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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풍랑 위의 배 (마 8: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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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 위의 배 (마 8:23-27)
  

지난 1월 13일 이탈리아 선적 유람선 코스타 콩코르디아호가 좌초 침몰되었습니다.
이 배는 ‘바다위의 성’이라고 할 정도로 호화스러운 쿠르즈 여객선이었습니다. 
승객과 승무원 4200여명을 태운 이 유람선은 “암초 좌초 후 선체에 큰 구멍이 뚫리면서 배가 기울었는데도 선장을 비롯한 승무원들이 수십 분간이나 상황을 방치해 문제해결을 지체했다.”고 합니다.

경찰은 모든 승객이 콩코르디아 호에서 대피하기 전에 스케티노 선장이 배를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선장이 이러면 안되지요?
선박이 좌초돼 프랑스인 관광객 2명과 페루인 선원 1명이 숨지고, 적어도 40여 명이 실종됐습니다. 
최신식 장비와 기계를 갖춘 좋은 배라고 할지라도 풍랑이 몰아칠 때는 견딜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는 배와 같은 우리들은 유리와 같은 잔잔한 바다 위를 지날 때도 있지만 때때로 풍랑 이는 흉흉한 바다 위를 지나면서 곤욕을 치를 때도 있습니다. 
인생의 바닷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우리 앞에 펼쳐질 새해도 결코 녹록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살펴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 위를 항해하고 있습니다.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치시며 쉼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기에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큰 풍랑이 일어 배가 물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제자들은 혼이 나간 사람처럼 잠자는 예수님을 깨우면서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절규했습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도대체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데 이런 풍랑에도 정신을 잃고 사색이 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라고 야단을 치시면서 바다를 잔잔케 하셨습니다. 
저는 이 간단한 사건을 읽고 묵상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1. 먼저, 이 사건이 보여주는 객관적인 진실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구도, 어떤 지성도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인 진실이 본문에 있습니다.

1) 예수님이 함께 있어도 풍랑은 일었다는 진실입니다.

24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풍랑은 일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만 믿으면 실패도 없고, 질병도 없고, 사고도 없고, 시험에 떨어지는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고난을 당해? 예수를 변변히 믿지 않아서 고난을 당하는 게지. 저 사람에게 시험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니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해.”라고 판단합니다. 

물론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자신의 신앙생활을 뒤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해보는 것은 참으로 좋은 태도입니다. 
그러나 남을 향하여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고난을 받느냐?’고 질문하거나, 판단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있던 제자들마저도 풍랑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성경에는 욥기라는 책이 있는데 욥은 의로운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욥 1:1절을 보십시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그렇지만 그런 욥도 고난을 받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에게도 풍랑이 일 수 있다는 진실을 배워야 합니다.

2) 더 놀라운 진실은, 고난 중에도 주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25절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풍랑을 만나 사색이 된 제자들 한 가운데 주님이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바다 한 가운데서 풍랑으로 고통당하고 있을 때 주님은 해변에서 조용히 낚시를 즐기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행 7장에는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의 순교 장면이 나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기 전 하늘을 바라보니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 계셨습니다. 
행 7:55절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우리가 사도신경으로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라고 신앙고백합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했는데 스데반이 순교당할 때에는 왜 서계셨을까요? 

많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남의 일이라면 앉아서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내 일이라면 앉아서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잘 견딜까?’ ‘저 순간에 얼마나 힘들까?’ 
초조한 마음으로, 긴장된 마음으로 일어서실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월드컵 축구 경기를 TV중계할 때 경험했잖아요? 
우리와 상관이 없는 브라질과 네덜란드가 경기할 때는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한국과 독일이 경기할 때는 앉아 볼 수가 없었지요? 
공이 상대편 골 포스트를 지나가면 ‘아이고!’하고 땅을 치고, 골을 넣으면 껑충껑충 뛰고 그것도 새벽 3시에 잠도 안자고 말입니다.

‘Foot Print’라는 시 여러분 아시지요? 
그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나 어느 날 꿈을 꾸었네./ 해변에 두 개의 발자국이 났었네. 하나는 주님의 발자국 다른 하나는 나의 발자국/그런데 어디엔가부터 한 발자국 밖에 없었네. 나는 물었네./ 주님, 그때는 내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때였는데 왜 혼자 두셨습니까?/ 아니야! 그때에는 네가 너무 고통스러워하기에 내가 너를 안고 갔지. 주님 대답하셨네." 
내가 고난 받을 때 그때에도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는 진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3) 풍랑은 곧 잠잠하게 되었다는 진실입니다.

