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히 11:33-40)

첨부 1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히 11:33-40)

선교는 자신의 생명을 주는 순교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순교를 통해 더 좋은 부활을 얻고 복음이 증거됩니다.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지킬 수 없는 걸 
버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일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그러나 이반석 선교사님처럼 순교적 삶을 사신 분들은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은, 내가 어떤 일에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항상 그랬듯이 지금도 담대하게 원하는 것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위대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기 때문입니다”(빌 1:20~21절).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은 예수님이 존귀하게 된다면 자신이 죽는 것도 유익이라는 위대한 고백입니다. 히브리서는 핍박받던 크리스천들을 위해 쓰인 편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확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누구입니까. 어떻게 그분을 믿고 전하는 것이 자신의 생명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될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어떠한 고난이나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핍박과 순교가 주는 도전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믿음생활에 거품이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믿음의 전당이라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부류는 믿음으로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정복하기도 하고 의를 행하기도 하고 약속들을 받기도 하고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고 불의 능력을 꺾기도 하고 칼날을 피하기도 하고 연약한 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고 전쟁에서 용맹한 사람들이 되기도 하고 이방 군대를 물리치기도 했습니다. 여인들은 자신의 죽은 사람들을 부활로 되돌려 받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고문을 당했지만 더 나은 삶으로 부활하기 위해 풀려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33~35절).

성경에는 믿음으로 승리를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또한 기드온은 300명의 용사로 미디안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다윗은 모든 원수들을 무찌르고 평화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엘리야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나이와 성격, 문화와 직업이 달랐지만 동일하게 믿음의 승리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언제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위대한 승리를 경험한 사람들

35절 뒷부분부터는 또 다른 믿음의 영웅들의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조롱과 채찍질을 당했으며 심지어 결박되고 투옥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돌에 맞았고 톱질을 당했고 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양 가죽과 염소 가죽을 입고 떠돌아다녔으며 그들은 가난했고 고난을 당했고 학대를 받았습니다. (세상은 그들에게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 등에서 떠돌며 살았습니다”(35~38절).

이 말씀을 보면 믿음이 승리한 것이 아니라 패배한 것처럼 보입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칼의 위협이 왔을 때 칼이 부러졌고, 사자 굴에 던져졌어도 살아났습니다. 그들은 기적적인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부류의 영웅들에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칼에 죽고, 채찍에 맞고, 심지어 톱으로 켜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인생은 실패한 인생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승리를 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도 이와 비슷한 고난을 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례미야도 우상숭배를 비판한다는 이유로 유대계 이집트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었고 이사야도 므나세 왕의 명령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전승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스데반과 베드로는 순교했지만 위대한 믿음의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성경은 이들에 대한 기록을 클라이맥스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들은 실패한 사람들이 아니라 누구보다 위대한 승리를 경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38절을 보면 세상은 그들에게 가치가 없었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장벽을 무너뜨린 사람들도 위대하지만 믿음을 부인하지 않고 순교한 사람은 더 위대한 믿음의 영웅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핍박에 대한 이야기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받은 핍박은 아니라 유대교에 대한 핍박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가 왜 이러한 사건을 믿음의 전당 마지막에 기록했을까요. 그것은 히브리서를 읽는 성도들 또한 동일한 핍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핍박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라 복음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음에도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면서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때 이들이 순교하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온전히 실현되지 않는 상황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순교를 했는데, 메시야가 오신 이후의 사람들이 핍박을 견디지 못해서야 되겠느냐는 설명을 하기 위해 가록을 한 것입니다.

더 좋은 부활을 위한 ‘순교’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행 1:8).

증인은 헬라어로 마티스입니다. 증거라는 단어는 마튜리아입니다. 순교자라는 단어도 증인이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결국 다시 번역하면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순교자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증인은 순교자입니다.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은 나의 순교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한 이후 흩어진 성도들이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안드레는 아시아의 여러 국가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베드로는 어땠습니까. 네로 황제에 의해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똑같이 십자가에 매달릴 수가 없어서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사도바울도 로마에서 참수를 당했습니다. 야고보, 빌립, 마태, 마가, 누가, 맛디아, 도마 등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순교했습니다. 요한만이 오래 살았을 뿐입니다.

