을 품고 응답받을 때까지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성도여러분, 믿음은 그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홀로 된 여인이 자신의 원수에 대한 원한을 꼭 갚아야겠다는 절실한 소원을 가슴에 품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재판관에게 나아갔듯이, 그래서 재판장이 질려서 그 원한을 풀어주듯이, 믿음은 절실한 소원을 가슴에 품고 해결 될 때까지 하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본문의 주인공인 홀로 된 여인은 원한을 해결할 힘이나 능력이 없습니다. 또한 이 여인은 자신을 도와 문제를 해결해 줄 가족이나 친지도 없습니다. 어쩌면 글도 잘 모르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간절한 소원을 가슴에 품고 재판관에게 나가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찾고 계시는 믿음이 이런 믿음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소원을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무시당했습니다. 재판관은 말 그대로 불의한 사람이어서, 돈 없고 힘없는 그 여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 또한 이런 재판관을 무시했습니다.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계속 찾아가고 계속 애원합니다. 결국 불의한 재판관이 자기 마음을 바꾸고 그 여인의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이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의 두 번째 특징은  ②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끈질기게 간청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마음입니다.  이 여인이 왜 이렇게 끈질기게 재판관에게 나갔을까요? 그것은 그만큼 마음속의 원한이 커서 그렇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재판관이 들어줄 것이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끝까지 기도하지 않을까요? 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해 보다가 안 된다고 그만둘까요? 하나님이 반드시 내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응답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떼쓰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매달리는 믿음을 예수님은 찾으십니다.  

성도여러분, 정말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떼를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믿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 떼를 쓰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믿지만 어느 정도 믿는 사람도 하나님께 떼를 쓰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떼를 쓸 만큼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확신하고 추호의 의심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실 때까지 떼를 씁니다.  자녀들이 아빠, 엄마에게 떼를 씁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울고 고집을 부립니다. 왜 그런지 아시죠? ‘울면 들어준다. 땅에 누워 딩굴면 저것은 내꺼다’ 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때를 쓰는 자녀가 싫으십니까? 만약에 자녀가 한 두 번 말하고 ‘알았어요. 사달라고 안 할께요.’ 한다면 그 아이는 입양아입니다.  입양아는 눈치를 봅니다. 이쁜 짓만 하려고 노력합니다. 반면에 싸가지를 밥 말아먹은 사람은 친자식입니다. 추운데서 고생하는 부모입장 생각 안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싸가지를 밥 말아먹은 행동은 부모에 대한 확신에서 오는 것입니다. 비록 행동은 잘못되었지만 속마음은 ‘무조건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말을 들어주는 부모’ 라는 생각이 가득합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떼를 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하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우리도 떼를 쓰며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떼를 쓰며 간청하는 믿음을 찾으시며, ‘하늘 아버지께서는 반드시 내 기도를 들어 주실거야’ 라는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기도하는 마음을 믿음이라고 하십니다.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께 마음 놓고 떼를 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과정’(過程)이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과정이라는 시간을 통과케 하신 뒤에 하나님의 응답을 우리 가운데 나타내어 주십니다. 과정(過程)은 아직 기대하는 결과가 일어날 조짐도 보이지 않는 시간입니다.  과정이란 물을 가열할 때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는 그 시간입니다.  ‘정말 물이 수증기로 변 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일어나는 불확실하고 지루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과정의 시간은 인내가 필요한 시간, 기다려야하는 답답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물이 수증기로 변화는 임계점에 도달하면 우리는 물의 질적인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임계점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질적인 변화의 움직임을 감지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변화를 볼 수 없다고 중도에 포기하면 우리는 물이 수증기로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물이 수증기로 변하는 질적인 변화를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임계점에 도달하는 가열의 과정을 반드시 기다려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과정의 시간을 생략하고 결과를 볼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마술의 하나님의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과정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귀한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너를 창대케 하겠다”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그 일을 이루시지 않았습니다.  큰 민족은커녕 한 아들 이삭을 주시는데 25년이라는 과정의 시간을 보내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약속을 받아 100세에 이삭 한 아들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25년이라는 과정의 시간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의 말씀을 보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이 ‘때가 차매’ 라는 말씀을 의미 있게 해석을 많이 합니다. 제가 신대원 일학년 때, ‘한국교회사(韓國敎會史)’ 첫 시간에 이 ‘때가 차매’ 라는 한 구절을 가지고 교수님과 전체 학생들이 의견을 나누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때가 찰 때까지는 그 이전의 시간을 놀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시간까지 하나님이 그저 가만히 그 시간을 기다리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해 준비 과정의 시간을 열심히 진행하셔서, 과정의 시간을 다 감당해내셨습니다. 그 과정의 시간을 다 감당하여 드디어 인간 구원을 완성할 시간이 되었다는 의미로 ‘때가 차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인간 구원을 위한 모든 것이 준비가 되어,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인간 구원의 사역을 완성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과정의 시간을 중요시 여기시고 이 과정의 시간을 통해 일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과정의 시간을 통해  축복이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사람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과정의 시간을 믿음으로 감당해 내는 사람입니다. 과정의 시간은 반드시 우리가 통과해야 하는 시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과정의 시간은 화려하거나 그럴듯하게 보이는 시간이 아닙니다. 과정의 시간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간입니다. 경제상태도 좋지 않고 가지고 있는 능력도 없이 부족한 것뿐인데, 또 스스로 열심히 애쓰고 노력하는데 아직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 시간입니다. ‘헛수고, 헛고생인가? 해봐야 소용없는 것인가? 지금이라도 그만둬야 하나? 끝까지 한다고 해도 좋은 결과가 오기는 올까’ 의심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러한 과정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과정의 시간에는 우리를 낙망케 하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포기하고픈 일들이 수없이 일어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들은 과정의 시간에 포기하기를 거부하고 앞으로 계속 나가야 합니다.  본문의 여인은 남편 없이 혼자서 가족을 부양하며 살았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그녀는 재판에 승소할 가능성이 없는 자신의 일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소연했습니다. 처음에 이 여인의 하소연을 무시했던 재판관은 이 여인이 낙심치 않고 포기하기를 거부하며, 끈질기게 찾아오자 마침내 자기의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이 재판관이 얼마 만에 자기의 생각을 바꾸었을까요?  이 여인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찾아갔다고 합시다. 일주일 만에? 한 달 만에? 아니면 일 년 만에 들어주었을까요? 성도여러분, 일 년 만에 들어주었다면... 긴 시간입니까, 짧은 시간입니까? 짧은 시간입니다. 평생을 지고 갈 ‘원수에 대한 원한’을 일 년 만에 풀어버렸다면... 짧은 시간 맞습니다. 