26절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풍랑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풍랑은 곧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끔씩 이런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받는데 불의한 사람이 잘 되고 떵떵거리고 살 수 있을까?’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의인의 고난은 잠간이고, 불의한 자의 형통도 잠간이라는 사실을! 

시 37:1-2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그래서 시인은 권면합니다. 
시 37: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결국 불의한 자는 끊어지고 의로운 자는 살아남습니다. 
시 37:9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그것이 그냥 넘어가겠습니까? 
풍랑은 곧 잔잔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풍랑도 곧 잔잔하게 될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2. 그러면 왜 믿는 자에게 풍랑이 일어나는가?

1)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깊이 체험시키기 위하여

27절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고백한 메시아 사상에는 메시아가 오시면 자연도 그분께 복종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는 말속에는 ‘이분이 진짜 메시아이시구나.’라는 체험적 고백이 담겨있습니다. 
고난을 받아야 주님에 대한 믿음이 순수해지고, 확실해지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관동대학교 국문학교수이고 시인인 엄창섭 장로님이 계십니다. 
이분이 저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고등부 선생님으로 성경을 가르쳤지만 그분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은 지성인의 교양 그 이상이 아니었고, 그분에게 있어서 성경은 문학적 재료 그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오토바이를 타고 다가가 고속버스에 튕겨서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이분이 병상에 있을 때 한번 병문안을 했습니다. 
이분이 제일 처음 하시는 말씀이 주님의 사랑과 천국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줄을 사고를 당하고서야 알았다는 것입니다. 

“천국 갈 준비를 해야 돼. 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야. 뭘 모르고 살았어.”
이분의 고백이었습니다.
고난 속에서 만난 주님이야말로 ‘우리의’ 주님이 아니라 ‘나의’ 주님이 될 수 있습니다. 
“요즈음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어리석게 예수를 믿느냐?”
“요즈음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교회에 가서 웅크리고 앉아 있니? 너답지 않게!” 
그때 대답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받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체험했다.” 

입시의 실패에서 만난 주님, 사업의 파산에서 만난 주님, 좌절의 깊은 수렁에서 만난 주님, 질병의 늪에서 만난 주님,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에서 만난 주님, 이 나의 주님을 어떻게 모른다고 하겠습니까? 
여기에는 정교한 이론이 필요 없습니다! 
내 마음 속에 계신 주님을 어떻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엘리야가 이세벨 왕후에게 쫓기다 못해 너무나 삶이 곤고하여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소원하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 정도로 고난이 심했다는 것이지요!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하나님, 살만큼 살았으니 이제는 데려가 주십시오.) 
그때 그는 주님의 부드럽고 세미한 음성을 듣습니다.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죽고 싶다고 애원하는 고난의 현장에서 주님의 부드러운 위로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담대히 선포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고난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고난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찬송가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찬송가304)

2) 왜 믿는 자에게 풍랑이 이는가! 우리에게 영광을 더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 골고다 언덕 위에서 죽기 몇 초전에 구원받은 강도와 주님을 위해 수없는 매를 맞아가면서 주리고 목마르고 춥고 헐벗었고(고후 11:23-27) 그리고 마지막 그의생명마저 주님의 제단에 바친 바울 사도가 천국에서 받을 영광이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영광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면류관이 될지, 기쁨이 될지, 자랑이 될지 모르지만 확실히 다를 것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하나님께 신원하는 간구를 드리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너도 나도 신원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 즉 순교자들만이 신원할 수 있습니다. 
계 6:9-10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그 누리는 영광이 다릅니다.
믿는 자에게 영광을 더하게 하기 위하여 고난은 옵니다.

나가는 말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영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조셉 스크리븐은 캐나다에서 교사가 되었고, 아름다운 여성과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약혼을 했습니다. 
두 사람은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결혼식에 오던 약혼녀가 배가 침몰되면서 그만 죽고 맙니다. 
스크리븐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학교를 사직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나를 이 깊은 상실감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하던 중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사랑하는 약혼녀를 호수에서 잃고 슬퍼하지? 나는 하나뿐인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잃었단다.” 
그때 그는 주님의 깊은 사랑을 온몸으로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쓴 찬송시가 바로 ‘죄 짐 맡은 우리 구주’(369장)입니다.

①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받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② 시험 근심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③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드리세 
세상 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 된 위로 받겠네. 

시계 속에 장착된 톱니바퀴들은 제각기 반대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시계를 한번 뜯어보세요. 
그러나 이 모순 같은 톱니바퀴들은 실은 큰 바늘과 작은 바늘을 정확히 움직이기 위해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운 일, 아픈 일, 괴로운 일들이 제각기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우리를 하나님의 선하신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롬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사실을 믿고 한 해를 출발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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