네로 황제는 로마에서 일어난 대 화제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렸습니다. 네로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동물들의 털옷을 입혀 개들이 물어뜯어 죽이게 했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시신을 로마 군인들이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을 밝히는 가로등처럼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초대교회에 대한 박해는 2~3세기에 집중적으로 일어났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앗수르에 의한 핍박보다 훨씬 심하고 조직적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역사에 나오는 순교 장면은 우리의 가슴이 저리도록 하는 기록이 많습니다. 초대교회 감독 이었던 이그나티우스 순교당하면서 일곱 통의 편지를 남겼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에는 자신을 위해 중보해달라고 하거나 순교당하지 않도록 구명운동을 해달라는 기록이 없습니다. 오히려 한결같이 용기 있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 편지에는 자신이 단순히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뿐만 아니라 크리스천으로서의 행동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적혀있습니다. 자신이 고난당할 때 예수님 안에서 자유로울 것이고, 그리스도의 순수한 떡으로 바쳐질 수 있도록 짐승들의 이빨에 찢겨져야할 하나님의 밀알이라고 썼습니다. 이그나티우스는 악형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순교의 피로 전해지는 복음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연약해서 죽음을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두려하면 천국 갈 사람이 갑자기 지옥으로 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한 사람들은 부활할 때에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똑같은 부활이라도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대교회 감독이었던 폴리 캅이라는 사람의 유명한 예화가 있습니다. 폴리 캅에게 예수님을 저주하면 풀어주겠다 제의하자 그는 86년 동안 예수님을 섬겼지만 그분은 한 번도 나를 배신한 적이 없다면서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 나의 왕을 저주하고 배반할 수 있단 말이오?”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화형을 기다리면서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전능하신 주 하나님, 제가 이런 영광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기도가 폴리 캅이 남긴 마지막 말입니다.

서구사회의 그리스도인들과 우리들은 초대교회에 있었던 이러한 순교사건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순교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기독교 통계학자인 바르시는 종교의 자유가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약 6억 5백만 명으로 추산합니다. 정부의 박해와 핍박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약 2억 2천 5백만 명으로 추산했습니다. 연 평균 크리스천 순교자의 수가 15만 9천 명 정도라고 합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그 정도의 사람들이 순교를 하고 있다는 조사입니다.

이 시대에도 초대교회와 마찬가지로 복음은 순교의 피를 통해 증거되고 있습니다. 최근 어느 집회에서 북한교회 지도자의 간증을 들었는데 북한에 있는 지하교회 성도들이 한국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데 그분들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구 소련의 크리스천 여성 지도자가 유럽으로 망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여기서는 도저히 신앙생활을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신앙의 자유가 있는 곳에서 오히려 믿음의 도전과 위기를 느꼈던 것입니다.

현재 북한에는 40만 명의 지하교회 성도들이 있다고 추정합니다. 외국에서 사역하는 한 한인목사님이 북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세례를 주면서 던진 세례문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당신은 예수님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입니다. 교리적 지식을 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미국에 있을 때 북한의 한 지도자에게 세례를 준 적이 있습니다. 비밀리에 세례를 줬습니다. 생명을 건 결단이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사실이 알려지면 그는 생명을 잃게 됩니다. 2003년과 2004년에는 북한의 한 장교가 부대원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다가 발각이 돼서 처형당한 기록이 있습니다.

예전에 故하용조 목사님을 모시고 아프가니스탄에 가다가 파키스탄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한 교회를 방문해 폭탄테러로 사지가 잘린 그리스도인 지도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파키스탄에는 회교도들이 합법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할 수 있는 제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마을이 따로 있습니다. 그들은 밖에 나오지도 못합니다. 만약 회교도가 기독교로 개종을 하면 그들은 사회에서 살아날 수 없습니다. 법적으로 상속권이 박탈됩니다. 기독교인의 90%가 직장이 없습니다. 약 2%만이 직장생활을 하는데 인분을 치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크리스천들을 박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대변했던 바티 장관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온누리교회에도 오시고 횃불트리니티에서 명예박사를 받으셨습니다. 파키스탄에서 유일한 기독교인 고위 공직자였던 그는 피살됐습니다. 1억 7천만 인구 중 2%에 불과한 기독교인들의 인권운동에 앞장서고 신성모독법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이슬람 무장 세력에 의해서 살해당했습니다. 지난해 1월 BBC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슬람 신성모독법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계속 벌인다면 살해될 것이라는 협박이 있지만 폭력은 나를 괴롭힐 수도, 위협할 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결국 지난해 3월 11일 순교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기독교를 핍박하는 나라에 그리스도인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지하교회 지도자들의 이야기가 번역되어서 알려지고 있는데 한 지하교회 성도들이 추운 날 강가에서 세례를 받을 때면 엄청난 기적들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반신불수인 형제가 일어나고, 말하지 못하던 사람이 말을 하게 되고, 뇌질환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던 사람들이 살아나는 기적들이 세례를 받을 때 일어난다고 합니다. 반면 신앙의 자유가 있고, 인권이 보호되어 순교가 사라진 서구 사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기적도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주는 선교

핍박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빌립보서 1장 29절에 기록된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알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할 책임, 곧 그분을 믿을 뿐 아니라 그분을 위해 고난도 받아야 할 책임을 받았습니다”(빌 1:29).

