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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의 선언 - (3) (마 5: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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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선언 - (3) (마 5:7-12)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여덟 가지 복을 제시하셨습니다. 이것을 팔복이라고 말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이 팔복 중 네 가지의 복을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천국과 위로받음과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과 의로 배부름의 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이는 복에 너무 익숙해져서 이 같은 영적인 복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 영적인 복은 예수께서 제시하고 추천하시는 최고의 복입니다. 또한 아주 근본적인 복이고 복중의 복입니다. 오늘은 나머지 네 가지 복을 더 살펴보려 합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음 

다섯 번째 복은 긍휼히 여김 받음의 복입니다. 7절을 보면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긍휼”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엘레오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사랑”, “동정”, “불쌍히 여김”이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긍휼도 하나님의 긍휼과 사람의 긍휼이 다릅니다. 사람의 긍휼은 그냥 동정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은 사랑과 은혜와 용서가 포함된 행동하는 동정입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습니다. 아주 초라하고 병든 몸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형은 불평하고 재산을 탕진한 놈이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아들을 긍휼히 여겼습니다. 아버지는 목욕시키고 옷을 갈아입히고 팔찌를 끼워 다시 아들로 회복시켰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긍휼은 말뿐이 아니고 행동하시고 직접 사랑의 손길로 찾아오시는 긍휼입니다. 마태복음 5장-7장을 산상수훈이라고 말합니다. 

그 중 앞부분의 팔복은 신학이고 교리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의 부분은 모두 이 신학을 이루기 위한 시행세칙이고 생활규범입니다. 거기에서 긍휼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속옷도 벗어주라, 오리를 가자는 사람에게 십리도 가주어라, 너를 욕하는 자를 축복하라, 소자에게 물 한잔 주는 것은 곧 나를 대접하는 것 이니라” 이것이 긍휼의 생활규범입니다. 

이 세상에도 이런 긍휼이 있습니다. 미국 미네소타 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신사가 뜨거운 여름에 자동차를 몰고 가던 도중에 차가 고장 나서 멈춰 버렸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집 한 채가 있어 도움을 받으려고 갔습니다. 집 주인은 시원한 주스 한잔을 주며 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쉬운 것 같지만 아무나 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기적을 일으키는 요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얼마 후 그 집 아이가 병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치료차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는데 치료비가 너무 많이 나왔습니다. 그 부모들은 크게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퇴원할 때 보니 누군가 병원비를 대납한 것입니다. 그리고 쪽지 한 장이 남겨져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주스 한잔과 친절로 병원비가 지불되었습니다. 의사 메이로부터”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예전에 주스 한잔을 얻어 마신 그 신사가 바로 그 병원의 설립자이자 원장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긍휼의 열매입니다. 

영국 메리 여왕이 민정시찰을 나갔습니다. 허름한 옷을 입고 농가들을 방문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어느 농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메리여왕은 우산을 좀 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그곳 주인여자는 쳐다보지도 않고 다 부서져가는 우산 하나를 골라 주었습니다. 다음날 메리여왕은 시종을 시켜 그 우산을 돌려주었습니다. 그 시종은 우산을 돌려주며 “어제는 고마웠습니다, 어제 그 분이 메리 여왕이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집 남편이 “팔자 고칠 뻔 했는데” 하며 후회를 했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가끔 탁발승이 배낭을 메고 시주를 얻으러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당연히 “우리 집은 예수 믿어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아무 소리 안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도 “우리 집도 예수 믿어요!”하고 돌려보냈습니다. 그 스님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다고 말한 사람에게 주기도문을 외워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주스 한잔 주는 것은 쉬운 것 같아도 이렇게 어려운 일입니다. 

