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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됩시다 (롬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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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됩시다

(롬 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네이턴 헤일'은 미국 독립 전쟁 때 영국군의 비밀을 훔쳐 오다 발각되어 1776년 22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았습니다. 그는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말할 기회를 얻자 '미국을 위해 바칠 수 있는 내 목숨이 하나뿐임이 유감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60년 V-2 정보기를 타고 소련 상공에서 첩보 비행 중 체포된 '프란시스 파우어즈'는 '나는 이 짓이 싫었으나 미국 정보부가 시켜서 했다'고 말해 2년 후 미국에서 잡힌 소련 간첩과 교환되어 살아서 미국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신념과 자신의 일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다한 '헤일'은 죽었어도 온 국민의 마음에 깊이 남아 있지만, 살아 돌아온 '파우어즈'는 비열하고 무책임한 사람으로서 일생 동안 지탄을 면치 못했다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직분의 내용을 밝히며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방인을 제물로 드린다'는 말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 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뭇 나라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낙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사 66:20)라는 내용의 반영으로 이방인들이 바울에 의해서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드려질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데 이는 이방인들이 바울에 의해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제물이 된다는 뜻이 됩니다.

또한 이방인들의 희생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 된다는 뜻으로 이제 더 이상 유대인들의 희생 제사는 폐지되었다는 의미까지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 곧 그의 사도직에 대한 사역을 비유적인 말들로써 자신의 사명을 논하며 그는 하나님의 일을 맡은 제사장으로 이방인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은 어떤 자입니까?
자신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인 바울은 어떻게 한다고 합니까?
   
사명을 알고 사명대로 일한다고 합니다.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롬 15:16) 자신의 사명임을 알고 사명을 감당함을 말합니다.  
'인간은 사명적 존재다'라는 말들을 합니다. 이 말은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각자의 할 일을 걸머지고 태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더욱 실감나는 말이 될 것입니다. 신자는 구원받은 순간부터 하나님의 교회의 한 지체로서 자기의 사명을 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갈팡질팡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은사나 달란트가 분명히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구원받은 것 자체로 만족하며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자는 즉시 말씀을 읽고 또 기도함으로써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수행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었기에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고 제사장 직무를 훌륭하게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고전 9:17)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오히려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특별한 사명감을 가졌으며 다른 사도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으려 열심을 다해 그의 직분을 행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 즉 복음 전파의 직분에 대해 고백을 하는데 복음 전파의 일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하는 사명임을 고백합니다.

(고전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예수 그리스도가 전한 하나님의 복음 그 자체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널리 전파되어야 할 것으로 우리 모두의 자랑이며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그 길이 고난의 길이며 환난의 길임을 잘 알기에 될 수 있으면 피하려 합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부르는 하나님께 아이라고 하며 거부의 몸짓을 보였으나 결국 부르심에 응했습니다

(렘 1:5-7)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회개의 말씀을 전파하라는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했다가 결국 고난을 당한 후에야 다시 니느웨로 갔습니다(욘 1:1-3).

바울도 기독교인을 박해하려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복음 전파자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미국의 전신기 발명가인 모스 교수와의 대화에서 허베이(GEORGE W. H-ERVEY) 목사가 이런 질문을 하였다합니다. "모스 교수님, 대학 교수실에서 실험할 때에 혹시 계속해서 그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던 경험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종종 그런 일이 있습니다." "내가 하는 실험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그런 쉬운 문제들은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문제가 생겼을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좀더 많은 빛을 주십사 하고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빛이 옵니까?" "예. 그러나 내가 발명한 것으로 인하여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나에 대하여 굉장한 영예를 안겨줄 때마다 나는 내가 그 영광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 자신이 그런 훌륭한 발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 그것을 만들어야 할 필요를 갖고 계신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그 일을 맡기신 것이 바로 내가 그 임무를 맡게 된 것뿐입니다." 이런 사실로 볼 때 발명가 모스가 했던 첫 마디인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말은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닌 것입니다.(MOODY MONTHLY)
  
이처럼 하나님의 일은 싫고 좋음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하는 사명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대답하기를 화를 당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고전9:16)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주님께서는 소아시아에 있던 일곱 교회 중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처음 첫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라고 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

(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이는 비단 에베소 교회뿐만이 아닌 오늘날 신자의 식어진 사명에 대한 강한 책망이기도 합니다.
처음 구원에 감격하여 열심히 맡은 일에 뜨겁게 헌신하던 사람이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열이 식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서서히 사명감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신자가 매우 경계해야 할 상태입니다. 신앙적 정열이 식는다는 것은 곧 사명감을 잃고 있다는 증거요, 그러한 현상은 나도 모르게 하나님과의 교제가 멀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암암리에 말해 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느 때나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라는 고백을 서슴없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제사장 직무를 올바로 수행하는 길입니다. 
  
