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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 자 (눅 12: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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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 자 (눅 12:16-21)


19세기 말, 어려웠던 시절에 영국 화가 '죠지 프레드릭 왓츠'가 그린 그림 가운데 '소망'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앞의 화면에서 볼 수 있듯이 둥근 지구 꼭대기에 한 젊은 여인이 앉아서 한 줄만 남아 있는 하프를 연주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이 여인은 눈을 수건으로 싸맸는데 앞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밤 하늘에는 희미한 별 하나가 반짝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연주하는 하프의 줄들이 다 끊어졌고 마지막 한 줄만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진지하게 하프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화가는 이 모습을 '소망'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화가는 이 그림을 통해서 아마도 마지막 남아 있는 하나의 줄은 하나님께 매어있는 소망의 줄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한 줄로 소망을 연주함으로써 세상의 지친 삶에서 낙심과 절망에 빠진 많은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난파하는 배처럼 출렁거리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어디가 길인지 긴장과 과로 속에서 진정한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재물의 줄, 권세의 줄, 혈연의 줄, 건강의 줄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세상에서 그토록 의지했던 모든 줄들이 다 끊어지고 캄캄한 밤 하늘에 별들이 한 점 보이지 않는 어둡고 힘든 삶이 내 앞에 펼쳐질 수가 있습니다.  그림의 여인처럼 수건으로 얼굴을 싸매고 있어서 앞을 볼 수 없는 것처럼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 상황 앞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그럴 때에라도 예수 줄을 놓지 마십시오.  우리가 예수 줄을 놓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아직도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생명이십니다.  죽었던 영혼들이 생명 되시는 예수를 붙잡는 순간 그들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주와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인 길이십니다.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이 땅의 모든 인생들이 그분을 붙잡는 순간 인생의 방황은 끝이 나고 꿈과 비전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이 이 땅을 덮게 될 때 황무한 이 땅은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능하신 손을 붙잡고 일어나십시오.

이 세상에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죄와 질병과 생활고와 인간관계로 끊임없이 우겨 쌈을 당합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하나님을 알든 모르던 똑같이 저들의 입에서 고백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이 곤고한 몸에서, 이 버림받은 몸에서 구원하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두운 세상을 향해 복된 말씀을 외쳐야 합니다.  복된 말씀을 선포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 생명의 주인으로 모신 사람들은 일마다 때마다 모든 우겨 쌈을 당하는 상황 앞에서도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는 길이 있다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떤 힘든 일을 당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오늘 여러분이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지라도 아직 하나님이 나를 도울 수 있다고 하는 믿음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 믿음만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자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은 때때로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라. 내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능치 못할 일이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꼭 붙잡으십시오.  우리가 예수의 줄을 붙잡고만 있다면 우리에게는 아직도 소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앞에는 내가 살고 있는 길보다 더 아름다운 길이 있습니다.  내가 가고 있는 길보다 더 아름다운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꿈을 꾸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소망 없는 세상 가운데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 사람은 내 앞에 내가 살고 있는 길보다 더 아름다운 길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생각했던 그 길보다 더 위대한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실는지 모르지만 오래 전에 나온 광고 가운데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선택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10년만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한 사람은 20년만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영원히 잘 됩니다.  그러므로 잠시 잘 되는 길을 선택할지 말고 영원히 잘 되는 길을 선택하십시오.  잠시 잘 사는 방법을 선택하지 말고 영원히 잘 사는 방법을 선택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믿음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나의 구주로 믿고 그분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제게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모습을 성경에서 찾으라고 한다면 저는 본문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인생이 오늘 우리들의 인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재물을 쌓는데 인생의 의미를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재물을 쌓았습니다.  그는 황금만능을 추구하는 맘몬주의자의 대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에 보면 이 부자가 고민한 것은 창고에 대한 근심입니다.  그런데 안되어서가 아니라 소출도 늘어가고 곡식도 늘어가고 잘되는데 창고가 부족한 것이 그의 근심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부자는 오늘로 말하자면 500억 달러에 달하는 재산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보다 더 잘 되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세상 일들이 너무 잘되는 것이 걱정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밤마다 시간마다 늘어나는 재산의 장부를 정리하면서 혼자서 독백을 합니다.  "내 영혼아,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솔직히 이것보다 더 멋진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근사한 말이 세상에 있을까요?  정말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날 밤에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딱 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 주위에 보면 창고 지향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창고 지향적인 이 부자의 모습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들은 열심히 내 창고를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물건들을 차곡차곡 쌓아두는데 목적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이렇게 외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 소유만이 내 존재의 의미요, 소유만이 행복이고, 소유만이 평안이다.  창고의 크기가 내 인격의 크기고, 내 행복의 크기고, 내 삶의 전부다.  그러므로 내 영혼아, 창고를 키우자.  그런데 어디에 쌓을까?  주식? 증권? 부동산? 패물? 자식?"