“그러나 나는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서 내게 주신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다 완성하기 위해서라면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행 20:24).

선교는 자신의 생명을 주는 순교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어떤 의사가 쓴 글에서 자신의 피를 헌혈해서 누이의 생명을 구한 한 소년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을 읽었습니다. 6살 소녀가 수혈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감염되지 않은 깨끗한 피를 수혈해야만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남동생의 피와 누이의 피가 맞았습니다. 의사가 물었습니다. “자니, 누이 메리를 위해서 너의 피를 줄 수 있겠니?” 그때 자니의 입술이 부르르 떨리면서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더니 금세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물론입니다. 제 누나를 위해서 제 피를 줄 수 있습니다.” 수술실에서 수혈이 시작되었습니다. 수혈이 끝날 무렵 자니가 의사 선생님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는 언제쯤 죽게 되나요?” 자니는 수혈을 하면 자신의 모든 피를 다 주는 줄로 착각을 했습니다. 소년은 누나를 위해 죽기를 각오한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선교란 결국 자신의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선교사들은 자신의 생명을 내걸고 살고 있습니다. 선교사 중에는 생명의 위협이나 고난, 희생을 경험해 보지 않은 분이 거의 없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볼리비아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분은 교회를 24개 이상 개척하고 수만 명을 전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선교지에 간지 얼마 되지 않아 큰 아들을 잃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살았는데 담벼락이 없는 2층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져 죽었습니다. 아들을 잃는 엄청난 희생 이후 성령의 역사가 그분을 통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결코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다

순교 역사 중 가장 감동 깊은 이야기는 아우카족을 선교한 짐 엘리어트의 이야기입니다. 언제 들어도 감동입니다. 짐 엘리어트는 시카고의 휘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인재였습니다. 그는 남미 에콰도르 아마존 유역에 선교사로 자원했습니다. 1956년 1월 8일 4명의 동료와 함께 가장 악명 높고 접근하기 어려운 아우카 부족이 사는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 들어간 직후 그는 창에 찔려 순교했습니다. 그 부족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외부인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엘리어트의 나이는 불과 28세였습니다. 함께 들어간 친구들도 모두 살해되어서 강에 버려진 채 발견됐습니다. 미국의 촉망받던 인재들이 선교지에서 복음을 전해보지도 못하고 목숨을 잃자 당시 시카고의 신문과 잡지들은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인가?’를 제목으로 선교를 비판하는 기사를 냈습니다. 그때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어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씀을 삼가십시오. 낭비라니오. 내 남편의 죽음은 낭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전 생애를 이것을 위해 준비했던 사람입니다. 바로 이 시간을 위해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책임을 수행하고 생의 목표를 달성하고 죽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엘리자베스 엘리어트는 간호 훈련을 받고 1년 후에 바로 그 아우카 부족으로 들어갔습니다. 다행히 아우카 부족은 남자만 죽이는 부족이었습니다. 그녀는 5년 동안 그곳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5년 후 부족을 떠나는 엘리자베스에게 아우카 부족 추장이 물었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당신들이 5년 전에 죽였던 그 남자의 아내입니다. 남편이 당신들을 향해 가지고 있던 그 사랑을 당신들에게 전하기 위해 제가 다시 이곳에 왔습니다.”

그 후 수십 년이 지난 후 그 마을에는 수백 개의 교회가 생겨났고 짐 엘리어트가 죽은 마을교회의 담임 목사가 짐 엘리어트의 아들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곳은 그 교회에서 장로와 교사로 섬기는 사람들이 바로 엘리어트와 친구들을 죽인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짐 엘리어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수많은 선교사님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지킬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우리는 순교자들을 불쌍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더 좋은 부활을 사모하며 복음이 증거되는 일에 헌신한 귀한 사역자들입니다. 위대한 순교를 맞이한 그분들이 오히려 우리를 불쌍히 여길 것입니다. 선교는 순교입니다. 순교적 각오로 한 해를 시작하기를 바랍니다. 온누리교회가 선교에 목숨을 걸었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후원하고, 기도하고, 그들과 함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재훈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