뉴욕의 소방서장을 지낸 '보너'(Bonner)가 이런 말을 했다합니다. 자신은 잠을 잘 때 침대 위에 걸린 소방 벨을 아무리 작게 해놓아도 그 소리에는 민감하게 잠을 깨지만 밤새도록 우는 아기의 울음소리에는 끄떡없이 잠을 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큰 소방벨 소리에는 잠을 잘 수 있지만 아기가 바스락 소리만 내도 벌떡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소리에 민감한 것이 아니라 사명에 민감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사명은 삶의 유일한 조건입니다. 사명 때문에 사람을 살아갈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사명이 끝나는 날 우리는 낙엽이 되어야 하지만 그래도 한탄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 전파하라는 사명을 거역한다면 우리는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맡겨진 하나님의 일을 피하여 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행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결국에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계 2:10).
그러므로 사명을 바로 알고 사명 감당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들 됩시다.

    
그러면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라고 겸손해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이 은혜는(롬 15:15-16) 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행하는 하나님의 모든 사역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실을 고백하며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수중에 있는 하나의 도구로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합니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고 합니다.

(고전 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이러한 바울의 겸손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욱 크고 놀랍게 쓰임 받는 이유가 된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빈 수레가 큰 소리를 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깊은 물은 소리 없이 흐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해양 탐험의 역사를 보면 쿠크 선장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영국 사람이 있다합니다. 그에게는 남다른 재주가 있기도 했으나 끊임없는 노력과 성실한 그의 생활태도가 많은 업적을 남기게 했다합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쿠크는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하여 어려서부터 잡화점 사환으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가게에 자주 들러 쿠크를 대하던 선주 워커는 쿠크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배에 태워 견습 사원이 되게 했다합니다. 이렇게 해서 바다 생활을 시작하게 된 어느 날 북해를 항해하다가 폭풍을 만나 배가 몹시 흔들리는 바람에 선장은 넘어져서 까무러치게 되었다합니다. 이때 쿠크가 감히 일어나 선장을 대신하여 배를 지휘하였다합니다. 그의 항해술은 놀라워 잠시 후에는 폭풍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합니다. 후에 이 사건을 전해들은 선주 워커는 어린 쿠크를 칭찬했으나 그는 운이 좋았던 것뿐임을 강조하여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합니다.
  
미국의 무디, 영국의 웨슬리, 스펄전 목사의 가장 큰 특징은 그들의 한없는 '겸손'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성 프랜시스는 그의 제자에게 가르치기를 '성도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첫째가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성도는 이미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존재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제 내 몸의 주인은 내가 아닌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나의 생각으로 또는 나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그러질 못합니다. 아직도 자아가 깨어지지 못하여 '내가 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여기에 성도의 고뇌와 슬픔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자신의 뜻대로 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오로지 순종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죽음마저도 겸손하게 아버지의 뜻에 따랐습니다. 
   
한번은 베르디를 추앙하는 오페라가 밀란에서 계획되면서 누가 이 오페라를 지휘할 것이냐가 거론되었을 때. 명 지휘자 마스카그니가 당대의 유명한 토스카니니와 함께 물망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둘 중에서 선택이 난감하게 되자 할 수 없이 두 사람 다 지휘하게 하도록 결정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스카그니는 자기에게 토스카니니보다 더 높은 금액의 사례를 주지 않으면 지휘할 수 없다고 고집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토스카니니보다 높은 금액의 사례를 받았습니다. 한편 토스카니니는 무료로 이 오페라를 지휘하였습니다. 그 이후의 평판은 짐작하지 않아도 분명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토스카니니는 그의 자기 겸허로 시민들의 더 높은 존경과 신뢰를 받게 되었다합니다.
사명을 알고 감당하되 겸손함으로 감당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들이 됩시다.   

   
사명을 감당하며 겸손한 가운데 어떻게 한다고 합니까?
사도 바울은 성령 안에서 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성령에 매여 일한다고도 합니다.

(행 20: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바울은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했습니다.

바울이 제3차 선교 여행을 거의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밀레에 머물러 있으면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고별사를 하면서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합니다.
  
다메섹 회심 사건 이후로 바울은 성령에 의하여 지배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성령께서 가라 하면 갔습니다.

(행 13: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성령께서 가지 마라 하면가지 않았습니다.

(행 16:6-7)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예루살렘 방문도 성령에 의하여 환난 당할 것을 예지하고 있었으나 역시 성령의 지시에 따라 예루살렘에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말하는 것도 자기 말을 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한다고 했습니다.

