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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롬 8: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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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롬 8:31-39)   

(롬8:31-39)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1. 맥스 루카도의 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을 잠시 감상하시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신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거나, 그런 적이 있다거나, 예전에 그러했다거나, 그랬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지금 그러하시다!”라는 말이다. 

오늘, 바로 이 순간, 이 문장을 읽고 있는 바로 지금!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릴 필요가 없고 오늘은 안 되니 내일 다시 오라거나 하는 일도 없다. 그분이 당신과 함께 계신다. 그분의 성실하심은 당신이 좀 나아진다고 해서 더하지도, 좀 나빠진다고 해서 덜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신다. 옆을 보라. 달리는 당신을 응원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결승점 지나서 누가 있는지 보라. 당신이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성원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너무 지쳐 더 이상 달릴 수 없겠는가? 그때는 그분이 당신을 등에 업고 달리실 것이다. 너무 용기가 안 나서 싸울 수 없겠는가? 그분이 당신을 안아 일으켜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신다. 그분이 달력을 가지고 계시다면 당신 생일에 동그라미 표시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분에게 자동차가 있다면 차 범퍼에는 당신 이름이 씌어 있을 것이다. 하늘나라에도 나무가 있다면 나무껍질에 당신의 이름을 새겨놓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신다. 부모는 당신을 잊어버렸을지라도, 선생님들은 당신을 무시했을지라도, 형제자매는 당신을 부끄러워할지라도, 당신의 기도가 미치는 그곳에 대양을 지으신 분이 계신다. 그분이 하나님이시다! (‘은혜가 내 안으로 들어오다.’ 맥스 루카도)

이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솔로몬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가서8:6-7입니다.

도장 새기듯, 임의 마음에 나를 새기세요. 도장 새기듯, 임의 팔에 나를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사랑의 시샘은 저승처럼 잔혹한 것, 사랑은 타오르는 불길, 아무도 못 끄는 거센 불길입니다.  바닷물도 그 사랑의 불길 끄지 못하고, 강물도 그 불길 잡지 못합니다. 남자가 자기 집 재산을 다 바친다고 사랑을 얻을 수 있을까요? ....


2. 오늘 본문 말씀에서 “만일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라면 누가 감히 우리를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하며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예수 믿는 성도를 대항하는 세력은 마귀(사탄)입니다. 사

탄이 성도에 대해 대적하는 행위는 첫째, 송사하는 행위(33절), 둘째, 정죄하는 행위(34절), 셋째,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려는 행위(35절) 등입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욥의 됨됨이를 기뻐하시며 사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욥1:8)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이에 사탄이 이렇게 송사합니다.

(욥1:9-11)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그러자 욥의 신앙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욥을 시험해도 좋다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욥1:12)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이렇게 해서 욥에 대한 사탄의 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욥은 하루아침에 재산을 약탈당하고 종들이 살해되고 연이어 엄청난 대풍이 불어와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자녀들이 모두 압사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감당키 어려운 대환난을 당했음에도 욥이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욥1:21)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이를 보신 하나님께서 욥의 신앙을 칭찬하시며 사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욥2:3)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이에 사탄이 또 다시 송사합니다.

(욥2:4-5)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시자, 사탄이 곧 바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했습니다.(욥2:6-7) 사탄이 욥에게 갖가지 환난과 고통을 가함으로서 욥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려고 했습니다.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당하면서도 욥은 “(욥2:10)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라면서 이 모든 일에 입술로 범죄치 아니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욥은 갑절의 축복을 받아 아들 손자 4대를 보며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욥42:10-17)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세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며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그 후에 욥이 일백 사십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이렇게 욥에 대한 사탄의 시험과 대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견고하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는 사랑의 줄을 단단히 붙잡고 있으면 어떠한 시험과 사탄의 대적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 여러분의 승리를 위해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간구하고 계십니다.(34절) 

마귀는 이 세상에 있을 동안 우리를 시험하고 괴롭힐 수는 있으나 정죄하고 심판할 권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피를 보시고 우리를 정죄와 심판하지 않으시며 사랑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정죄하겠습니까? 어떠한 경우에도 변함없는 믿음과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대적하는 사탄의 세력을 이기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골리앗처럼 제아무리 강한 대적일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편에 있다면 그 어떠한 대항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B.C. 1030년경 이스라엘 사울 왕 당시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쳐서 전멸시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로부터 약 500년 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통과할 때 피곤해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아말렉이 비굴하게 공격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를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안식을 주실 때 그들을 진멸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신25:17-19) 

