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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약속하신 복을 바라봅시다 (창 13: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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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하신 복을 바라봅시다 (창 13:8-18)
   
고국에서는 설날을 앞두고 또 한 번의 새해맞이를 하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설날에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을 주고 받습니다.  저 역시 우리 교우들이 금년 내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라며 기도합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언제 들어도 좋고 낯선 사람에게 들어도 싫지 않은 기분 좋은 인사말입니다.   복 받으라 말하는데 무슨 밑천 들어가는 것도 아니라 여겨 너도나도 선심 쓰듯 축복하는데 과연 무슨 복을 기대하며 이런 인사를 나누십니까?   우리가 가족과 이웃들을 위해 비는 복이 하나님이 주시는 바로 그 복이 되길 바라며 오늘 본문을 함께 살펴봅니다.   

성경을 보면 복이라는 말이 창세기 1장부터 나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땅과 바다와 공중에 사는 생명체를 만드신 후 그들에게 복을 주어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하셨습니다. 사람을 만드신 후에도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하셨습니다.  복은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고 복의 내용은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이 만드신 선한 목적을 따라 생육하고 번성하며 충만하게 됨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은 하나님의 뜻과 관련되었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던 그 본래 모습을 간직하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지속되는 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 하나님의 뜻대로 번성하지 않고 사람의 욕심을 따라 번성했을 때 거기에는 죄악과 심판이 따랐습니다.  노아의 홍수가 그 본보기였고 바벨탑 사건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방향으로의 번성과 충만은 복이 아니라 심판의 원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실 때도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2).  복의 내용이 창세기 1장의 복과 서로 통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구별하여 불러내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복의 근원이 되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이 복의 원천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실어나르는 시작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한 복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 씨를 통해 이스라엘이 나왔고 그 민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구주로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임시로 체류했던 나그네였습니다.  가나안에 기근이 들었을 때 생존을 위해 애굽으로 내려가야만 했습니다.  고향을 떠난 외국인의 신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불안정합니다.  본토인들은 흉년에도 그 땅을 지키고 살지만 남의 땅에 붙여사는 외국인과 나그네는 경제적인 불황을 만나면 가장 먼저 눈치가 보이고 신변에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기근을 피해 잠시 애굽으로 피난왔던 아브라함은 아내를 바로에게 빼앗길 뻔했지만 하나님의 개입으로 위기를 넘겼습니다.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바로가 준 큰 선물을 받아 가나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많이 불어난 재물과 식솔들을 이끌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을 따라 간 조카 롯도 삼촌 덕에 부자가 되었고 두 가족이 한 동네에서 목축업을 하기에 벧엘 지역의 초장은 비좁았습니다.  재산이 많아지는 것이 항상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관리해야 할 재산목록이 많아지자 서로 자기 몫을 지키려고 전에 없던 다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불미스런 일이 자주 발생하자 아브라함이 조카를 불러 분가하라 권합니다.  ‘네가 왼편을 택하면 내가 오른편으로 가고, 네가 오른편을 택하면 내가 왼편으로 가겠다’합니다.  선택권을 먼저 받은 롯은 이게 왠 횡재인가 하며 눈에 보기 좋은 땅 요단 들판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리고 두 가족은 그후로 서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롯의 선택과 아브라함의 선택을 비교해봅시다. 선택권을 먼저 얻은 롯은 물이 많고 초장이 넓은 요단 들판 소위 명당 자리를 선택했습니다. 너 먼저 선택하라 한다고 얼싸 좋다 하며 어른에 대한 양보심도 없이 얼른 좋은 땅을 택한 롯의 행동이 괘씸하지만 그 마음에 품은 야망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그가 세운 목표는 ‘오늘은 요단 들, 내일은 더 넓고 풍요로운 땅 소돔과 고모라’였습니다.  요단 들판은 소돔과 고모라로 진출하려는 발판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하기 전이었으니 얼마나 살기 좋아보이는 곳인지 여호와의 동산과 같고 애굽 땅과 같았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요단 들이 아무리 좋아 보이더라도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던 소돔 성까지 들어가지는 말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꼭 가야 할 곳이 있고, 가도 괜찮은 곳이 있으며, 절대 발을 들여서는 안되는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롯의 가족은 그런 것 상관하지 않고  가서는 안될 소돔으로 들어가 거기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선택이 소돔을 향해 들어간 롯의 꿈과 같지 않기 바랍니다. 이곳을 발판으로 삼아 더 큰 세계로 나아가려는 꿈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꿈과 계획 속에 하나님의 복이 함께 하고 있는가 아닌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들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조카 롯이 떠나간 후 삼촌의 마음은 허전했습니다.   차라리 적은 재산을 가지고 사이좋게 살던 때가 더 좋았다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조카 롯이 홀로서기를 잘 할 수 있을까 염려도 됩니다.  롯이 떠난 후 마음이 착잡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말씀하시기를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이 많게 하리니’ 하십니다.   아직 한 평의 땅도 자기 이름으로 등록하지 못하고 재산을 물려줄 아들 하나 없는데 이런 거창한 약속을 주시며 위로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속에 중요한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이후로 그를 만나주실 때는 대부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의뢰하고 무엇인가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고 떠난 다음입니다.  고향을 떠날 때도 그랬고 이번에 롯을 떠나보낼 때도 찾아와 주시며 복을 약속하시며 위로하십니다.   소돔 왕의 상급을 거절할 때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 등 그때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복을 더 확실하게 보여주시고 격려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 지역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롯의 선택과 아브라함의 선택이 다른 점이 여기 있습니다.  롯은 눈을 들어 성공과 번영을 위한 명당 자리가 어디인가 살펴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지만 롯은 번영과 성공에 더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결국 롯은 눈에 보기 좋은 곳을 택하여 떠나갔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살았던 아브라함의 믿음은 소돔과 고모라 땅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확실하게 증명되었습니다.   엘람 왕 그돌라오멜의 동맹군이 소돔과 고모라를 기습하여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갈 때 롯과 가족들도 포로가 되었고 모든 재물을 빼앗겼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이 군사를 모아 기습하여 조카의 가족을 구출했습니다.  아브라함을 마중나온 소돔 왕이 좋아하며 승리의 상급으로 아브라함이 되찾아 온 모든 재물을 주겠다 할 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께 손을 들어 맹세하기를 “당신이 나를 부자 만들어주었다 할까 하여 당신의 것은 실 한 오라기나 신발 끈 하나도 받지 않겠다”합니다.  