긍휼을 헬라어로 “엘레오스”라고 합니다. 이는 자비라는 뜻입니다. 임금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엘레오스입니다. 탕감 받은 사람이 왕궁을 나오다가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사람에게 당장 갚으라며 감옥에 넣습니다. 그것이 긍휼의 반대모습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긍휼이 사라지고 모두 자기위주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익에 집착하고 고리채를 하고 속이고 배려가 없습니다. 시편 15편 3절을 보면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며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로다”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바로 긍휼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팔복 가운데 다섯 번째로 긍휼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긍휼로 자녀 된 사람들입니다. 그 복을 받은 것처럼 그 복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뵙는 복

여섯 번째 복은 하나님을 뵙는 복입니다. 8절에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삼성의 창업주인 고 이병철 씨가 작고하기 두 달 전에 24개항의 신앙적 질문을 남겼다고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 오래전 25년 전에 있었던 질문들을 엮어 오늘 “잊혀진 질문”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그 질문 중에서 15번째 질문이 “왜 하나님은 자신을 확실하게 내 보이지 않는가?”라는 것입니다. 원문 그대로 말하면 “신이 이 세상에 있다면 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숨어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내 보이셨고 많이 나타나셨습니다. 

단지 우리들이 보지를 못하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이 욕망덩어리 눈을 가지고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그 분이 어찌 하나님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두 가지 방법에 의해서 입니다. 하나는 청결한 마음으로 보고 또 하나는 영적인 안목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물이 청결하면 깊이까지 볼 수 있습니다. 공기가 맑으면 멀리까지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안목이나 감각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의 세계를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하나님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만사를 제쳐두고 예배드리러 오신 것입니다. 헬렌 켈러 여사는 눈과 귀와 입이 어두워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그녀에게 얼마나 불편하고 답답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녀는 “나는 이 눈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았고 하나님을 뵙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만나고 영적으로 만나고 영적 안목으로 보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갈 때 하늘을 우러러 보니 하늘 보좌의 예수님이 일어서서 내려다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도요한도 영적 안목으로 하늘위로부터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하고 외쳤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섯 번째로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뵙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보고 믿는 생활입니다. 마음으로, 영적인 눈으로, 믿음의 안목으로 하나님을 보는 생활입니다. 보고 믿어야 그 믿음에 깊이가 있고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꾸만 우리의 눈과 마음이 흐려지고 탁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문화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의 문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욕망과 거짓을 품게 만들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어린아이들의 맑음과 순수함이 오래가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학교교육이 참 중요합니다. 학교에서는 교육을 통해서 아이들의 영혼과 정신, 마음과 영을 맑게 유지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학교교육은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입시교육중심으로 경쟁만 치열해 지고 상대방을 이겨야 한다는 오늘의 교육은 아이들의 마음을 삭막하게 하고 상하게 하여 인성교육이 절대 부족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상위 공부 잘하는 아이들 몇 %를 제외하고는 비전도 없이 공부를 합니다. 그 결과 학교에서 아주 메마른 심성의 열매로 폭력이 난무하게 되었고 친구의 돈을 갈취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성폭행까지 나타나고 있으니 지금 아이들의 영혼이 얼마나 피폐하고 삭막해졌다는 말입니까. 이는 모두 어른들의 책임입니다. 오늘의 이 현상은 어제 오늘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수년 동안 우리의 환경이 만들어 준 열매입니다. 

요즘 학생인권조례라는 것이 문제인데 이는 인권을 소중히 여기자는 취지일지라도 도를 넘고 있습니다. 인권조례 6조에서는 초중고생이 학교 내에서 동성애도 허용하자고 주장하고 있으며 7조에서는 초중고생의 임신출산을 허용하자, 16조에서는 초중고생들이 학교 내에서 정당정치활동을 합법화하자고 주장합니다. 또한 사학에서는 성경을 가르치거나 특정 종교를 말하지 말게 하자는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초중고생 아들딸들이 동성애를 하고 임신을 하고 학교에서 데모를 주동한다면 그것도 자유이니까 묵인하자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누구를 위한 조례입니까. 오늘은 자유만 외칠 뿐 책임을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분명 책임 없는 자유는 타락하고 방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자유를 누릴만한 능력이 부족한 미성년자들에게야 말하면 무엇 합니까. 