이러한 말씀에 따라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아각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살려두었고, 가축들 중 좋은 것들은 욕심이 나서 숨겨두었습니다. 이 사실이 들통나자 구차하게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살려두었다며 변명했습니다.(삼상15:17-21) 이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사울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노라고 하셨습니다.(삼상15:23-26) 

그리고 사무엘 선지자를 이새의 집에 보내 소년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셨습니다.(삼상16:1) 그 후 곧 블레셋이 골리앗 장수를 내세워 이스라엘을 공격해왔습니다. 골리앗이 온갖 조롱과 멸시를 퍼부으며 공격하자 지금까지 승승장구했던 사울 왕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었습니다. 이 때 소년 다윗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장터에 왔다가 이러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삼상16:23) 다윗이 어린 나이지만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군대를 조롱하고 모욕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대적 골리앗을 향해 나갑니다. 평소 양을 치던 때 사용하던 물매 하나만을 들고 나가며 이렇게 외칩니다. 

(삼상17:45-47)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그리고 달려나가 물매를 던져 단번에 골리앗의 이마에 명중시키자 그 거대한 골리앗이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다윗이 달려가 골리앗의 칼을 뽑아 그 머리를 베어버렸습니다. 

여기 소년 다윗이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한 말은 하나님 편에 속한 자가 전쟁의 승자가 될 것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승승장구했던 사울 왕이 블레셋의 골리앗으로부터 무력하게 모욕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미 하나님 말씀을 버려 사울이 하나님 편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어린 다윗이지만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로 기름부어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실질적인 왕이기 때문에(삼상 13:14) 

다윗이 하나님 편에 속한 자가 되어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골리앗’은 거대한 ‘세상 세력’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누구든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 하나님 편에 속하게 되면 아무리 강한 골리앗일지라도 단번에 쓰러뜨리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해를 살아갈 때, 항상 하나님 편에 속하는 신앙생활로 범사에 승리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다음으로, 성도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다른 모든 것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지 않겠습니까?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극진히 사랑하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22:2)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에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애지중지키우며 사랑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의심하거나 주저하며 그 이유를 묻는다거나 하지 아니하고 곧장 아침 일찍이 두 종과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으로 갔습니다. 멀리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이 보이는 곳에서 두 종들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창22:5) 하고 아들 이삭만을 데리고 갔습니다. 여기 아브라함이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한 말에서 분명히 ‘우리가 ~ 돌아오리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번제물로 바칠 이삭과 함께 돌아오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두 종들을 따돌리기 위해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독자 이삭을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11:17-19에서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히11: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이러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죽은 것과 같은 자신의 몸, 100세나 된 자신의 몸에서 독자 이삭이 기적적으로 탄생한 것을 체험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성경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4:18-22입니다. 

(롬4:18-22)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이러한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단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제물로 바치고자 했을 때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불러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창22:11-12)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렇게 아브라함이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것처럼 성부 하나님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이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들을 위해 대속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칠 때 많은 고통과 고초가 따랐지만 하나님의 명령대로 어김없이 준행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생자로 하여금 온갖 수난과 고초가 따르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처절한 집행과정을 겪도록 그대로 허용하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이처럼 사랑하셔서 성도 여러분을 구원하시어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아낌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되신 성도 여러분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마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사랑을 증거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성도 여러분의 모든 기도가 응답되도록 여러분을 섬기도록 천사들을 붙여주셨습니다.

(히1: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도 여러분을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십자가에 희생하시기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가장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시16:3)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시21:5) 주의 구원으로 그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으로 저에게 입히시나이다