보통 사람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붙여 사는 나그네가 그 땅의 터주대감 소돔 왕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은 출세길을 보장해주겠다는 든든한 후원자의 스카웃 제의를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엘람 왕의 동맹군을 격파하고 돌아온 직후 그들의 보복이 예상되는 시점에 이런 보호를 거절한다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미련한  결정처럼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왜 소돔 왕의 호의를 거절했습니까?   아브라함은 롯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소돔과의 동맹은 곧 그 사람들의 방식대로 살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백성들이 섬기는 신을 섬기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즐기고 죄를 쌓고 또 쌓는 삶을 살기로 동의하는 조약체결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부자가 되게 했으니 나를 배신하고 네 마음대로 살지 못한다는 조약에 사인 sign을 하는 것입니다. 소돔 왕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 우선이었던 아브라함은 소돔 왕의 상급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뽑아내신 목적은 갈대아 사람들처럼 살지 않고 구별되게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와서 그 사람들의 풍습을 따라 산다면 구태여 여기까지 데려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삶을 사는 이것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이며 사명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복이며 또 우리의 복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 왕의 파격적인 호의를 거절한 또 하나의 이유는 애굽 사건 이후 하나님을 더 많이 의뢰하는 사람으로 변하고 있었다는 뜻이 아닐까요? 위험한 순간을 모면하게 하실 뿐 아니라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명예와 물질의 복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소돔 왕의 제안 쯤은 하나님의 상급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확신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를 택하여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잊지 맙시다.  구별된 성도는 세상의 성공과 번영이라는 목표에 목숨 걸고 팔려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하고 파격적인 대우를 해줄지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방식이 아니면 동의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목적 의식으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시편 1편의 말씀처럼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도리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 성으로 들어간 조카 롯의 허무한 결말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군사를 모집하여 롯의 뒤를 따라 구출하지 않았다면 롯의 처지는 어찌 되었을까요?   롯이 그렇게 추구했던 부와 성공이란 것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될 뻔 했습니다.   사람의 운명이 이처럼 하루 아침에 허무함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은 아브라함이 소돔 왕의 상급을 덥썩 받을 가벼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악인의 꾀를 덥썩 받아들이지 아니하며, 걸어야 할 길을 바로 알고 걸으며, 앉아야 할 자리를 가려 앉을 줄 아는 분별력과 통찰력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에게 주신 지혜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 복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가장 위대한 아버지로 존경과 인정을 받은 것은 그가 남긴 재산 규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물질이나 명예로 친다면 아브라함보다는 애굽의 총리가 된 그의 증손자 요셉이 더 큰 영향력을 가졌습니다.   아브라함 하면 떠오르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기다렸던 그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처럼 그의 이름은 창대하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후손들 뿐 아니라 유대인들과 신약의 성도들 그리고 모든 기독교인들이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부릅니다.  심지어 이스마엘의 후손들조차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여기고 있으니 하나님의 약속 성취는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놀랍습니다.     