그러니까 오늘 약한 아이들에게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휘둘러서 돈을 갈취하고 성추행하며 심지어는 교사에까지 칼을 들이대는 아이들이 발생하게 되었고 더구나 그 아이들이 죄책감이나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인식도 없이 재미로 해 본다는 것입니다. 오늘 그런 아이들 마음속에 무슨 꿈이 있고 동화가 있으며 무슨 배려가 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복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복이 자유입니까? 부요입니까? 예수님은 일곱 번째로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보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복은 청결한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음

일곱 번째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9절을 보면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인정받는 삶이 중요합니다. 인정받음, 거기서 힘이 솟아나고 능력이 주어지고 소망이 만들어 집니다. 오늘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는 이 인정받는 삶이 참 중요합니다. 인정받을 때 공부하는 동기가 발생합니다. 선생님의 인정하는 한마디가 힘이 솟게 만들고 부모님의 인정하는 한마디가 열심히 공부하게 만듭니다. 사람의 인정도 이렇게 소중한데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소중한 복입니까? 

아브라함이 롯이 떠난 후 홀로 광야에 서 있습니다. 조카 롯이 좋은 땅, 좋은 일꾼을 다 차지해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황무지인 광야 한복판에 홀로 서 있습니다. 그때 혼자 있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이 넓은 땅을 다 네게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내가 너를 인정하고, 지키고, 네 편이 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까짓 땅이 문제겠습니까? 야곱이 도망 중에 광야에서 홀로 돌베개를 베고 밤을 새웁니다. 그때 환상이 보이더니 하늘로부터 사다리가 내려오고 천사들이 그 위를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그리고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두려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너를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리라.” 그때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모세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이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가라.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수1:9). 이것이 격려요 인정입니다. 이 보다 더 중요한 복이 또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어떤 복이 이런 복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이 복이 일곱 번째 복입니다.

천국 안의 삶 

마지막 여덟 번째 복은 천국의 삶입니다. 10절을 보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3절에서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라고 하셨고, 5절에서도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이렇듯 예수님이 제시하신 팔복은 천국으로 시작해서 천국으로 끝납니다. 천국은 두 가지 천국이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소유하는 천국입니다. 여기서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은 하나님을 사모함으로 세상적인 것을 비우는 마음을 말합니다. 

두 번째 천국은 예수 때문에 박해받고 고난 받는 사람에게 보상으로 주어지는 천국입니다. 천국은 그냥 가는 곳이 아닙니다. 공짜로 가는 곳도 아닙니다. 많은 고난자들, 순교자들, 믿음의 선진들이 간 곳이 천국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고난과 핍박과 수난과 피 흘림으로 순교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천국에 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백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면류관이 예비 되어있을 것이다.” 천국은 수고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급이고 보상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수고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천국은 가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천국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한 남자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로 하여금 스데반처럼 눈이 열려서 하늘의 하나님을 보게 하시고, 베드로처럼 기적을 행하게 하시고, 바울처럼 독사에 물려도 상함이 없게 하소서.” 그런데 그때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그러려면 베드로처럼 감옥에 가야하고,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야 하고, 사도바울처럼 채찍에 맞고 감옥에 갇히고 명예를 헌신짝처럼 버려야 하는데 할 수 있겠나?” 이 사람이 그 음성을 듣고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천국은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닙니다. 공짜로 가는 곳도 아닙니다. 천국은 예수 때문에 그리고 의를 위해서 고난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입니다. 그렇다면 모두 채찍에 맞고 돌에 맞고 순교해야만 천국에 가는 것일까요? 천국은 그렇게 수고한 사람에게 상급으로 주어지기도 하지만 또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주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제시하신 여덟 가지 복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상의 여덟 가지 복을 종합하면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참된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다스림을 받고 뵙고 관계 속에서 뜻을 발견하며 위로와 힘을 얻고 자녀로 인정받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 복을 위해서라면 다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베드로처럼, 스데반처럼, 사도바울처럼 되고는 싶은데 포기하고 고난 받을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천국은 가고 싶어 하고 하나님으로부터의 풍성한 복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까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너무 가진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버리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너무 값싼 은혜를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을 너무 값싸게 대하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영원한 복입니다. 또한 하늘의 복이고 영적인 복입니다. 이런 복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 삶이 하나님 먼저, God First의 삶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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