‘자기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다른 모든 것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요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가장 존귀하신 성도 여러분, 무엇이든 하나님께 구하여 영광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5. 마지막으로, 성도 여러분에 대한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두고 이렇게 반문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는단 말입니까? 의로움입니까? 핍박입니까? 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고대 로마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프랑스 남부 세벤느 산지의 미알레(Mialet)라는 마을 근처에는 좀 특별한 박물관이 하나 있습니다. 이 지방 옛 가옥의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돌로 된 이 박물관은 100여년간 지속된 위그노(프랑스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의 역사를 담고 있는 ‘광야 박물관(Mus?e du D?sert)’입니다. 이런 의미 있는 박물관이 조그만 마을만 드문 드문 있고 교통도 불편한 이 세벤느(C?vennes) 산지에 세워진 것은, 바로 이 지역이 기독교 박해기간 동안 기독교인들의 저항과 도피의 중심지였기 때문입니다. 1598년 앙리 4세가 서명한 낭뜨칙령으로 프랑스 기독교인들은 부분적이지만 예배의 자유를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절대군주 루이 14세는 <하나의 군주, 하나의 법, 하나의 신앙>이라는 말로 요약된 정책을 시행하면서 낭뜨칙령을 폐지하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전면적인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낭뜨칙령 폐지로부터 102년간(1685-1787)의 가혹한 박해의 시기를 가리켜 이른 바 ‘광야의 시기’라 부릅니다. 여기서 ‘광야’(D?sert)란 신앙의 자유를 빼앗긴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위해 모인 은밀한 장소를 가리키기도 했고, 탄압에 맞서서 벌인 그들의 저항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좀 더 성경적인 의미로 ‘광야’는 방황과 고난과 절망의 장소였으며, 동시에 이런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그들과 동행하시고 그의 음성을 듣게 하신 곳이기도 했습니다. ‘

광야박물관’은 18세기 프랑스에서 기독교에 대한 극심한 박해를 피해 성도들이 사람들이 살지 않는 들판이나 산지에 비밀리에 모여 예배드리던 역사적 현장과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만든 박물관입니다.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싸운 이들의 저항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목사들은 잡히면 모든 관절이 으깨지고 사지가 절단되며 마지막에는 참수를 당하거나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여자들은 탈출이 불가능한 높은 망대 탑 감옥에 갇혀 수십 년을 추위와 굶주림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남자들은 예외 없이 노예선으로 끌려가 배 밑창에서 손목과 발목에 쇠고랑을 찬 채 노를 젓다가 거기서 죽어야 했습니다. 수없이 많은 성도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노예선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전시품 중에 유난히 눈길을 끄는 한 점의 전시품이 있습니다. 아마도 파선된 노예선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지는 조그만 한 조각 나무판입니다. 거기에는 피골이 상접한 한 노 젓는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의 손목과 발목에는 쇠고랑이 채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과 함께 새겨진 글귀가 너무나 가슴을 벅차게 합니다. 고난 중에 새겨진 내용입니다. 

“주님, 저로 하여금 제 손목의 쇠고랑을 당신과의 혼인반지로 삼게 하시고, 제 발목의 쇠고랑을 당신의 사랑의 사슬로 여기게 하소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오직 극도의 고난과 죽음밖에는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를 결코 하나님에게서 끊어지지 않도록 튼튼히 묶어주는 사랑의 사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기쁨으로 승리했음을 확인시켜주는 글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고되게 노를 젓다가 죽는 것 외에는 달리 기대할 것이 없는 상황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자기 손목에 채워진 쇠고랑과 발목에 채워진 쇠고랑과 거기 연결된 무거운 쇠사슬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쇠고랑과 쇠사슬은 도저히 끊어버릴 수 없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그로 하여금 그 저주의 올가미 같이 보일 수 있을 쇠고랑과 쇠사슬을 주님과의 혼인반지요 주님께 자기를 묶어주는 복된 사랑의 줄로 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위대한 신앙의 한 모습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신앙의 후예들임을 자각하며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너무나 안일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혹은 오랜 병환으로, 혹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 사업상의 부진으로, 혹은 갚아지지는 않고 커져가기만 하는 빚으로, 혹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가정문제로 절망과 탄식 가운데 빠진 분들 계십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구원은 도무지 나하고는 상관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분들도 계십니까? 오늘 사도 바울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리고 수백 년 전 노예선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의 기도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저로 하여금 제 손목의 쇠고랑을 당신과의 혼인반지로 삼게 하시고, 제 발목의 쇠고랑을 당신의 사랑의 사슬로 여기게 하소서.” 우리에게는 우리를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께로 튼튼히 묶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그를 믿는 믿음으로 오늘의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줄로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에 성도 여러분에게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매일 죽는 것 같아도 우리에게는 넉넉한 승리가 있다고 사도 바울은 노래했습니다. 본문 36-37절입니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확증한다면 현재 나에게 주어진 상황과 그 모든 것이 어떠하든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본문31절) 

사랑은 이 모든 것들을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끊을 수 없기 때문에 마귀는 패배한 것입니다. 변함없는 믿음과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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