(고전 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그러기에 그는 그의 삶은 그리스도에 의한 삶이었으며 성령에 의한 삶이었습니다.

(행 18: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그러므로 환난도 성령의 뜻이라면 감수합니다.

(행 20: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은 그의 앞날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령의 증언에 의하여 알고 있었고 이는 실제로 가이사랴에 이르렀을 때 선지자 아가보의 예언으로 다시 알려지지만(행 21:10-14) 그는 예루살렘 방문을 기피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것을 원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무조건적으로 이 지시에 순종함으로써 결국 그를 로마 선교사로 보내시려는 하나님의 오묘한 계획안에 들어서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을 입은 사도 바울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행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는 그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복음 증거의 사명, 즉 선교 사명을 수행하는 일을 운동선수가 경주 장에서 달리는 열심을 가지고 있음을 말합니다. 사실 그의 삶을 살펴보면 그의 말대로 모든 지식, 모든 시간, 모든 정열을 선교 사명에 다 쏟았습니다. 그는 복음 선교를 위하여 전력투구한 것입니다. 바울의 인생은 걸어가는 인생이 아니라 달려가는 인생이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복음 선교를 '선한 싸움'(딤후 4:7)이라 하고 복음 전도자를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딤후 2:3)라고 규정했습니다.  선교 사역은 투쟁하는 일입니다. 자신과의 싸움이 사회악과의 싸움이며 사탄과의 싸움입니다. 군사는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습니다. 명령에는 복종이 있을 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런 의식으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그의 생명을 잃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생명이 이미 그리스도 예수의 선교 재단에 '관제와 같이'(딤후 4:6)부은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명은 이미 다메섹 도상에서 죽었고 지금의 생명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가 생명을 잃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조금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증거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돌아보며 증거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복음 선교'는 고귀한 사명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대가로 '의의 면류관'(딤후 4:8)까지 주실 만큼 존귀한 가치가 있는 사역입니다. 그러기에 복음 선교는 천사까지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사역이라고 합니다

(벧전 1: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께서는 교회에 강림하셔서 성도들의 몸을 전으로 삼고 계십니다. 그리고는 성도의 삶을 지키시고 인도하시며 도와주십니다.

따라서 성도는 늘 성령님과의 동행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분은 인격적인 분이셔서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소유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전인격을 지배하실 수 있도록 간단없이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의 이런 간증을 합니다. 저는 7년 전에 어떤 사장님을 만났습니다. 이 사장님이 큰 집회에 갔다가 불을 받아서 성령체험을 하고 뜨거워져서 눈물을 흘린 모양인데 그 뒤에는 다시 그렇게 뜨겁게 해주는 역사를 체험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나에게 와서 "목사님. 제가 7년 전에 뜨거운 불 체험을 했는데 그 뒤에 그 불이 식어버렸습니다. 사업이 무척 바빴지만 다시 그 뜨거운 불 체험을 하려고 집회가 있다면 모두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7년 전에 받은 체험이 다시 오지 않습니다. 목사님.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래서 "사장님. 제가 하나 물어봅시다. 7년 전 뜨거운 체험. 성령 받은 뒤에 무얼 했습니까." 물었더니 "감사드리고 기뻐했죠"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건 당연히 은혜 받아서 기쁜 것이니 감사하는 건 당연한 것이고 생활 속에서 달라진 게 뭐 있습니까." 했더니 "목사님. 뭘 말씀하시는지요." 되묻기에. "사장님. 회사 종업원들 대우를 더 잘해주고 옛날 탈세하던 것 요즘에 안하고 종업원 휴가도 잘 주고 제품도 진실하게 만들고 그런 걸 했습니까." 했더니 "그런 것까지는 생각을 못했네요" 하기에 "그럼 증인이 안 된 거죠"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권능을 받았다면 자기 삶 속에서 증인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성령 받은 뒤. 권능 받은 뒤에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대하고 나라에 대해서 세금도 바로 내고 진실한 백성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모시고 있는 삶 그게 증인입니다. 자기 있는 자리에서 순교한다는 생각으로. 손해 봐도 진실하게 일하고 남이 욕해도 진리대로 사는 것이 증인정신입니다. 성령을 받았으면 성령 받은 변화가 자기 생활 그 자리에서 드러나는 것이 증인 생활입니다.

모든 것을 성령의 인도 하심에 맡길 때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이루신다고 말씀 합니다.

(시 37:5-6)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는 교회의 좋은 일꾼이 되되 받은 사명대로 겸손하게 성령의 능력을 힙 입어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들로서 사명 감당하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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