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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수문 앞 광장 모임 (느 8: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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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 앞 광장 모임 (느 8:2-12)  

포로기 이후 고국으로 돌아온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을 완성했다. 스룹바벨의 성전도 완성했다. 이스라엘 자손이 성읍에 거주한 지 일곱 째달 초하루에 학사겸 제사장 에스라가 수문 앞 광장 집회를 열었다. 이 수문 앞 광장에 모인 모임은 에스라가 주도한 것이 아니다. 모든 백성이 일제히 모인 모임이고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도록 청한 집회였다. 여기에 청한 받은 에스라도 수문 앞 광장에 모인 회중들, 알아 들을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율법책을 읽었다. 율법책을 읽기 위해 학사 에스라는 나무로 지은 강단에 서고 그의 곁 좌우에 13명의 사람들이 섰다. 율법책을 들고 선 에스라가 백성들 목전에서 책을 펼 때 모든 백성들은 어떻게 했는가?  

1. 모든 백성들은 일어섰다. (느8:5)

느8:5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일어선다는 것은 존경의 표시다. 말씀이 낭독되면 그 낭독되는 말씀을 감히 앉아서 들을 수 없다는 겸손의 표시다. 말씀이 그 만큼 삶 속에서 소중하고 귀하다는 표시다. 우리는 예배로 모일 시 말씀 낭독을 한다. 성경봉독 담당자가 성경을 읽을 때 틀리게 읽는다. 빼 먹고 읽는다. 성경봉독자가 준비하지도 않을뿐더러 주일예배에 참석하지도 않는다. 회중은 성경을 읽을 때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일어서지도 않는다. 이는 우리가 말씀을 외면하고 자기도 모르게, 정말 모르게 오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봉독자는 예배에 빠져서는 안된다. 회중은 또한 말씀에 대한 존중으로 일어서야 옳다. 

느8: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라고 쓰여 있다. 이는 새벽은 아침 6시로 볼 때 최소한 6시간은 일어서서 봉독되는 말씀을 들었다는 뜻이다. 말씀에 대한 목마름, 말씀에 대한 섬김이 6시간 일어서게 하였다. 놀라운 일이다. 관례적으로 헨델의 메시야가 연주되면 다 일어난다. 그렇다면 말씀의 귀함, 말씀의 보배로움을 확신하는 자는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왕의 말씀이 아니고 왕의 왕된 말씀이기 때문이다.
  

2. 모든 백성들은 화답하였다. (느8:6)

느8: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말씀을 낭독하는 에스라가 말씀의 주인공되신 말씀의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을 송축할 때 백성들의 화답은 적극적이고 열정적이었다. 수문 앞 광장 집회에 모인 모든 백성들은 말씀이 살 길이고 민족의 부흥의 길이고 가정이 살 길임을 체득하고 있었다. 포로기의 고통, 왜 나라가 무너지고 성전이 불타버렸는가?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흩어져 이산의 고통을 안고 지냈는가? 말씀을 업신여기고 선지자의 말에 불순종한 죄 때문이다. 다시는 이런 비극을 반복하지 않게 하기 위해 율법을 회복시키고 율법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철저히 자성한 모든 백성은 목마른 사슴처럼 말씀과 말씀의 하나님을 사모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스스로 손을 들었다. 손을 드는 것은 헌신의 표다. 말씀에 대한 환영의 표다. 손을 드는 것은 항복의 표다. 축복의 표다. 이것보다 적절한 말씀을 향한 화답이 어디있는가? 말씀이 우리의 꿈이다. 우리의 소망이다. 우리의 힘이라는 화답인 것이다. 

또 수문 앞 과장에 모인 백성들은 입으로 “아멘 아멘”하였다. 아멘이란 “네”라는 동의 표시다. 확실히 그렇게, 나도 말씀처럼 한다는 표다. 고후1:20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라고 하였다. 그런데 한 번 아멘이 아닌 거듭 거듭 아멘이다. 말씀을 목마른 가슴으로 빨아들이는 고백이다. 우리 미래의 길, 우리 국가의 길, 우리 가정의 길, 길이 되는 말씀을 소홀히 했던 목마름이 담겨 아멘이 터진 것이다. 그리고 몸을 굽히는 경배를 하였다. 최고의 화답이다. 말씀에 대한 이런 화답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성도들이 모임을 가질 때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할 때 화답이 살아있어야 한다. 

