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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잃은 자를 찾아주신 예수 그리스도 (눅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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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자를 찾아주신 예수 그리스도 (눅 15:1-7)


한번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가까이 나아온 것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보고서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근 거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5)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오늘 저는 본문을 통해서 길 잃은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해 주시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해 드림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길 잃은 양처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세리들과 창기들, 그리고 세속에 젖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 이 죄인의 부류에 속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죄인들이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아야 할 자들로 여기고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 달리 세리와 죄인들을 배척하는 법이 없으셨으며, 그들이 찾아오는 것을 환영하셨으며, 때로는 함께 음식도 드셨습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행동은 바리새인들이 보기에는 율법을 파기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비난했습니다. 

주님의 태도는 죄인들을 경멸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던 바리새인들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나 죄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자들로 보았으나 예수님은 당신이 구원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관점은 천양지차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둘 가운데 어느 편이 옳은 것일까요? 과연, 바리새인들의 생각처럼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정죄하고 심판하기를 원하실까요?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겔 33:11)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고 했습니다. 

방금 언급한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나 죄인들은 불쌍히 여기셔서 회개하고 심판을 면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이신 것은 이 같은 하나님의 심정으로 그들을 대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회개하고 심판을 면하고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을 얼마나 갈망하시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다른 사람들을 거론할 것도 없이, 저와 성도님들이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새 삶을 살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길 잃고 헤매는 우리 인생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들의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고 적절하게 도와주기 위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으며, 죄인들을 정죄하기에 앞서 죄를 뉘우치고 새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셨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성전 뜰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는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말하기를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고소할 조건을 얻기 위해 그 가련한 여자를 이용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시니 그들은 다그쳐 묻기를 마지않았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일어나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셔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님과 여자만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기를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고 하셨습니다. “주여, 없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심정을 대합니다. 이 여자가 정숙하여 그런 죄를 범치 않았다면 더 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그만 죄의 유혹에 넘어가서 범죄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이런 여자를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대로 시행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문제를 그들처럼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그 여자를 정죄하는 자들에게 그들도 그 여자와 조금도 다름없는 약점을 지닌 자들임을 일깨워주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형식적인 준수에 집착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동기를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말씀하시기를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하셨고,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같은 기준을 알고서도 여전히 자기를 의롭다고 할 사람이 있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되 실수로 짓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죄성으로 인해 자연스레 죄를 짓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같은 연약함을 지닌 인생들을 동정하시고 파멸과 죽음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양이 무리를 떠나 위험한 벼랑에서 길을 잃거나 수렁에 빠지는 것은 그 기질이 우둔한데  원인이 있습니다. 우둔하기 때문에 제 좋은 대로 행하기를 고집하다가  위험에 빠지고 맙니다. 이는 우리 인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성으로 인해 자연스레 죄에 끌려서 죄를 짓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없다면 인간은 전혀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 죄를 사하시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다시금 곁길로 가는 일이 없이 목숨을 버려 우리를 사망의 길에서 구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주님의 양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멸망의 길에서 구해내신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고대 팔레스타인에서는 양들을 방목하다보니 때로 불상사가 생겼습니다. 사자나 곰과 같은 맹수가 양을 움켜 가는가 하면, 몰래 도둑이 와서 양을 훔쳐가기도 하고, 양이 목초를 찾아 멀리 나갔다가 길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양을 잃어버린 책임을 목자가 지고 변상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언제나 두 눈을 부릅뜨고 양들을 지켰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힘써 지킬지라도 잃은 양이 생기는 것을 완전히 막지는 못합니다. 