반면에, 롯의 마지막은 어떠했습니까?   롯은 불 속에서 겨우 끄집어 내어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평생 일구었던 그의 재산과 명예는 소돔과 고모라가 불탈 때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천사가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들의 손을 잡아 끌어내지 않았으면 그대로 거기 머물러 있을 사람들이었습니다.   도망할 때 절대로 뒤를 돌아다 보지 말라는 천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롯의 아내는 기여코 뒤를 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롯의 아내는 지금까지 소돔 성에서 지냈던 일들을 뒤로 던져버리고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앞을 향해 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롯의 아내는 소돔 성에 두고온 자신의 평생 수고가 한 순간에 불타는 것이 아깝고 억울하고 분하여 미련과 아쉬움으로 과거를 붙들려다 소금기둥이 된 가련한 여인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의 종말에, 주님이 다시 오시는 심판의 날에 롯의 처를 생각하라(눅17:32) 하셨습니다.  롯의 아내는 세상 즐거움에 흠뻑 젖어 심판의 날이 이르렀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세상 재미에 빠져 하나님을 잊고 주님이 다시 오시리라 약속한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가 졸지에 심판에 이르는 불쌍한 사람들, 그 두려운 순간에도 세상의 것들에 미련을 두고 붙잡으려는 어리석은 사람의 대표적 모델이 되어버렸습니다.     

롯의 딸들이 소돔의 타락한 문화에 얼마나 깊이 빠졌던가요?  겨우 도망을 친 롯의 두 딸들은 아버지의 후손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아버지를 술에 취하게 한 후 동침하여 자식들을 낳았습니다.   롯의 가족이 소돔 성에 들어가 보고 배우고 몸에 익힌 삶이라는 것이 고작 그런 것이었습니다.   롯의 아내와 롯의 딸들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리석은 탐욕과 수치를 모르는 타락의 상징이 되어버렸습니다.  성공과 번영을 위해 명당을 찾아 떠났던 롯의 가문에 미친 결말 그것은 결코 복이 아니었습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아는 교회의 장로님 권사님 가정이 공직에서 물러나 살게 될 개인 저택 부지를 정하는데 풍수지리 학자를 불러 명당 자리를 알아보았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들을 하고 사는 것일까요?   명당이라는 것이 해가 잘 드는 양지바른 곳, 바람이 잘 통하며 물이 잘 빠져 쾌적하고 건강과 위생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갖춘 곳이라는 뜻이라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집을 짓고 거기에 묘를 써야만 후대가 복을 받고 가문이 번성하며 악재로부터 벗어나고 액운이 따르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으로 집터와 묘지 터를 고르는 생각 자체가 그리스도인 답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한다고 기독교인들도 아무 생각없이 세상 풍습을 따라간다면 그 마음에 과연 하나님이 계신지 아니 계신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 땅이 개발되어 몇 십배 몇 백배로 오르면 하나님께서 물질의 복을 주셨다고 간증하며 감사헌금도 드린다고 하지 않을까요?   혹시 우리들 중에도 그런 식의 복을 기대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면 마음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복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명당은 그곳이 어디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자리입니다.   롯이 성공과 번영을 따라 군침을 삼키며 찾아갔던 소위 명당이란 곳은 끝내 유황불로 불태움을 당하고 말았지만 아브라함이 약속을 따라 올라간 헤브론은 이스라엘 역사에 소중한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세상의 가치관과 풍습들을 너무 가볍게 여기고 가까이 하다 하나님이 명하신 길에서 벗어날까 염려됩니다.   사람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분별할 줄 알며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개인의 자유와 취향을 존중해주는 세상이라 해도 사람의 기본적인 도리를 무시하고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면서 자기 자유를 부르짖는 것은 무례함입니다.   내 돈으로 명품 물건을 입고 차고 바르고 끼고 들고 다니는데 누가 상관하랴 하겠지만 정도껏 해야 그나마 품위를 잃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놓으신 재물을 그런 식으로 허비하며 제 몸뚱이만 위해 사치스럽게 살라고 맡기셨을까요?   