남북의 창을 통해 가끔 평양의 모습에 나타난 김일성, 김정일을 보라. 손을 들고 박수치고 열렬히 환호하고 통곡까지 한다. 사람에게도 저렇게 할 수 있다면 저 뜨거운 박수와 열광하는 화답이 사실 위대하신 말씀을 향해 올려져야 한다. 말씀을 보내신 이가 하나님이기에 말씀에 화답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태도다. 우리에겐 열광이 아니라 화답의 열정이 있어야 한다.
  

3. 모든 백성들은 깨닫게 되었다. (느8:7~8)

느8:7을 보면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그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였는데...”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 등 레위 사람들이 율법을 깨우친다. 느8:8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말씀을 읽어주는 것, 들려주는 것 다 중요하다. 그러나 그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말씀의 해석이란 신학적 잣대가 필요하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오늘의 시대에 이끌어오는 의미 발견이 해석학에서 주어진다. 말씀을 통으로 보지 못하면 잘못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현미경으로 보기 전 망원경으로 보아야 한다. 즉 나무를 보기 전 숲을 먼저 보아야 한다. 그래야 일관성 있는 해석을 할 수 있다. 말씀 해석의 길을 잃지 않는다. 

오늘 백성들에게 율법을 낭독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랍비들이 그 율법의 뜻을 해석해 줄 때 백성들은 깨닫게 되었다. 깨닫는다는 것은 마음이 설득되었다는 뜻이다. 잘못 알고 편견되이 알고 있던 무지가 그 껍질을 벗어던지고 사고의 전환이 들어왔다는 뜻이다. 깨달아야 한다. 말씀이 지니고 있는 메시지를 잘 받고 그렇게 결단하도록 깨달아야 한다. 수문 앞 광장 집회는 모든 백성들을 바로 서게 했다. 잘못된 것, 버려야 할 것, 게으르고 안일한 것, 붙잡아야 할 것을 깨닫게 하였다. 정말로 집중해야 하고 열심을 내고 사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였다.
  

4. 모든 백성들은 울었다. (느8:9)

느8:9을 보면 백성이 운다.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운다. 그때 느헤미야와 에스라, 레위인들이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고 한다. 

그렇다. 말씀을 듣고 해석하고 깨닫게 되는 이 모임은 기쁨의 날, 거룩한 날이다. 그러나 말씀 앞에서 깨달음을 가진 백성들은 울 수 밖에 없었다. 울음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잘못 살아온 것에 대한 회한의 눈물, 또 하나는 위로와 감동에서 오는 기쁨의 눈물이 그것이다. 여하튼 울음이란 만들어 낼 수 없고 짐짓 꾸며낼 수 없는 것이다. 운다는 것은 은혜다. 하나님의 말씀에 부딪혀 본 자는 이 울음의 의미를 수긍한다. 울음 없는 기도, 울음 없는 예배, 울음 없는 결심은 추상적일 수 있다. 울음이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인 것 같으나 영혼이 순수하게 되는 과정이다. 모든 백성이 울었다.   

모든 백성이 보여준 수문 앞 광장 모임은 말씀으로 무장하는 거룩한 집회였다. 무엇을 위해 모이는가? 갈멜산 백성들의 모임은 신앙 확립을 위한 영적 전쟁의 모임이었고 미스바 산지의 모임은 회복과 평화를 위한 주께로 돌아가는 모임이었다. 수문 앞 광장 모임은 고난의 터널을 지나면서 율법을 회복하는 길이 사는 길, 잘 되는 길임을 확신한 백성들의 자발적 모임이었다. 선지자들이 초청하는 모임이 아니었다. 사사가 제안한 모임도 아니었다. 모든 백성들이 오직 말씀을 듣고 싶어 여는 모임이요, 집회였다. 이런 모임이 성도들의 영적 탐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상업적 동기나 정치적 동기가 있어서는 안된다. 오직 말씀을 가까이 하는 모임, 말씀 해석을 들으려는 모임, 말씀이 우리의 꿈이기에, 삶의 비전이기에 모여서 말씀을 함께 읽어나가는 모임,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가 만들어져야 한다.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이 말씀 집회를 민족의 살 길이라고 믿고 수문 앞 광장 모임을 가졌다. 이 시대도 민족과 교회의 성도의 가정을 살리는 길은 말씀 중심의 삶에 달려 있다. 지금 다 무너지는 소리 밖에 없다. 교회마저도 무너진다는 소리다. 정치계는 물론이고 교육계, 경제계, 체육계, 법조계 등 다 무너진다고 하는데 교회도 요동한다. 하지만 말씀을 위한 수문 앞 광장 집회가 재현된다면 이 시대에 우리 가정에, 내 영성 생활에 말씀을 존중하고 말씀을 세우는 모임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희망이 있다. 다 무너져도 말씀이 세워진다면 우리의 공동체는 역사를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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