공무원시험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요즘은 취업이 하도 어려워서 취업재수, 삼수가 흔합니다. 그런데 취업재수해서, 즉 2년 만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을 하였습니다. 축하할 일인가요? 아닌가요? 축하할 일입니다. 앞으로 30년 이상을 보장받는 직장입니다. 2년 만에 합격을 했다면 늦지 않습니다.
 
그러니 성도여러분, 올해를 기도하는 해로 정해보십시오. 평생의 한을 푼다는 심정으로 기도에 매달려 보십시오. 이 홀로 된 여인처럼 끝까지 기도해 서 ‘2012년을 가슴에 묻힌 한을 푸는 과정의 해’ 로 만들어 보십시오. 평생을 꿈만 꾸고 포기했던 것이 있다면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 년으로 만들어보십시오. 일 년이 긴 시간 입니까?  물론 불의한 재판관이 여인을 무시하고 퇴짜 놓은 것처럼 노력을 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고, 낙심만 되는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과정의 시간은 우리를 낙심케 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과정의 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소원이 이루어지는 날이 옵니다. 그러므로 과정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우리는 낙심에 빠지기를 거부하고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하여 끝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과정의 시간에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지켜보십니다. 과정의 시간 동안에 우리는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확실하고, 답답하며 낙심에 빠지기 쉽습니다. 나름대로 노력하는데, 기대했던 결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신 스스로를 보며, 자신이 처한 환경, 무능력함을 보고 낙심합니다. 그러나 낙심해서 포기해버리면 안 됩니다. 낙심에 빠지면 과정의 시간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본문의 여인이 불의한 재판관에게 나아갔을 때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마 그녀는 오직 ‘원한의 해소’ 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른 생각을 하기에는 ‘원수에 대한 원한’ 이 너무 컷을 것입니다. 포기하거나 푸대접받은 것을 생각할 만큼 자존심 챙길 여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냥 무조건 찾아가고 또 찾아가서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오직 ‘기도의 응답’ 만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 우리의 초점을 맞추고 응답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과정의 시간에 우리는 계속해서 기도하며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초점을 맞추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눈앞에 있는 상황에 의해 낙심에 빠지지 않고, 믿음의 행동, 믿음의 실천을 하게 됩니다. 버티는 것입니다. 과정의 시간은 믿음으로 버티기만 하면, 축복의 시간으로 바뀌게 됩니다. 과정의 시간은 그 말 그대로 과정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정의 시간에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 낙심에 빠지지 않고,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 얻게 되는 축복만을 생각하십시오.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말씀드립니다. 예전에 올림픽에서 배구, 농구를 일본에게 이겼는데 축구를 일본에게 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신문에 이렇게 났습니다. ‘한국 배구 잘했다. 한국 농구 잘했다. ‘한국 축구 자~알 ~했다.’  반어법(反語法)입니다. 반대로 말함으로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하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자녀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신 그렇게 귀하고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기도는 자녀가 하늘 아버지에게 무엇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인 하늘 아버지를 감히 ‘불의한 재판관의 이야기’ 에 비유를 합니다. 정말 잘못된 비유입니다.  감히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관’ 과 비교하면 안 되지요. 그러나 그 불의한 재판관도 이 홀로 된 여인의 간청을 들어주는데... 왜 이 땅에 있는 자녀들은 기도를 하지 않느냐 하면서 ‘정말 기도 좀 해라’ 고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끝 부분을 보십시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실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믿음을 보겠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기도는 합니다. 매일 기도합니다. 그런데 ‘믿음’ 을 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믿음을 보여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믿음을 드러내는 2012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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