해질녘이 되면 목자가 양들을 불러 모으고 점호를 합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목자는 양 백 마리를 세다가 그 중 한 마리가 없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즉시 그는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한 마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 한 마리를 찾기까지 쉬지 않고 사방으로 두루 찾아 다니다가 마침내 찾아서 어깨에 메고 돌아왔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목자는 곧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0)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3)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14)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노략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 오는 도적 곧 마귀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 오셨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목자가 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삯군이 있습니다. 삯군은 삯이 목적이지 양들을 위하는 마음이 애초부터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맞서 물리칠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이 삯군은 바르지 못한 의도로 영적 지도자 노릇을 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배척하였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 대제사장들이 삯군들입니다. 또한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사역자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삯군입니다. 이단에 속한 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사람들을 미혹하여 멸망 길로 끌고 가므로 도적인 마귀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려고 목숨을 버리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희생하셨기에 그를 믿는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값을 치르는 것을 대속이라고 합니다. 고대에는 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사람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남의 노예가 된 사람이 다시 자유인이 되려면 그를 산 주인에게 몸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노예 신분으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사람 대신 몸값을 지불하고 사서 풀어준다면 그 사람은 자유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의 종입니다. 죄의 종이므로 죄가 시키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 결국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에 의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의 종은 사망의 종이기도 합니다. 이는 자연인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는 사실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죄의 종은 또한 마귀의 종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에 보니 마귀를 가리켜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사망을 무기 삼아 인생들을 두렵게 만들어 종으로 삼아부립니다. 

죄와 사망과 마귀의 종이 되었으니 얼마나 비참합니까? 누가 이 삼중의 굴레를 벗겨줄 수 있을까요? 세상 국가의 법이 율법에 의해 정죄 받은 사람의 죄책을 면제해 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이 선을 행해서 죄를 만회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는 세상 종교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도를 닦고 고행을 하고 자선을 함으로써 스스로 구원 받을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2)고 했습니다. 아무리 성인군자로 추앙받는 사람이라도 자기를 구원할만한 선을 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본질상 똑같은 죄인에 불과합니다. 

바로 이 같은 이유로 인해 모든 사람에게 구세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구세주는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해 주는 분이십니다. 그러려면 구세주의 자격은 죄가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로마서 3장 10절에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하지 않았습니까?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으로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지만, 인성으로는 우리 인생들과 같은 분이십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사람이십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자격으로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들 사이에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하신 디모데전서 2장 5절 말씀이 이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는 분이시므로 우리 인생들의 구주가 되신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죄 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제 예수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인의 자격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리고 죄를 청산한 사람은 당연히 사망의 세력에서 자유함을 얻습니다. 사망이 더 이상 예수 믿는 성도들을 다스릴 권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권세에서 믿는 자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2장 14절 이하에 이르기를 “14)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하였고, 요한일서 3장 8절에 보니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실 즈음, 안식일에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셔서 거기 모인 사람들 앞에서 이사야서 61장의 말씀을 낭독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16절 이하에 이같이 증언합니다.

“16)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님께서 자기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선포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 받는 믿음이란 이처럼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에서 우리 인생들을 해방시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음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세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가장 기뻐하십니다.

목자는 잃은 양을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찾아다녔습니다. 드디어 양을 찾자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고 했습니다. 목자는 잃은 양을 도로 찾은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고 벗과 이웃을 불러 함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비유의 결론 부분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냉정하고 무서운 심판자가 아니라 사랑과 자비가 한량없으신 분이십니다. 범죄하고 방황하는 우리 인생들의 연약함과 기질적인 결함을 동정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영의 아버지이십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고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오래 참아 기다려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셨겠습니까? 그러므로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천군 천사들과 함께 기뻐하십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면, 둘째 아들은 자기 몫의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한 생활로 다 허비했습니다. 무일푼이 되고나자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궁핍해 진 이 아들은 들에서 돼지 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부정한 짐승인 돼지를 치는 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그러나 비극은 이 정도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아들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배불리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제야 이 아들은 스스로 뉘우쳤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이 아들은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이 말하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기를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하였습니다. 그 날 저녁에 아버지는 잔치를 열고 이웃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아들이 돌아온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곧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키며, 둘째 아들은 우리 인생들을 가리킵니다. 예수 믿고 거듭난 성도들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아들들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집을 떠나 영적으로 헐벗고 굶주린 아들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기를 원하십니까? 불신 이웃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을 알기 전에는 우리도 죄 가운데 방황하던 한 마리 잃은 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상한 심령을 고쳐주시고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살게 해 주셨습니다. 이는 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결과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경청하신 여러분 모두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귀 기울여 듣고 그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시며, 아직도 죄와 사망과 마귀의 종살이하는 불쌍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 안에서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누릴 뿐 아니라 전도의 열매를 많이 맺어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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