그래서 내 창고를 키우고 그 창고에 재물을 차곡차곡 쌓기 위해 마땅히 투자할 곳을 찾기에 분주합니다.  그런데 창고 지향적인 사람들을 보면 내 삶의 목표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길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인지 아닌지 그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 창고에 많이 쌓이기만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 존재의 이유요, 그것이 행복이요, 창고의 크기가 내 인격의 크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마지막 날, 우리가 내 인생을 창조하신 그 분 앞에 섰을 때 그분이 나를 보고서 하시는 첫 말씀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본문에는 없지만 아마도 이 사람이 하나님께 반항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찾아오셔서 "어리석은 자야"라고 하셨을 때 이 사람은 하나님께 따졌을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제가 왜 어리석습니까?  제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열심히, 성실히 일을 했는 줄 아십니까?
앞 뒤 바라보지 않고 오직 돈만 보고 달렸습니다.  남이 잘 때 자지 않고, 남이 놀 때 놀지 않는 일 벌레였습니다.  그저 일밖에 몰랐습니다.  별 보기 운동을 했습니다.  새벽에 나가서 밤에 들어왔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남다른 예감도 있고 재능도 있고 기회도 있고 운도 있어서 투자하는 것마다 성공했습니다.  사업도 확장하고 창고도 늘이고 통장도 늘이고, 이 꿈을 성취하기 위해서 휴일도 없이 뛰었습니다.  끝없이 성취의 길을 달려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나는 식구와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고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왜 어리석은 자입니까?  하나님, 못마땅합니다.  내가 밤잠도 못 자고 새벽부터 골프장에 나가서 사람들을 사귀고 밥 사주고 해서 일으킨 사업입니다.  누구나가 창고를 넓히는 줄을 아십니까?  돈벌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아십니까?  내가 얼마나 남모르는 고민과 의지를 가지고 세상적인 지혜를 다 써서 모은 재산인데 내가 어리석다니요."

아마 이 사람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항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항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항변이기도 할 것입니다.  아마 후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나름대로 다 한마디씩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부자가 창고를 크게 짓고 돈을 모으는데만 열심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책망하셨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아주 지극히 현실적인 종교입니다.  하나님도 너무나 지극히 현실적이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고를 크게 짓고 재물을 쌓아는 것이 잘못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손을 대는 것마다 다 잘되는 이 사람을 찾아오셔서 책망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이 사람은 내일이라는 시간을 자기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본문 19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여기에 보면 이 잘되는 부자는 자신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이 사람은 미래의 시간이라고 하는 것도 자기의 것인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창고에 열심히 재물을 쌓는 재미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잘되는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사랑하는 여러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어리석은 부자처럼 시간도 내 것이라고 철떡 같이 믿고 살아갑니다.  내일만이 아니라 모레도 내년도 내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10년의 계획을 세우고, 20년의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시간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내일 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내일을 기약할 수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오늘 여기에 있는 누구도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 어떻게 될는지 모릅니다.