정신이 바로 박힌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선망하는 명품 물건으로 자기 격조를 높이려 하지 말고 명품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치스런 물건을 휘감고 다니지 않아도 그 인격이 빛나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명품 인간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값진 명품으로 치장한들 우리는 질그릇일 뿐입니다.  질그릇과 같은 내 안에 보배되신 그리스도의 능력이 담겨있습니까?   명품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그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우리 마음에 비취기를 바랍니다. (고후4:6,7)

우리 시대의 성적 타락과 방종은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아무데서나 부둥켜 안고 다른 사람의 시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애정표현을 하는 젊은 남여들의 천박한 행동은 도를 넘어도 너무 넘어서고 있습니다.   지난 11월에 서울을 방문했을 때 퇴근 길 복잡한 지하철 안에서 어린 대학생 커플이 꼭 끌어안고 나누는 꼬락서니를 보며 기가 막혔습니다.  저녀석들 부모님들이 저 꼴을 보고 흐뭇하여 하나님이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를 보시듯‘보기에 심히 좋았더라’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제가 너무 시대에 뒤떨어지고 고리타분한 생각을 하는 것일까요?   청춘남여들이 사랑하는 사람 만나는 것을 금년 목표로 삼고,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복을 주신다면 좋은 사람 만나게 해달라는 기도는 하더라도 제발 행동은 제대로 합시다.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타락하고 더럽혀진 문화와 풍습 속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롯의 가족들처럼 무감각하게 함께 즐기며 따라가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불에 타 없어질 것들을 위해 온 인생을 허비한 롯의 가정을 보면서 마음을 다해 추구해야 할 우리의 참 목표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합니다.   

아브라함이 들어간 가나안은 완전한 낙원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변화되어야 할 세상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봅시다.   그들이 바라보고 들어가기를 원했던 곳은 가나안이 아니라 그 땅을 통해 보이는 더 나은 본향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크고 튼튼한 집을 짓고 그곳에 영원히 살 것처럼 재물을 쌓아놓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우리의 최종 종착지가 하늘에 있는 본향이라면 여기 이땅에 무엇을 남겨두어야 할까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함께 나누며 같은 믿음으로 한 방향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자녀들을 남겨두시기 바랍니다.  그 자녀들이 나와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가문을 이루는 것 그보다 더 복된 것이 있을까요?   부모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남기는 사람이지 많은 유산을 남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모는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전달하는 사람이지 자손대대로 편안히 먹고 살 재물을 남기는 사명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자자손손 편안히 먹고 살 재물을 남긴들 그 후손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돈 많은 부모 덕에 세상 즐거움만 추구하다 인생을 마친다면 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뭐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은 복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복이 따라다닌 사람이라면, 롯은 제 힘으로 복을 잡으려고 죽기살기로 따라다니다 타는 불속에서 겨우 건짐 받은 타다 남은 부지깽이가 아니던가요?   2012년 새해 복을 많이 받으시되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의 복, 주의 말씀과 동행하는 복을 풍성히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복을 실어나르는 복의 통로가 되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구원의 기쁨을 찬송하며 모든 이들에게 이 소중한 복을 전달하는 복의 통로가 되어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만나며 구원의 길에 이르는 복의 전달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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