"목사님, 내일 만나요"라고 인사를 하겠지만 내일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은 아무도 못합니다.  시간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내일을 허락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내일의 시간을 기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이 잘되는 부자는 시간도 자기 것이라고 착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쌓은 소유도 영원히 자기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소유가 정말 내 것입니까?  지금 내가 가진 것이 어제까지는 누구의 것이었습니까?  소유라는 것은 본래에도 내 것이 아니고 앞으로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있다고 다 내 것입니까?  정말 이 땅에 영원한 소유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지혜를 줍니다.  "이 땅에 영원한 소유는 없다.  다만 청지기가 있다."  관리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시간이 내 것입니까?  아닙니다.  시간을 관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내 건강이 내 것입니까?  아닙니다.  건강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내 재능이 내 것입니까?  관리하고 있습니다.  내 물질이 내 것입니까?  관리하고 있습니다.  내 생명이 내 것입니까?  관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이 모든 것을 감사하고 잘 관리해야 합니다.  내 건강도, 내 물질도, 내 자식들도, 내 생명도 잘 관리해야 합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충성이라는 말은 신실함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신실한 청지기가 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착각에서 벗어나십시오.  어느 날엔가 내 인생에서 돈을 많이 벌어서 창고를 넓히고 쌓아 놓으면 내 준비가 끝나는 날 먹고 마시고 즐기리라는 그 착각에서 벗어나십시오.  그런 날은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교인들 중에 99퍼센트가 거의 그렇게 살아갑니다.  깨어나셔야 합니다.  깨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이 사람은 인생의 참된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면 그 영혼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래서 이 부자처럼 되고 싶어서 열심히 창고를 넓히고 그 창고에 재물을 쌓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이만큼 살아보니까 먹고 쉬고 마시고 즐긴다고 해서 그 영혼이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다고 해서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 그래서 창고가 커졌을 때 잘못하면 그 영혼이 병들고 건강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가족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 어떤 사람은 영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인생의 창고를 넓히는 것만이 목적이고 삶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비극이고 고난입니다.  하는 일마다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두는 확장의 길로만 간다면 그것도 지겹고 힘든 일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인생은 빨리 해야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습니다.  인생은 속력을 내고 성취를 해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들이 있습니다.

어느 날 내가 일에 미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동안에 내 자식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훌쩍 커버렸습니다.  열심히 창고를 넓히느라고 젊음을 바치는 동안에 자녀들과 함께 손잡고 남길 수 있는 아름다운 기억들은 하나도 없이 그 아이들은 내 곁을 떠나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이 너무 쉽게 속아넘어가는 것은 창고만 넓히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창고를 넓히고 난 다음에 당신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그때는 이미 아이들은 커서 내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렇게 창고 지향적인 삶을 사는 동안 내 가정은 삭막한 사막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인생은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이 땅에 보내신 그 분 앞에 서야 할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그분이 나를 보시고 뭐라고 하실까요?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하실까요, 아니면 "어리석은 자야"라고 하실까요?  기억하십시오.  우리 앞에는 내가 살고 있는 길보다 훨씬 아름다운 길이 있습니다.  내가 고집하는 생활보다 더 좋은 길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삶의 길에는 소유로부터 자유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모든 소유의 굴레로부터 해방되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유로부터의 자유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중요한 한 테마입니다.  인간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 소유인가 존재인가 하는 것도 신앙의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졌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소유로서가 아니라 존재로서 살아갈 때 거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알지만 일체의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룬 것은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가 내 창고를 지키리라.  내 창고를 넓히리라.  내 창고를 위해 살리라.  내 창고에 쌓으리라.  내 창고만이 내 삶의 의미의 존재이다.

그러나 여러분,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다 떠나갑니다.  왜 땅에 있는 나를 죽이는 연습을 해야 하느냐?  땅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정욕입니다.  땅의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정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땅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욕심입니다.  사욕입니다.  끝없는 죄악입니다.  부끄러운 것들 뿐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땅에 있는 것이 부족해서 밤새도록 애쓰다가 한 마리도 못 잡고 빈배로 돌아옵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 배에 오르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내 인생의 그물을 던져야 하는 깊고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려지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살고 있는 곳보다도 더 깊은 세계에 그물을 던져보십시오.  우리가 사는 인생 길에는 우리가 알려고 하든 알지 않으려고 하든, 인정을 하든 인정을 안 하든 본질적으로 더 의미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을 잃어버리면 인생에는 혼란이 옵니다.  그것을 잃어버리면 고통이 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도 땅의 것만을 쫓아다니다가 욕보고, 다 무너지고, 짐승의 냄새가 나는 단계가 되었을 때에 모든 것을 다 벗어 던지고 아버지 품에 돌아오니 거기에 진짜 평안이 있었습니다.  인생이 지금까지 살던 거기보다 더 깊은 곳에 던져 보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과 평강을 찾아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한 해를 살아가면서 창고를 넓히고, 창고에 무엇을 쌓을 것인가를 고민하지 말고 믿음의 사람들에게 믿음의 진보를 보이는 일에 도전해 보십시오.  신앙의 진보가 나타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우리를 돕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우리를 돕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유아처럼 믿음의 진보가 전혀 없이 살아가시겠습니까?  장성한 분량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것을 맡기실 것이 아닙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땅의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믿음의 진보가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십시오.  내가 믿을 때에 내 믿음의 진보가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틀림없이 다시 쓰실 것입니다.  높여 주실 것입니다.  세워 주실 것입니다.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내가 믿을 때 내 믿음의 진보가 모든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와 꿈을 줄 수 있도록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땅에는 결국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먼저는 자신에 대하여 부요한 자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미련한 자라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자입니다.  생기기만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부유한 자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혼란이 있습니다.  늘 자기와의 투쟁이 있습니다.  남과 끊임없는 투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세상에 대하여 부요한 자들은 세상을 파괴와 탐욕의 역사로 만들었습니다.  세상에 썩어지는 역사는 언제나 자기에 대하여 부요한 자들이 만든 타락의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꿈꾸셔서는 안됩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그 생명의 주인 되신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의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이 세상은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 자들이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 자들이 이 살맛 없는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 자들이 이 지친 세상 속에서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따라서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 자들이 이룩한 역사였습니다.  믿음의 역사는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 자들에게만 허락하신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 아침에 있다가 없어질 안개와 같은 세상 것에 부요한 자가 되지 말고, 거룩한 하늘의 것에 부요한 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역사를 보십시오.  네로와 히틀러가 머무는 그곳에는 살상과 폭행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하여 부요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미국 청교도들이 머무는 그곳에는 교회가 서고 학교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발길이 머무는 그곳에는 언제나 사랑이 전파되었고 구원의 역사가 있었으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해도 하나님에 대하여는 부요한 자가 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거룩한 삶을 통해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도 얼마든지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정도의 축복은 누리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절대로 경주할 수 없습니다.  달릴 푯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푯대 없이, 목적 없이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나그네처럼 방황하는 삶에는 진정한 의미의 생명이 없습니다.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와 같은 것으로는 궁극적으로 성공할 수 없고 행복해 질 수도 없습니다.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 앞에는 다른 세상이 있습니다.  다른 삶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이야기하고, 그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그 생명에는 진정한 의미의 행복이 있습니다.  풍성함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에서의 그 풍성함 삶을 우리는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그 구원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세상 명예와 지위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천국은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 자들만이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인생들에게 심판의 날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어느 사람이 가지고 누렸던 호칭보다 더 귀하게 평가받는 것이 있습니다.  그날에는 그가 지녔던 재산보다 더 아름답게 평가받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준비한 것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준비만 하다가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서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오히려 세상에 대하여는 비록 가난하지만 하나님에 대하여는 부요한 자들이 되어서 오고 오는 세대와 영원한 천국에서 별과 같이 찬란하게 빛나는 믿음의 보배가 되어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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